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
장승일 실장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이미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 일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였다. 대신 구길모 차장에게 주의를 좋고 말이다.
“이수연 대리는 괜찮겠어?”
“이 대리는 성격이 여리기는 하지만 맺고 끊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잖아. 권재홍 비서실장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은 어쩔 수가 없잖습니까?”
구길모 차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새삼 오성 전자로 이직한 임권수 팀장이나 손명수 차장을 떠올렸다. 두 사람 역시 사내 내부 갈등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니 말이다.
장승일 실장 역시 고민했다. 그는 이번 일이 사전에 최문경 부회장 귀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해 봤다.
그런데 선뜻 뭐라고 답하기 힘들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미친놈처럼 미쓰비시 본사로 쳐들어가서 엉뚱한 이야기를 폭로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과거라면 최 부회장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은 또 모르지.’
그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일단 최 본부장님에게 이야기해 둘 테니, 보안 문제는 신경 써. 천 과장이나 박 과장에게 미안하지만 두 친구는 좀 관리해.”
“…알겠습니다.”
구길모 차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꼭 이런 일로 신경을 써야 하나 싶었다.
* * *
최영란 본부장은 장승일 실장에게서 기획 조정실 내부 상황을 듣자 골치 아파서 최민혁 실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서 알렸다.
최민혁도 최영란 본부장의 충고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굳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굳이 최문경 부회장을 신경 써야 하냐 고민했다.
하지만 괜히 이번 일이 최문경 부회장의 귀에 들어가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전 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최문경 부회장은 일본에도 인맥이 있으니, 놔둬서 좋을 것은 없겠네요. 조 팀장님은 혹시 좋은 아이디어가 없나요?”
조성돈 팀장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슈는 이슈로 막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740 파크 애비뉴 부동산 매입 건을 이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최민혁이 오히려 혀를 내둘렀다.
“이야, 우리 조 팀장님이 그렇게 소란스러운 대안을 제시할 줄은 몰랐습니다. 740 파크 애비뉴 아파트는 성공과 부의 상징으로 아마 국내에서 이번 건물 매입건을 알면 말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부동산 매입 대금은 벨린 투자 이익금 아닙니까? 더욱이 이번에 740 펀드까지 만든 것으로 압니다. 이미 투자로 받은 대금만 2억 달러를 돌파한 것으로 보고받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죠. 혹시 740 펀드를 이용하자 이런 뜻입니까?”
조성돈 팀장은 이전의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우영민 부장 옆에 있으면서 얻은 정보 때문에 생각을 달리했다.
“어차피 파크 애비뉴를 매입한 것 자체가 투자 아닙니까. 더욱이 이 건물은 돈이 있다고 해서 매입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실장님이니,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최 실장님을 바라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질 겁니다. 그건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끄는 효과도 있지만, 최민혁 실장님의 실제적인 능력을 증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으음, 그렇죠.”
사실 이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최민혁 자신의 실적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성과를 그대로 공개해서 오히려 적을 줄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당장 모건 스탠리와 샐로먼 브러더스와 싸워서는 이기기 어려웠다.
그런데 굳이 그들과 싸울 이유는 없다.
그들의 물주 자금을 빼와도 자신의 전력은 커지지만 모건 스탠리와 샐로먼 브러더스 동선은 묶일 테니 말이다.
최민혁은 지금 자신의 처지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을 계약 압박하는 상황이다. 차라리 부동산 쪽으로 시선을 끌어두는 것도 한 방편이었다.
다만 조성돈 팀장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알겠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 같네요. 우영민 부장에게 연락해서 한번 말을 맞춰보세요. 본사 홍보 팀에게도 이야기해 두시고요. 아, 그쪽 기획 조정실 직원 통해서도 정보가 흘러가도록 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늦게 내심 탄식하고 말았다. 그가 하는 일은 KM 전자 기획실 팀장이지, 부동산 업자가 아니었다.
최민혁은 최민혁 나름 이번 계획에 꽤 만족했다.
‘일본에서 진행하는 일은 가능하면 시선이 안 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 이 정도라면 나쁘지는 않을 거야. 우리 최문경 부회장은 또 할아버지 다리만 붙잡고 늘어질 테니.’
그리고 최용욱 회장은 그런 일에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 * *
조성돈 팀장과 우영민 부장이 만나서 한 협의 내용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740 파크 애비뉴 건물 매입 이벤트를 좀 더 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억 달러 건물 매입을 3억 달러로 올려 부르는 것들 말이다.
실상 이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있을까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의외로 이곳에 사는 이들이 벨린 투자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2조 6천억 투자 이익 때문이 아니었다.
퀄컴, ARN, 에플 투자 수익 때문이었다.
특히 에플 가치를 끌어올려서 성공적으로 수익을 낸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벨린 투자는 수동적으로 투자한 것이 아니라 적극 경영에 개입해서 그 가치를 끌어올려서 이익을 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면서도 안정적인 투자라고 해야 할까. 헤지펀드의 리스크보다 낮으면서도 헤지펀드의 수익률 못지않은 결과를 내놓은 셈이다.
벨린 투자에 관한 관심은 많았고, 이쪽에 자금을 대려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들 중에 누구도 벨린 투자에 투자하지는 못했다.
벨린 투자는 최민혁의 자금으로만 운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벨린 투자가 외부에 투자 문을 열어서 투자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다.
다만 투자 조건이 740 파크 애비뉴 건물을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물론 망설이는 이들이 많았다.
[다른 조건은 곤란합니다. 싫으면 우리 제안을 거절하면 됩니다!]
우영민 부장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그는 이번 작업이 좀 무리수라고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의 지시라서 따르기는 하지만 너무 과한 부동산 매입이라고 판단했다.
부족한 돈은 주식 대출로 자금을 충당했기 때문이었다.
[후유,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둘씩 투자를 확정하기가 무섭게 투자 협상은 빠르게 늘어났다. 투자하려는 이들 중에는 740 파크 애비뉴에 고가 펜트하우스를 가지지 않은 이가 오히려 드물었다.
물론 단순히 투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이번 기회에 최민혁 실장과 인맥을 쌓으려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들 처지에서 최민혁 실장에게 선물로 펜트하우스 하나 넘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다.
특히 넉넉하게 2~3채씩 소유한 이들은 최민혁의 요구에 척을 질 이유는 없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펜트하우스를 사들이려는 겁니까?]
[최민혁 실장님의 새로운 취미입니다.]
[취미라…….]
황당한 대답이었지만 의문을 다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졸부가 뉴욕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도 그런 부류라고 보면 된다.
더욱이 요즘 미국 나스닥은 IT 주가 폭등으로 자금이 필요한 이들이 많았다.
그는 장승일 실장에게 이 정보를 넌지시 흘렸다.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 귀에 들어가도록 알아서 해주세요.]
* * *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 지시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지시도 받아 봤으니까.
다만 기획 조정실 내부 직원을 통해서 정보를 흘리라는 것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구길모 차장 역시 얼굴이 좋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솔직히 이 정보가 최문경 부회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획 조정실 회의를 열었다.
[미쳤다!]
당연히 감탄사만 나왔다.
최민혁 실장의 행적은 역시나 상상을 초월했다.
KM 그룹 기획 조정실은 대다수가 최민혁 실장이 중요한 일, 특히 에플과 관련된 협업 때문에 미국에 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2조 6천억이란 에플 주식을 팔아치웠으니 말이다.
덕분에 지금 에플 주가는 24달러를 돌파했다. 에플 공매도 물량은 쌓이는데, 에플 주가의 오름세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시국에 최민혁 실장이 2조 6천억이란 자금으로 뉴욕 초호환 펜트하우스를 사들였다니.
다행히 이건 아니라는 것은 곧 밝혀졌다.
펜트하우스 매입 자금은 벨린 투자 자금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곧바로 최문경 부회장에게 이 정보를 알렸다.
“하.”
최문경 부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이런 정보를 얻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회장님이 아시면…….”
최문경 부회장이 바로 손을 흔들었다.
“아냐. 아버지에게 알려서는 곤란해.”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냥 부동산도 아니고, 펜트하우스인데…….”
최문경 부회장은 샐로먼 브러더스 덕분에 미국에 자주 갔다. 때문에 그는 미국 부동산 시세도 잘 안다. 그 역시 펜트하우스 투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최영란 본부장에 대한 고민 따위는 싹 잊은 채 고민했다.
‘부동산이었구나. 어쩐지.’
최근 최민혁이 번 투자 수익은 무려 2조 6천억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벨린 투자를 통해서 계속 투자는 진행할 테니 말이다.
즉 2조 6천억 외에 따로 번 수익이 더 있다는 의미다.
그 여윳돈으로 740번지 펜트하우스를 사들였을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 사실을 밀고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의 행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지. 일단 지켜보지. 어차피 이 정도 정보라면 국내에서도 알게 될 거야. 만약 시간이 걸리면 그때 정보를 흘리자고.”
“네?”
최문경 부회장은 씩 웃었다.
“이 펜트하우스 매입은 투자 방법으로 나쁘지 않아. 하지만 일반 시민 생각은 다를 거야. 졸부가 돈지랄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경제지에서는 최민혁 실장을 옹호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쓸데없는 낭비 쪽으로 몰아갈 수도 있잖아. 그러니 지금 나설 수는 없어. 일단 지켜보자고. 대신 사전 준비를 잘해놔. 언론사 쪽과도 손발을 맞추고. 아니, 당장 편집장과 약속을 잡아!”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을 잘만 이용하면 최민혁 실장 이미지를 바닥 끝까지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야!’
* * *
구길모 차장은 기획 조정실을 통해서 흘린 정보가 최문경 부회장 귀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박재광 과장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승일 실장 역시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박 과장 탓만 할 수는 없어. 결국, 경영권 분쟁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최민혁 실장 라인에 서든지, 아니면 최문경 부회장 측에 붙던 결정을 해야 할 테니까.”
“그래도 배신감을 떨치기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 부회장실은 어때?”
“비서실은 일단 조용합니다. 아직 따로 지시를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 평소와는 많이 다르네. 난 최용욱 회장님을 찾아가서 따질 줄 알았는데…….”
구길모 차장이 쓰게 웃고 말았다.
“유치원생도 아닌데,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해봐야 안 먹힌다는 것을 이제 안 것인 줄 모르죠.”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알 수가 없지. 일단 조성돈 팀장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알겠습니다.”
두 사람 얼굴은 여전히 착잡했다. 이번 일 때문이 아니었다. 박재광 과장의 배신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정보가 외부로 샌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