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미래 기술, 차세대 배터리 말이군요.”
최민혁은 그제야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 시작은 차세대 배터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아이템에 기대한 것과 달랐던 것은 실제로 이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사람들이 잘 몰랐다는 거다.
‘구골이나 KMBOOK을 그래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네. 사람들은 로열티 수익이라는 것을 알아들어도 실제로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까진 잘 모릅니다.”
실제로 계약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언론도 관심을 뒀다.
한국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실상 실제 협상은 진척이 잘 되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협상은 이루어져도 덩치가 큰 협상 말이다.
단적인 예가 모토롤라다.
이들은 인수합병 전문가를 투입해서 질척거린 채 협상을 질질 끌었다.
심지어 계약서 사인을 코앞에 두고 계약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다만 모토롤라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최민혁 실장이 무리수를 둔 것도 한몫 거들었다.
그는 애초에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 CES 전시회 일정이 있구나.’
하지만 최민혁은 어차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CES 일정을 뒤로 미루어도 된다고 봤다. 그러니 계약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만약 이들과의 거래 결과를 보여 준다면 좀 다를 겁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좋네요. 이제 계약을 마무리할 시점이 되기는 했죠. 설사 약간의 손실을 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일은 누구에게 맡길 겁니까?”
“박상기 차장이라면 잘할 겁니다.”
박상기 차장이라. 조성돈 팀장 밑에 있으면서 티 내지 않고 기획 팀을 챙겨 온 집사다. 이제까지 큰 실수를 하지 않은 이였다.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리수를 둬서 싸움닭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그 배후에서 묵묵히 일을 진행한 사람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의 실수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으음, 좋아요. 한번 진행을 해보세요. 아, 타깃은 모토롤라가 좋겠군요. 이왕이면 기존 계약 일부를 재조정해서 통합 협상을 다시 진행하더라도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보세요. 오 사장님에게는 제가 따로 전화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박상기 차장은 미국에 가 있는 조성돈 팀장의 연락을 받고는 처음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영돈 사장에게 직접 불려 가서 다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수긍하고 말았다.
MP3, 무선랜, K 투스, 미래 기술 배터리 관련 계약은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남아 있는 계약은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협상 한 번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적게는 수백억, 많게는 수천억의 차이가 생긴다.
단적인 예로 지금 협상 중인 모토롤라 계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기업을 상대로 압박하기가 쉽지 않다.
‘하긴 따지고 보면, 오성 전자에 미래 기술 지분 5%를 넘긴 것도 이런 협상에 대한 사전 정지 작업이니까. 지금 시점에서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한편으로 큰 도움이 될 수는 있지. 당장 우리 회사가 벌어들이는 로열티 전체 규모를 추측이라도 할 테니.’
아직 KM 전자가 벌어들이는 전체 로열티 수익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었다.
이건 다 기업 내의 영업 정보이니 말이다.
정확히는 이것저것 걸려 있는 것이 많아서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아끼다가 똥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무리수를 두더라도 우리 KM 전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한편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모토롤라라면 국내 기업만이 아니라 해외 기업도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배종대 과장도 이번 일만큼은 순순히 수긍했다.
“솔직히 계속 협상을 질질 끌어서 외부에서 말이 많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일도 아마 그것 때문에 진척이 잘 안 될 겁니다.”
“…….”
늘 의견 대립을 보이던 두 사람이 같은 소리를 내자 기획 팀은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았다.
정성근 대리는 여전히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배종대 과장은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 순한 이정원 과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좀 뭔가 콱 하고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제까지 하는 것을 보면, 이익도 중요하지만, 실적 역시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너무 느려서 제대로 된 이익을 보지 못했으니까.
지금까지 쌓인 불만은 계속해서 나왔다.
박상기 차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어. 잘 알면서 그래?”
배종대 과장이 일축했다.
“아뇨.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죠. 박 차장님이나 팀장님은 너무 답답해서 짜증이 납니다.”
박상기 차장은 마치 자신의 막내아들 같은 팀원의 태도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이번 일만큼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도 너무 일정을 질질 끌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효과는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모토롤라 측도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정도는 되니까.
글로벌 휴대전화기 업체라고 고자세를 유지하던 그들의 태도가 싹 바뀐 것이 그 증거였다.
박상기 차장은 모토롤라 협상자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이번 일은 이미 최민혁 실장님이 지시한 거야. 우선 모토롤라 측에 확인한 후에 언론 쪽에 연락해.”
“알겠습니다!”
신이 난 기획 팀은 그제야 모토롤라 측 관계자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 * *
사실 작년에는 핸드폰 시장이 주춤했다. 과도한 핸드폰 경쟁 때문에 핸드폰 시장이 위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투자다.
모토롤라는 미래 핸드폰 시장 선점을 위해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는 당연히 근거리통신망 투자를 빼놓기 어려웠다.
핸드폰 자체가 통신 단말기이니, 근거리 무선 통신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이 한 투자는 블루투스 쪽이었다.
문제는 이 원천기술이 진행되기도 전에 K투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술 로열티와 관련해서 KM 전자와 협상할 때 이미 에플에서 이 K투스를 차세대 제품에 적용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토롤라 측은 크게 당황했다.
“이거 진짜일까요?”
“그 새끼들이 계약을 끝장낸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심지어 그러면서 로열티 대금을 계속 올렸어요.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을 무조건 비방할 수만은 없습니다. 핸드폰 시장의 가파른 성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식이면 계약 자체를 하지 말아야죠! 아니, 그리고 지금 당신은 최민혁 실장 편을 드는 겁니까? 모토롤라 임직원 맞습니까?!”
모토롤라 내부의 반응도 이전과는 달랐다.
초창기에는 최민혁 실장을 압박해서 이익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마이동풍적인 태도에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KM 전자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에플 내부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스티븐은 물론 그러한 정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흘렸고 말이다.
덕분에 에플 내부 정보가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단순한 소문 정도에서 그칠 것 같지 않았으니까.
자칫하면 K투스가 적용된 제품이 에플에서 먼저 나올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토롤라는 팀 규모를 대폭 늘렸다.
에플의 차세대 제품과는 달리 핸드폰에는 근거리통신망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드폰 수량을 감안하면 애초에 이 계약 자체는 쉽게 체결되기 어려웠다.
그들이 다급하게 회사 내부 연구 팀과 외부 용역 연구 팀을 갈아댔던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노력해도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K투스 자체가 문제였다. 이 기술은 근거리통신망 뼈대 자체를 막아버렸으니까.
모토롤라는 이제 이대로 협상을 질질 끌 수만은 없었다. 그들도 K투스가 적용된 제품 이슈가 이렇게 빨리 터질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들 나름으로 다른 근거리통신망을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부랴부랴 KM 전자 측과의 협상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이 협상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이나 박상기 차장이 배 째라는 식으로 협상을 질질 끌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말 계약할 생각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박상기 차장은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를 보였다.
“윗선의 지시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정말 그렇게 말한 것 맞습니까? 직접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은 지금 다른 일로 바쁩니다.”
정확히는 바트화 문제로 모건 스탠리와 대립 중이었다.
“정말입니까?”
“아, 그 뻔히 아는 사실을 가지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쪽은 미국 내의 정보를 잘 알면서 그러세요?”
KM 전자가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온 단적인 예가 바로 로열티를 제멋대로 불렀다는 것이다.
대당 30달러씩 내놓으라고 하는데,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결국 무선랜 특허까지 넣어서 같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특허료 자체는 여전히 줄지 않았다.
이런 협상 중에 튀어나온 것이 바로 미래 기술 차세대 배터리, KMB-01이었다.
더욱이 오성 전자가 갑자기 미래 기술 지분 5%를 500억에 사들였다.
때문에 협상이 더욱 복잡해졌다.
협상 막바지에 이르렀다가도 다시 계약이 파토 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제는 KM 전자가 정말 계약할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과연 K투스 제품이 있는 건지도 불신했다.
“에플 차세대 제품에 정말 K투스가 적용된 것이 맞아?”
“확실히 K투스가 들어간 것은 맞다고 합니다.”
“정말이야?!”
이때도 최민혁은 여전히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는 굳이 계약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를 끝까지 고수한 것이었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모토롤라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것은 모토롤라였다.
핸드폰 시장을 석권한 모토롤라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들은 미래 기술 배터리 KMB-01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모토롤라는 태도를 바꾸어서 최민혁 실장이 원한 대로 로열티 금액 자체를 올렸다.
물론 그랬음에도 최민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협상은 질질 늘어졌다.
이 과정에서 계약 세부 내용 자체가 백과사전식으로 점점 늘어났다.
“당신들, 계약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이 협상을 주도한 박상기 차장 대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이미 오성 전자와는 미래 기술 지분 5%를 넘겼습니다.”
“그게 K투스는 아니지 않습니까?!”
“K투스, 무선랜, 미래 기술을 합쳐서 계약을 하자고 한 것은 모토롤라 측의 요구였습니다!”
“그거야 당신네가 시간을 질질 끌어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저희는 시간을 끈 적이 없습니다.”
“와!”
모토롤라 입장에서는 박상기 차장의 태도는 벽과 같았다.
조성돈 팀장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그들은 숨이 막혀서 미칠 것 같았다.
오죽하면 옆에서 협상을 지켜보던 KM 전자 기획 팀이 복장을 터뜨렸다.
하지만 미국에 가 있는 최민혁은 굳이 박상기 차장의 협상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이 협상이 결렬되어도 좋다는 태도를 고수한 것이었다.
“좋습니다. 생산량과 판매량에 따른 계약도 추가해서 다시 재조정해 보죠.”
심지어 모델별로 따로 계약 협상이 진행되었다.
업그레이드 모델과 신제품 모델이 좋은 경우다.
둘 다 시장 반응이 달라서 매출 규모를 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때에는 계약에 따라서 금액 차이가 너무 났다.
이 계약이 제대로 체결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KM 전자에서 드디어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식 계약으로 언론사 기자를 불러 모았다.
* * *
최민혁은 저택 주변 산책로를 뛰다가 잠깐 멈추어 섰다.
미인 사용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서 주스를 내밀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주스를 단숨에 마셨다.
숨을 헐떡이면서 나타난 조성돈 팀장은 무릎에 손을 댔다.
“조 팀장님도 운동 부족입니다.”
“하아, 하아, 하아, 하, 하지만 벌써 20바퀴나 뛰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