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
실제로 그랬다.
오성 전자는 이미 라이센스를 받으면서 KMB-01 배터리를 생산했다. 지금은 양산 막바지 단계였다. 초도 물량으로 고온, 저온을 비롯한 다양한 에이징 테스트를 진행 중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전영수 실장이 KMB-01 양산을 위한 모든 것을 꾸려놓았다. 그리고 그 설비를 미래 기술에 몽땅 상납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권태성 실장도 이걸 잘 알았지만, 만약 최민혁 실장이 술수를 벌이면 이 생산 자체를 접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가 이렇게까지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사업부의 전영수 실장 입장은 달랐다. 사람이기에 말이다. 그는 도저히 미래 기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최민혁은 머뭇거리는 전영수 실장의 목소리에 더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다. 그는 이미 허종진 팀장을 통해서 들은 회의실 내부 인물 중에 한 인물을 지적했다.
[허 팀장님, 그쪽에 혹시 오성 전자 기획실 실무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임권수 부장이라고…….]
임권수 부장은 난감한 상황에서 슬쩍 공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는 뒤꿈치까지 든 채 공장 문 쪽으로 슬금슬금 가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짓은 채 힐끗, 전영수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임권수 부장입니다.]
[아, 소리가 좀 시끄러워서 대화가 불편합니다. 회의실에 가서 연락 좀 주세요.]
* * *
회의실 안은 조용했다.
최민혁이 갑자기 전화를 걸 때만 해도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회의실로 옮긴 후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그들도 지금 상황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들 중에 몇몇은 이번 일에 안재운 전무도 관련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초조한 얼굴이었다.
물론 아직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전영수 실장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웃기는 것은 이 사업부의 임직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총만 있었다면 그 총으로 당장이라도 사살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인지 미래 기술 임직원들은 다들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최민혁 목소리가 다시 스피커폰을 울렸다.
[임권수 부장이라면, 아, KM 그룹 본사 기획실에 있었던 분이군요.]
[아, 네.]
임권수 부장은 깜짝 놀랐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자기 이름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다. 더욱이 전화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전생에서 최문경 부회장과 한창 대립할 때 중간에 끼어서 파리처럼 자신을 귀찮게 한 당사자를 잊지 않았다.
다만, 그런 사소할 일을 지금 꺼낼 수는 없었다.
‘가만, 오성 전자로 이직했던가? 내가 한 일 때문에 미래가 바뀐 건가?’
의아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넘어갔다.
[뭐, 권태성 실장님이 이미 승인한 내용이라는 것은 잘 알 겁니다. 미래 기술에서 진행하는 일은 오성 전자 일과도 많은 관련이 있어요. 그쪽에서는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우리 지시를 좀 따라 주세요.]
중간에 끼어든 이는 전영수 실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윤상수 수석부장이었다.
[윤상수 수석부장입니다. 단순히 그렇게만 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쪽 배터리 자동화 생산 설비는 미래 기술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미래 기술의 임직원 간섭이 오히려 문제를 만듭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당장 자신이 확인한 몇 가지 사실은 미래 기술 임직원이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인정하지 않았다.
[알아요. 좀 불편할 겁니다.]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배터리 사업부 임직원들은 정작 자신들의 노하우를 다 말해줘야 했다. 그런데 미래 기술 임직원들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방적인 지시만 내렸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결국 서로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이에 최민혁은 설득보다는 오히려 협박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셔야 할 일은 그 일이 권태성 실장 윗선에서 이미 승인을 받아서 진행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결국에는 오성 전자에게 이익이 될 일입니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그걸 안재운 전무님이 안다면 그 자리를 지키기 힘들지 않을까요?]
전영수 실장이 ‘안재운 전무’ 이야기가 나오자 허탈하게 웃었다.
[물론 미래 기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배터리 생산 설비 쪽은 오롯이 우리 오성 전자에서 증설한 겁니다.]
[그래요. 그 점은 인정해야죠. 하지만 우리 기술이 없다면 어차피 그 설비는 돌리지도 못해요. 그건 잘 아시죠?]
[…무슨 말씀입니까?]
[그쪽 생산 팀의 능력은 인정합니다. 제가 전화로 통화하지만, 사진으로 그쪽에서 보낸 설비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설비가 나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설비를 지금 운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미래 기술입니다.]
전영수 실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한 실적을 송두리째 꿀꺽하려는 최민혁의 말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배터리 사업부를 괴롭히는지 말이다.
최민혁이 피식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미래 기술과 오성 전자는 서로 협업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그러니 좀 불확실한 지시에도 잘 따라주기 바랍니다.]
전영수 실장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님은 지금 우리 오성 전자를 상대로 갑질하는 겁니까?]
사실 최민혁은 갑질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다만 실무진 선에서 생각해 보면 이 지시는 꽤 불합리한 것이었다.
[글쎄요. 전 그런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권태성 실장과 통해서 합의한 것이니까. 불만이 있으면, 제가 권 실장과 다시 협의하겠습니다. 안재운 전무님도 포함해서 말이죠.]
전영수 실장은 화가 나서 이성을 다소 잃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권태성 실장과 다시 합의하겠다는 말을 일러바친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해서 그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상대의 심정을 알자 굳이 좋게 말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저와 오성 전자가 신뢰를 쌓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 정도 일까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서로 같이 갈 이유가 없습니다. 정 불편하면, 여기서 계약을 끝장낼까요? 아마 안건민 회장님이 이번 일을 알면 분노할 겁니다!]
계약을 끝내자니.
더욱이 안건민 회장 이름이 왜 나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전영수 실장도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최 실장님 말뜻을 잘 알겠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제가 분명하게 말하죠. 이번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굳이 오성 전자와 같이 진행할 일을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 책임은 오로지 전영수 실장님에게 있습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대금이 요즘 2~3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도 당신 책임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2~3조 인수 매각 협상이 자신이 책임이라니.
사업부 실장 나부랭이가 도저히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뒤늦게야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하는 협박에 탄식하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은 다른 회사 직원이라서 쉽게 생각했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게다가 스피커폰을 통해서 한 이야기를 근처에 있던 임직원이 다 들었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의 말을 듣고서야 최민혁 실장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실제로는 무시무시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소한 자신들을 내쫓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임권수 부장에게 분명히 이를 주지시켰다.
[오성 전자 내에서 존재하는 알력은 저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 KM 전자와 미래 기술과 같이하는 일은 내부 갈등을 좀 자제해 주세요. 솔직히 서로 감정이 있다면 같이 갈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이대로 찢어지는 것이 서로 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임권수 부장님!]
[아, 네, 마, 맞습니다.]
[좋습니다. 임권수 부장님이 약속하셨으니,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다만 그 결과는 이전처럼 대충 넘기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리고 허종진 팀장님.]
[네, 넵!]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혹시라도 일정이 늦어져서는 곤란합니다. 이제 오성 전자 생산 설비를 이용하는 상황이니, KMB-01 샘플을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해 주세요. 거기 기자 불렀죠?]
[기자는…….]
다행히 공장 입구에서 기자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막 받았다.
[네, 도착했습니다.]
[좋네요. 그들에게 우리 미래 기술 KMB-01 배터리 양산이 시작되었다고 브리핑하세요. 지금 당장 이 배터리가 사용 가능하다는 점을 피력하고요.]
[…알겠습니다.]
스피커폰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자, 분위기 좋습니다. 화끈하게 일을 끝마쳐 주세요. 미래 기술과 오성 전자가 각자에게 윈윈인 전략이니 말입니다.]
물론 두 회사 다 이익이기는 했다.
하지만 생산 자체는 오성 전자에서 진행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양산 기술이나 양산 검증 역시 마찬가지다.
허종진 팀장은 넋이 나간 오성 전자 배터리 사업부 임직원들 표정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최 실장님이 정말 대단하구나.’
그의 처지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오성 전자 배터리 사업부 임직원들의 처지에서는 또 다른 것 같았다.
그들은 여전히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었지만 차마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했다.
전영수 실장이 버럭 소리쳤다.
“뭐 합니까? 가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네!”
다들 눈치껏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전영수 실장은 이번 일이 결국 미래 기술에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미래 기술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도대체 어쩌다가 오성 전자가 이 모양이 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 * *
오성 전자 배터리 사업부의 생산 능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KMB-01 양산, 정확히는 KMB-01B 생산에 성공했다.
KMB-01B는 기존 초도 모델인 KMB-01A와 비교하면 한층 안정성이 올라간 제품이었다.
이 소식은 한국 언론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차세대 배터리 KMB-02B 양산에 성공하다!]
물론 오성 전자 배터리 사업부가 성공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미래 기술이 한 것처럼 외부에 알려졌다.
공급 역시 모토롤라 측에 하는 것이고 말이다.
모토롤라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미래 기술과 계약을 했는데, 정작 오성 전자에게서 물건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그 물건이 미래 기술 물건이라고 하니,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초기 시제품으로 받은 모델보다 안정성에 있어서 더 만족했다.
오성 전자 생산 팀의 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파급 효과는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KMB-01B 모델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도 최민혁 실장이 바트화 협상을 먼저 하지 않으면 협상이 없다고 한 이야기를 모건 스탠리 이사회에 계속해서 어필했다.
그는 차라리 바트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모건 스탠리 이사회는 스탠리 로버트의 제안을 아예 무시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미래 기술이 모토롤라 측에 KMB-1B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토롤라가 왜 굳이 미래 기술 지분 15%를 사들여야 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했다.
폴 고슬링은 KMB-01B 양산 소식을 듣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다행이라면 에플 주가가 요동치지는 않았다.
에플 주식을 매집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심장마비가 올 정보였던 것이다.
“다행이네.”
하지만 케네스 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올해 판매되는 핸드폰 대수와 향후 5년간 판매되는 핸드폰 판매 수량을 검토할 때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냥 그러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일본 핸드폰 업체도 KM 전자와 협상을 시작했다는 소리가 파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