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34화 (734/1,021)

#734.

최문경 부회장 역시 바보는 아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이 그냥 막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조카 최민혁을 인정했다.

‘그놈은 돌연변이야. 지금까지 한 것만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으니.’

하지만 최영란 본부장은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석연치 않다고 느꼈다.

“혹시 모르니, 자네가 한번 다시 확인해 봐. 필요하다면 뇌물을 쓰든, 아니면 협박을 해도 상관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니, 지금 상황이 어떤지 권 실장 자네도 알잖아. 자칫 영란이에게 밀리면, 난 설 자리가 없어져. 그러면 자네 위치도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야.”

“…네.”

이렇게까지 얘기했음에도 권재홍 비서실장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도 어지간해서는 그냥 태클을 걸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평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권 실장, 잘 생각을 해야 해. 지금 KM 그룹 사정이 어떤지 자네도 잘 알잖아. 우리 아버지의 시선도 바뀐 거 알지? 사장단 회의 할 때 날 보는 시선을 잘 확인해 봐. 이미 포기한 눈이야!”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네는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래, 자네의 그런 태도를 인정해.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지. 배가 침몰하는데 허둥지둥하는 것보다는 나아. 그런데 말이야. 그 배의 선장을 갈아치우는 경우는 좀 달라. 그렇게 되면 자네도 살아남기 어려워.”

“…….”

권재홍 비서실장도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얼굴에 보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쓰게 웃고 말았다.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아버지 태도가 바뀌어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딱 자네가 유일해. 그래서 난 자네를 믿어.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쫓겨나면 상황이 달라질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이 그제야 강하게 반박했다.

“최 회장님은 유교적인 성향이 있는 분입니다. 결국, 최민혁 실장에게 KM 그룹을 물려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영란이라면 어때?”

“그건 더 말이 안 됩니다. 최영란 본부장은 결혼하고 나면 남입니다. 최용욱 회장님이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평소에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는 권재홍 비서실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알았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도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뭐 솔직히 내가 잘한 것도 없잖아. 최근 KM 그룹을 위해서 한 실적도 그렇게 크지 않아. 동남아나 여기저기 기웃댄 것이 다야. 그런데 영란이는 다르잖아. AD 설계를 설립해서 비메모리 사업을 일구었어. 심지어 신사업을 출발시킬 준비를 하고 있어. 권 실장 생각은 어때? 나라도 영란이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어.”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닙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뜻밖에 격하게 반응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네 태도가 달라져서 그나마 안심이군.”

“…….”

허탈하게 웃는 최문경 부회장의 모습에 권재홍 비서실장도 이를 악물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충고가 마냥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 * *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문경 부회장의 경고를 듣자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목이 걸려 있다는 최문경 부회장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기획 조정실부터 시작해서 KM 그룹 내에 있는 우호 인력에 손을 내밀었다. 대표적인 이가 박재광 과장이었다.

물론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지하철을 타려고 할 때 차에 태웠다.

박재광 과장은 냉랭하게 굳어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보자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 역시 요즘 최문경 부회장 쪽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최문경 부회장의 최측근인 권재홍 비서실장이 자신을 따로 만날 때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영문을 잘 몰랐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자신의 안건을 꺼내기 전에 한 가지 서류를 보여 주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에 대한 자료였다.

박재광 과장의 아버지가 하는 사업은 불행히도 요즘 사양 산업 소리를 듣는 섬유 산업이었다.

이미 구미 쪽의 섬유 공장 쪽은 줄 폐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건비가 폭증하면서도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이들은 동남아 쪽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상황이다.

박재광 아버지는 이런 흐름을 타지 못했다. 그는 눈치만 보면서 버티기를 했다. 결국, 회사 적자가 쌓여만 가서 직원 급여도 벌써 5개월이나 주지 못했다.

지금도 주거래은행에서 압박이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집이 은행에 압류되어서 넘어갈지도 몰랐다.

박재광 과장은 이 사실을 권재홍 비서실장을 통해서 알았다. 그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서류를 계속 살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박 과장 자네를 협박할 생각이 없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어. 이건 그저 기획 조정실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야.”

“저, 정말입니까? 절 감시한 것은 아니고요?!!”

박재광 과장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박 과장 자네는 자신이 협박까지 당할 친구라고 생각해?”

“그러면 이게 다 뭡니까?!”

박재광 과장은 마치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침묵했다. 그는 박재광 과장이 화를 풀 때까지 기다렸다. 차는 시속 50㎞ 속도로 천천히 나아갔다.

박재광 과장은 20분 정도 날뛰다가 뒤늦게야 침묵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제야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무이자로 해서 공장 이전 자금을 빌려줄 수 있네. 태국이나 베트남 쪽으로 이전하면 그럭저럭 버틸 수는 있을 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박재광 부친 섬유 공장이 어렵기는 해도 공장 이전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꾸려갈 수는 있다. 다만 그것도 한 10년 정도이지만 말이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한 가지를 더 권했다.

“필요하다면, 영업망 몇 개 정도는 길을 놔줄 수도 있어. 그러면 자네 아버지 공장은 그럭저럭 견딜 수는 있을 거야.”

“…….”

박재광 과장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은 몰라도 권재홍 비서실장만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굳이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는 뻔했기 때문이다.

‘하긴 최민혁 실장님이 2조 6천억이라는 천문학적인 투자 이익을 봤지, 거기에 최영란 본부장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그러니 정보가 필요할 수밖에.

그 역시 최근 최영란 본부장과 장승일 실장의 만남이 잦다는 것을 알았다. 기획 조정실 구길모 차장이 계속 이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최민혁 실장님 정보를 원하는 겁니까? 아니면 최영란 본부장 행적을 말하는 겁니까?”

“둘 다면 좋지. 그런데 당장 최민혁 실장 정보는 급하지 않아. 이보다는 최영란 본부장이 더 문제지. 맞아, 신사업 말이야.”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일은 구길모 차장님이 직접 처리하세요.”

“자네는 명색이 기획 조정실 과장이잖아.”

“그건 맞죠. 그런데 절 별로 믿지 않는 눈치인 것 같더군요. 이수연 대리를 끼고도니까.”

박재광 과장은 순순히 기획 조정실 내부의 미묘한 사안을 털어놓았다. 천경구 과장이 찍힌 덕분에 그까지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박 과장, 자네가 원래 KM 전자 쪽 담당이었잖아. CMOS 이미지 센서 쪽은 자네가 하는 것이 맞지 않아?”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권 실장님이 자꾸 저에게 이런 식으로 계속 연락하는데, 구길모 차장이 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하겠습니까?”

“…….”

권재홍 비서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수연 대리의 성정을 잘 안다. 그래서 아예 이수연 대리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소리인가?”

“아뇨. 해봐야죠. 권 실장님이 제 집안 일을 도와준다는데,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다만 약속 조건으로 우선 5억 대출을 처리해 주세요.”

“좋네. 다만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거야!”

“…그러죠.”

* * *

박재광 과장은 자신이 썩은 동아줄을 잡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지금 다른 대안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조용히 이야기를 해봤는데, 권재홍 비서실장이 보여준 자료는 정확했다.

아니, 오히려 축소된 면이 있었다.

2금융권이나 사채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지금의 사태는 단순히 아버지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구미 섬유 산업은 완전히 지옥이었다.

그도 과거 X 리포트에 대한 것을 보았고, 자료도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아, 한국 경제가 수렁에 빠질 수도 있겠다고만 생각했다.

간접 경험 정도였다.

그런데 그 X 리포트의 폭탄이 먼저 파고든 곳이 바로 구미 섬유 쪽이었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잔혹하고, 끔찍했다.

박재광 과장은 덕분에 자기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보다 최영란 본부장이나 장승일 실장의 동선에 더 집중했다.

구길모 차장이 계속 확인을 하면서 그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이야기했다.

구길모 차장의 태도도 평소와는 달랐다.

“이봐, 박 과장, 자네 일은 제대로 하는 것 맞아? 지금 구조조정 때문에 계열사 분위기가 얼마나 산만한지 잘 알잖아? 자살하는 협력사 사장도 나와.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마무리는 해야 하잖아. 그런 일이 계속 생기게 둘 거야?!”

“아, 아닙니다.”

“물론 이미 사전 지원도 해줘서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10년 넘게 같이 일해온 곳도 있잖아. 챙겨줄 것은 챙겨줘야지!”

구길모 차장이 말하는 것은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업체에 일정 기간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건 자금을 그냥 준다는 것이 아니라 대출해 준다는 뜻이다.

은행 이자보다 낮게 말이다.

구길모 차장은 단순하게 지시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생각을 해봐. 잘나가는 협력사도 있을 것 아냐. 그쪽을 잘 파고들면, 신사업을 찾아낼 수도 있어. 좀 적극적으로 움직여!”

“네? 네, 자, 잘 알겠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구길모 차장은 꽤 분노한 얼굴이었다.

박재광 과장은 흉포한 구길모 차장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젠장,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 * *

구길모 차장이 날뛰는 것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그 역시 장승일 실장에게 보안에 대해 세뇌에 가깝도록 강조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기획 조정실 내부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중에 박재광 과장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을 금방 알아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굳이 박재광 과장을 따로 불러 경고하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말로 해서 박재광 과장이 사실을 말할 것 같지 않아서다.

하지만 최근 권재홍 비서실장의 행동과 관련해서 사내에 말이 무성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기획 조정실 직원뿐만 아니라 다른 부서 임직원을 따로 만난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감사인가 의심했다.

곧이어서 나온 것은 최문경 부회장이 배후에 있다는 소리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보는 이유는 없었다.

다들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근 벼랑 끝으로 몰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니 기존에 최문경 부회장 라인에 섰던 이들조차 갈팡질팡했다.

구길모 차장은 이런 분위기와 박재광 과장의 평소와 다른 행동에 대해서 장승일 실장에게 보고했다.

“정말 박재광 과장이 권재홍 비서실장 편에 붙은 거야? 이상하군. 그 친구가 그렇게 모험을 걸 친구는 아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차라리 천경구 과장이라면, 얼마든지 뒤통수 칠 인물이지만 박재광 과장은 성격상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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