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
“그게 문제일 겁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최문경 부회장은 이걸 빌미로 에플 공매도 세력에 한 판 끼려는 것 같습니다.”
“에플 공매도 세력이라면, 정확히 어딜 말하는 겁니까?”
“최문경 부회장하고 안면이 있는 샐로먼 브러더스를 비롯한 몇몇 큰 투자 은행 쪽입니다.”
“…그건 놀랍군요. 하지만 아직 확인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꼭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네요. 하면 제가 할 일은 지난 일을 잊고 최민혁 실장을 부추기는 역할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IBM 계약 건 때문인지 안재운 전무는 확실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최민혁 실장 이름을 말할 때마다 분노하기는 했지만 잘 참았다.
권태성 실장은 안재운 전무가 좀 불안하기는 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최민혁 실장도 이번 일만큼은 성공하기 힘들겠어.’
다만 그는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늘 당해온 만큼 불안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 * *
제임스 감독은 CF 촬영 장소를 할리우드 제작사의 도움을 얻어서 한 SF 영화 촬영지로 선택했다. 미래 SF 영화 세트장인 만큼 CF 촬영지로는 좀 과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이 세트장을 관리하는 관리자는 어이가 없어서 툴툴거렸다.
그로서는 이곳을 CF 촬영지로 내준 제작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임스 감독은 기본 설비와 촬영 장비가 워낙에 좋은 만큼 CF 촬영 자체에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촬영에 필요한 모든 제반 설비가 한 차례 검증된 곳을 사용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도 늘 자신을 도와주는 스태프의 푸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감독님을 다시 봤습니다. CF 촬영은 돈을 아무리 줘도 안 한다고 하신 분이 말입니다.”
심지어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제 확고한 명성을 가진 만큼 제임스 감독이 제작사에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정 서로 안 맞으면 계약을 끝내면 되니 말이다.
제임스 감독은 어차피 찍을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이번 차기작은 좀 달랐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이번 차기작을 찍고 싶었다.
때문에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 CF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문제가 생겨났다.
[왼쪽으로 돌아가.]
[삐,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왼쪽으로 돌아가라니까!]
[삐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야,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아가!]
[오른쪽으로 돌겠습니다.]
아이컴과 연동된 자동 의자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애니는 기본적으로 무선 드론을 기반으로 했다. 따라서 모터 시스템과는 연동이 쉽게 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동 원격 의자에 시스템을 이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명령어를 아이컴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 CF 광고 주인공은 사지마비가 된 미국 해병대 장병이다. 그는 자동 의자에 앉아서 말만으로 의자를 이동시키고, 심지어 커튼도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의자 이동조차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으니.
흔히 말하는 인공지능은 고사하고, 제대로 소통조차 되지 않았다.
제임스 감독은 크게 당황했다.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명성을 듣고 아이컴을 믿었다.
아니, 그도 솔직히 아이컴에 기대했다. 실제로 자신이 본 아이컴은 진짜 SF 영화에나 나올 만한 미래식 디자인이었다.
따라서 인공지능만 제대로 된다면 자신도 이 아이컴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역시 무리였나.’
그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 CF 촬영 스태프 역시 다들 혀를 차면서 혼자 미친 듯이 움직이는 자동 의자를 지켜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해병대 역할 배우는 크게 당황해서 비명을 내질렀다.
촬영을 위한 특수 모터가 적용된 자동 의자는 생각보다는 빨랐던 것이었다.
결국 자동 의자는 혼자 미친 듯이 설치다가 한쪽 벽면을 향해서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서 그대로 처박아 버렸다.
으악 하는 비명이 촬영장을 울렸다.
촬영 스태프가 제임스 감독을 비웃었다.
“감독님, 저걸 알고 이번 CF 콜 한 겁니까?”
“…몰랐어.”
“허.”
촬영 스태프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곧바로 모여서 협의에 들어갔다. 이대로 이 촬영을 접을 수는 없었다. 걸려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결국 나온 의견은 하나였다.
“…헐리우드식으로 찍자고?”
“중요한 것은 CF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 결과만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기다려 봐.”
그는 곧바로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쩔 수 없죠. 일단 CF 촬영을 끝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촬영장을 억지로 빌렸는데, 일정 안에 끝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 * *
안재운 전무는 다시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의 꼼수를 잘 알기 때문에 지난 일을 멋지게 넘겼다.
“그럴 수 있죠. 바쁘면 약속을 지키기 힘듭니다. 더욱이 보안 문제가 관련이 있으니, 제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
최민혁 실장은 안재운 전무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계속했다.
그는 대신 두 사람에게 이번 아이컴 CF 현장을 소개해 주었다.
“이거 기대가 됩니다.”
안재운 전무는 과연 아이컴 CF 현장이 어떤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건 옆에서 동행하는 권태성 실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도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하기만 한 터라 이번 일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고민을 거듭했다.
다만 이들이 CF 현장에 도착해서 본 것은 그들이 아는 CF 촬영과는 좀 달랐다.
피아노 선을 덕지덕지 단 자동 의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 주변에는 촬영 카메라가 생각보다는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지마비 해병대원이 뭔가 말을 하는데, 음성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작도 다 따로 했다.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SF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놀라운 특수효과를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발한 방식이 꽤 많이 들어갔다.
마치 미래 SF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과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 모습을 본 촬영 스태프는 다들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CF 촬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게 아이컴 광고 CF 촬영인지가 의심스러웠다.
아이컴 기능을 영화 특수효과로 다 대체하니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당연히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제임스 감독에게 달려가서 이런저런 협의를 했다.
심지어 촬영 스태프를 불러 모아서 큰소리도 쳤다.
안재운 전무는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의 능력이 그렇게 무서운 것 맞습니까?”
“좀 기다려 보시죠.”
마침 최민혁 실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여기 영화 촬영장인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가 찍는 것은 제품 CF 광고란 말입니다. 아니, 동작을 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까? 일부만 기능이 안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는 부분은 따로 찍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요컨대 최민혁은 인공지능 일부가 오류가 나니, 나머지 오류가 나지 않는 부분은 따로 찍어서 서로 합치자는 거다.
하지만 제임스 감독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같은 부분이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걸 따로 편집하면 위화감이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차라리 전부 다 특수효과를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그거 사기 아닙니까?!]
[…휴우.]
제임스 감독도 짜증 나서 분노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차기작 자금 줄인 최민혁 실장을 핍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자금만 대는 투자자라면 박살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경우가 좀 달랐다.
그는 구골이나 KMBOOK과 미래 IT 기술에도 전문가였다.
앞으로 영화 영역과 어떤 식으로 엮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를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제임스 감독이 자존심이 강하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동양인인데도 굳이 그의 제안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긴 제작사도 입장이 비슷하겠지. 그들도 마냥 돈 때문은 아닐 테니까.’
최민혁 실장은 정말 크게 당황해서 이리저리 전화를 걸었다.
그는 때마침 뻘쭘하게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와서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안재운 전무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뭐, 하다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일정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법은 없으니까요. 특히 제품 개발은 꼭 이런저런 문제가 생깁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필요한 장비는 얼마든지 우리 쪽에서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는 생각에 잠긴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제가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곧 몸을 돌린 채 다시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안재운 전무는 그제야 권태성 실장의 손을 잡고는 촬영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하늘이 쩌렁쩌렁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진짜 통쾌합니다. 하, 저런 일도 있다니. 확실히 인공지능 기술 상업화는 현실적으로 어렵죠. 저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저렇게 저자세인 것을 처음 봤다. 그래서 잘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직도 이상합니까?”
“아, 아닙니다.”
“아니, 말 좀 해보세요.”
권태성 기획실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고를 받았다. 심지어 오늘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뭔가 찜찜하다는 것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안재운 전무는 그런 권태성 기획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확인을 했으니, 이번 일을 최대한 이용해 보죠. 제가 DL 그룹 쪽에도 알리겠습니다. 그쪽도 자금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던데, 이번 기회에 한몫 단단히 잡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묵묵히 안재운 전무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감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군.’
* * *
이유를 모르는 것은 제임스 감독과 촬영 스태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촬영장을 나간 지 30분 정도가 지나자 최민혁 실장이 촬영을 중지시켰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제임스 감독은 심지어 분노조차 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 표정도 달라졌다. 크게 당황해서 날뛰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초조함도 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촬영 스태프를 한쪽으로 다 불러 모으자마자 30명 정도 되는 인력이 우르르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각자 지시받은 대로 할당된 영역을 향해서 우르르 몰려갔다.
그중에는 아이컴 앞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한 이도 있었다.
그들을 지휘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지수 박사와 헬렌 연구 팀이었다.
사지마비 해병대원은 크게 당황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업데이트를 끝낸 연구원이 다시 해병대원의 목소리를 입력시켰다.
반복 입력을 통해서 그의 음성 특성을 다시 로딩시킨 것이었다.
제임스 감독은 다른 촬영 스태프와 같이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옆에 다가온 최민혁 실장에게 말했다.
“저, 저들은 누구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애니 개발자입니다.”
“애니 개발자라면, 인공지능 말입니까?”
“네.”
“아니, 그러면 지금 저 컴퓨터에서 설치된 것은 뭐였다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동일한 시스템이기는 한데, 노이즈 필터를 비롯한 몇 가지 기능이 빠진 시스템입니다.”
“아니 그러면 제대로 동작을 안 한 것이…….”
“네. 필요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제임스 감독을 와락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그가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한 일이 전부 다 삽질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제임스 감독이 폭발하기 전에 슬쩍 끼어들었다.
“필요 때문에 한 일입니다.”
“하, 절 우롱한 일이 필요했다는 말입니까?”
“원래 감독님에게 사전에 알릴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연기를 잘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괜히 일이 꼬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
그는 그제야 진지한 표정을 한 최민혁 얼굴과 조금 전의 최민혁 얼굴을 비교했다. 확실히 최민혁 연기는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조금 전에 방문한 동양인을 떠올렸다.
결국 최민혁 실장이 한 연기는 그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니, 왜?”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일단 촬영 끝내면 제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