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41화 (741/1,021)

#741.

“요즘 일본 대기업은 과거 그 일본 대기업이 아닙니다. 당장 나이 들어서 은퇴하면, 재취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죠.”

최민혁은 혀를 찼다. IMF 이후에 한국의 모습이 딱 그랬으니까. 그는 물론 코다 도시히로 이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한 가지 점이 걱정스러웠다.

“한번 배신한 이들이 또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제이미 니콜라스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일본 대기업을 상대하는 브로커 역할을 맡길 생각입니다. 배신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에 느낀 것이지만 우리 측에서 일본 대기업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만만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단 한 치의 틈을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표정과는 달리 이번 일은 겉으로 봐서는 쉽게 넘어간 것 같아도 난관이 제법 있었다.

코다 도시히로 이사는 의심이 많은 인물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신뢰가 문제가 되어서 중간에 탈이 날 뻔했다.

그나마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남을 잘 설득해서 일이 잘 풀린 것뿐이다.

이번 일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역할이 꽤 크게 작용했다.

최민혁으로선 그런 점까지는 몰라도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상황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결과가 나온 것으로 만족했다.

“아, 그렇죠. 아무래도 일본이란 나라의 폐쇄성이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군.’

하지만 이런 일본의 보수적인 성향이 근원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종신고용으로 유명했던 일본 역시 경제 불황으로 인해 조기 퇴직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이 조기 퇴직은 일본 직장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물론 10년 앞서 퇴직하는 경우에는 월급이 1.5배를 넘는다.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여전히 이익이다.

이런 현상은 일본 정부 처지에서는 좋을 수가 없다.

당장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복지 수익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세금을 인상하거나 아니면 복지를 줄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것은 한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은 문득 지금 하는 일이 미래에 일어난 한국에서의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지금 하는 일도 크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일본 내부 분위기를 안 이상 다음 스토리는 뻔했기 때문이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이용하면 일본이 가진 다른 원천기술도 빼돌릴 수 있겠어.’

제이미 니콜라스는 이번에 사들인 MPEG-2 관련 특허를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매각한 점을 내세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는 최민혁 실장님 파트너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민혁은 물론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달콤한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MPEG-2 관련 특허 매입 최종 계약서를 확인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믿습니다.”

그로서는 솔직히 지금 결과는 전혀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MP3 원천특허와는 달리 MPEG-2에 대한 시각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일본 내부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일본이 보수적인 색채를 띠면서 변화와 도전을 하지 못해서 몰락한 이야기는 20년이 지난 후에 늘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면 CPU를 비롯한 어지간한 기술은 지금의 일본 대기업이 다 만든 셈이니 말이다.

IPS LCD, CCD 이미지 센서, MP3, 낸드 플래쉬, 거기에 MPEG-2 기술까지 말이다.

최민혁은 지금이 일본의 기술을 헐값에 빼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시즈벨을 이용하면 별다른 악명이 생기지도 않을 터였다.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셈이다.

'가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는 마음을 달리 먹은 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코다 도시히로 이사를 통해서 보고받은 자료를 다시 살폈다.

MPEG-2 원천기술을 보유한 곳은 미쓰비시만이 아니었다.

“가만, 혹시 마츠시다나 도시바 측의 MPEG-2 원천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선뜻 확신하지는 못했다. 이들 두 회사는 미쓰비시와는 상황이 좀 달랐다.

다만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른 점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코다 도시히로 이사의 인맥이라면 마츠시다나 도시바 측에도 로비할 수 있을 텐데요? 필요하다면 무기명 채권 천만 달러, 아니, 그 이상 금액을 내놓겠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쪽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과연 원천특허를 넘길지 모르겠습니다.”

미쓰비시는 그럴 수 있다고 하자.

아니, 마츠시다나 도시바 역시 미쓰비시와 비슷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과연 그들이 원천기술을 넘길 것이냐는 좀 다른 문제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이런저런 문제점을 떠올리면서 다소 당황했다. 사실 이 정도 특허 수량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천특허에 유달리 집착하는 최민혁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의외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자 밀어붙였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이번 일은 진지하게 생각합시다. 코다 도시히로 이사를 비롯한 실무진에게 이번 일에 성공하면 성과 보상금을 약속하세요. 필요하다면 한 사람당 집 한 채 값을 내놓을 테니까.”

“그게…….”

최민혁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당황하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시즈벨 측에는 점진적으로 제가 보유한 특허 관리를 다 맡길 생각입니다. 특히 특허료와 소송은 시즈벨에 일임할 생각입니다.”

이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시즈벨이 원래 노리는 것이 저것이었다.

이제까지 최민혁은 어느 정도 선을 그은 채 이권을 넘겼긴 것과는 좀 달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 대기업은 지금 스스로 장벽을 쌓아서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배의 승무원들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중에는 도피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참조하겠습니다.”

최민혁은 이미 탐욕에 물든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눈빛을 봤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MPEG-2 관련 특허였다.

‘어차피 36%까지 얻었잖아. 두 회사 특허만 모으면, 적어도 70%는 넘길 수 있어. 거기에 내가 가진 특허, 국내 ETRI, 오성 전자, LC 전자의 특허까지 다 챙기면 80%는 최소한 넘길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MPEG-2 특허 독점이 가능했다. 여기에 MP3 특허와 합쳐서 시너지만 모은다면 솔직히 KM 전자는 백 년 동안 사고만 안 친다면 그냥 놀고먹어도 적자를 볼 리가 없을 것이다.

멀티미디어 사업에 대한 영향력은 덤이고 말이다.

다만 그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보인 탐욕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생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당한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그가 시즈벨을 의심하는 이유는 모토롤라 계약 수수료로 시즈벨이 꽤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만약 시즈벨이 직접 모토롤라 계약을 주도했다면 그 이익은 몇 배 더 될 것이다.

‘혹시 모르잖아. 시즈벨에 대해서도 한 번 확인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처음과는 달리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 * *

마이크 리트는 최민혁 실장이 머무는 초호화 펜트하우스에 나와서 시즈벨 뉴욕 지사 사무실용 건물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 이야기를 충분히 듣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그림은 MP3 특허 풀과 같은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넥타이를 풀어서 사무실 한쪽에 던졌다. 그는 뉴욕 맨해튼의 도심을 내려다보면서 사무실 한쪽에 꿍쳐놓은 술을 꺼냈다.

30년 산 프랑스 포도주인데, 오늘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단숨에 두 잔을 다 마시자 그제야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

마이클 리트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반응이 이상해서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걱정하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사무실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으면서 마이클 리트를 쳐다보았다.

“회사 분위기를 알면서 그래?”

“아, 이사회에서 말 나오는 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토롤라 협상 전까지는 괜찮았어. 그런데 그 이후에는 달라.”

“역시 수익 때문일까요?”

“그렇잖아. 우리가 주도권을 잡았다면 이익 규모가 엄청났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 힘만으로 과연 그런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지. 그런데 원천특허를 확보해서 이권을 누리는 것은 우리 장기잖아. 모토롤라 계약은 그러지 못했어.”

“하면 MPEG-2 원천특허 확보에서는 더 집착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것 때문에 이사회에서 말들이 많은 것 같아.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날 배제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니까.”

“아.”

마이클 리트는 그제야 사내에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제이미 니콜라스 말을 듣고서야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는 더 계속되기 힘들었다.

패트릭 호프만 이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의 전형적인 덧니를 보이면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타박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일본 고객들 반응이 심상치 않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이미 이사회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터라 패트릭 호프만 이사의 태도에도 눈살만 살짝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코다 도시히로 이사! 이래도 모르는 이야기라고 개소리할 거야?!”

코다 도시히로와 관련된 이야기는 당연히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 이사만이 알고 있다. 일본에서 일이 진행된다는 것은 알아도 자세한 것까지는 패트릭 호프만 이사가 알 방법이 없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 이사가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입을 놀렸나 싶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가 한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을 패트릭 호프만 이사가 좋아할 리가 없다.

‘정확히는 시즈벨 이사회 역시 다르지 않아.’

시즈벨이라는 회사 성격상 미쓰비시의 원천특허를 최민혁 실장에게 넘기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브로커 역할은 시즈벨에서는 하지 않았던 방향이었다.

하지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그런 점까지 참작해서라도 최민혁 실장의 요구를 충실히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시즈벨은 실제로 코다 도시히로 이사를 비롯한 미쓰비시 전문 인력을 스카우트까지 한 셈이니 말이다.

시즈벨도 나름 큰 이익을 봤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저 돼지가 수긍할까?’

패트릭 호프만 이사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침묵하자 나름 자신이 칼자루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제이미 니콜라스가 꺼내놓은 포도주를 잔에 부어서 마시면서 이죽거렸다.

“제이미 이사, 일을 이따위로 하다가는 결국 자네는 시즈벨에서 쫓겨날 거야!”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패트릭 호프만 이사가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저렇게 말하는 데에는 뭔가 근거가 있을 터였다.

‘역시 이사회 문제인가.’

사실 그가 최민혁 실장 제안에 소극적으로 태도를 보인 이유다. 당장 시즈벨 내부에서 일이 생긴 이상 최민혁 제안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무슨 개소리야?”

“지금 하는 일. 자중하란 소리야. 사내 안팎으로 자네에 대한 말이 무성해. 난 도대체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의 똥꼬에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 돼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새삼 모토롤라의 협상에서 이익을 너무 많이 봤다는 것을 아쉬워했다.

‘한국 속담에 호사다마라는 게 있던데, 그 말이 정말 맞구나.’

“유럽 일이나 잘하지 그래?”

“흥, 내 일은 내가 잘 알아서 할 테니, 자네나 정신을 차려. 일본 고객의 항의 때문에 이사회 역시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독불장군식으로 움직이면, 자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사실 코다 도시히로 이사를 끌어들인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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