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임스 감독님, 반갑습니다. 저는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라고 합니다. 아, 그냥 에플 대주주라고 하면 더 잘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감독입니다만.”
제임스 감독도 어이가 없어서 뒤로 물러나 있는 제작사 경영진을 힐끗 째려봤다. 그런데 그들은 제임스 감독 시선을 피한 지 오래였다.
제작사는 제작비도 제작비이지만 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전부 다 망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시기에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자금 일부를 댄다고 하니,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런 협상을 제임스 감독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다행히 최민혁 실장이 제임스 감독의 거부감을 단숨에 해소시켜 주었다.
“이번 영화에 꽤 자본이 많이 든다고 들었습니다. 1차로 500억을 투자할 생각입니다.”
“네? 500억이라면…….”
50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달러로 환산하면 대략 7,000만 달러. 영화 제작 예산이 대략 2억 달러였으니. 30%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감독은 자신이 원하면 투자를 받을 곳이 많았다. 때문에 그는 영화를 전혀 모르는 동양인 기업가의 투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무시한 채 제작사 경영진 앞으로 갔다.
“자금이 없으면 제가 보수를 받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자금을 끌어오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무례한 제임스 감독 행동에도 개의치 않았다.
“영화 지분은 30% 정도면 됩니다. 원하면 투자금을 1억 달러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1억 5천만 달러까지 투자할 수도 있어요. 더 필요하면 더 내겠습니다.”
“…네?”
제임스 감독은 황당해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왜 익숙한지 깨달았다.
에플 투자자.
바로 에플 주가를 폭등시킨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최민혁 실장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가 지금까지 한 행적도 다 알려졌다. 퀄컴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심지어 MP3의 아버지라고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아무리 제임스가 기업에는 관심이 없어도 최민혁 실장의 이름 정도는 알았다.
“맙소사, 당신이 MP3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그 최민혁 실장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굳이 겸손하지 않았다.
“뭐, MP3 특허 권리는 제가 다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는 제임스 감독 얼굴이 바뀐 것을 보자 씩 웃으면서 제임스 감독의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MP3에 대해서 안다면 설명하기 쉽겠군요. 아, 구골 설립도 제가 자금을 다 댔습니다. 단순히 돈을 노리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영화 투자 수익이 아닙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2억 달러라도 낼 용의가 있습니다.”
그는 그제야 뒤에 숨어 있는 제작사 경영진을 힐끗 째려봤다.
감독에게 사전에 통보도 없이 일을 만든 그들에게 분노가 치밀었지만, 상대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무조건 화만 낼 수는 없었다.
이번 영화 차기작을 둘러싸고 제작사 내부에서도 말이 많이 나왔다.
세트와 관련해서 비용을 줄일 다양한 수단을 취하는 것도 그 하나다.
제임스 감독은 그런 제작사의 요구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제임스 감독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자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임스 감독도 무조건 자존심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초대형 여객선 실물을 만드는 데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만약 자본만 넉넉하다면 편법을 쓸 이유가 없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우현만 만들 필요는 없잖아. 촬영 후에 필름을 뒤집을 필요도 없고, 연기도 굳이 좌우를 바꿀 이유가 없어.’
좌우가 바뀐 필름을 가지고 편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2억 달러인데, 현실적으로 이 금액을 넘어설 것이 분명했다.
제임스 감독은 고생길이 훤한 영화 촬영의 미래를 떠올리자 도저히 최민혁 실장 제안을 무조건 거절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 조건이 뭡니까?”
“간단합니다. 이번 에플의 차기작 광고 제작을 맡아주면 됩니다. 물론 이 광고는 다른 광고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광고라…….”
제임스 감독은 광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에플의 차기작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이 말하는 것은 보통 흔한 광고가 아니었다.
‘영화 수준의 퀄리티를 원하는 건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특별히 영화를 찍는 것도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차기작을 가지고 제작사와 조율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런데 영화 촬영에 앞서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제작비 문제다.
일단 자금이 넉넉하다면 편법을 사용해서 일정을 늘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물론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일단 제작사와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그리고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무슨 일을 원하는지도 파악해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도 호기심을 느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인공지능 기술이다.
그도 이전에 SF 영화를 찍으면서 인공지능 기술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 지금 기술로는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가만, 이번 에플 차세대 제품은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말입니까?”
“네. 뭐, 이번 광고는 딱 그게 이슈입니다. 굳이 제임스 감독님에게 제안서를 낸 것도 그런 쪽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시라 그런 겁니다.”
“…좋습니다.”
그는 최민혁의 제안을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그제야 입가에 음모자의 미소를 띤 채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물론 내막을 전부 다 말한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 감독은 일단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가만, 권태성 실장이 제법 머리를 쓰는데, 혹시 내 의도를 엉뚱하게 해석할 수도 있어. 그것도 사전에 손을 쓸 필요가 있겠어.’
* * *
강준석 팀장은 최근 미국에 장기 체류 중인 최민혁 실장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지금 KM 전자 계열사 관리로 정신이 없었는데, 또 엉뚱한 지시를 받았다.
“…광고 말입니까?”
“에플의 차기작 광고입니다.”
“그 광고를 제임스 감독이 찍는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면 제가 할 일은 제임스 감독 제작사와 만나서 투자 관련 계약 조율을 하면 되는 겁니까?”
말을 하고서도 강준석 팀장은 황당해서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솔직히 영화 쪽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영화 사업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일은 그저 제임스 감독의 명성을 이용해서 이슈를 만드는 게 목적이니까요.”
“제가 잘은 몰라서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
“의미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를 본 사람들의 생각이니까요. 제임스 감독이 CF를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신뢰도가 팍팍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일테면 오성 그룹 말이죠.”
“오성 그룹이라면…….”
강준석 팀장은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몰라서 눈치만 봤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런 뒤 만약 그룹 측에서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제임스 감독이 CF를 찍는다면 다른 눈으로 보긴 할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 게 좀 심하니까.’
“결국 외부의 시선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럼요. 더욱이 중요한 것이 더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내놓은 보고서.
강준석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보고서에 적힌 아이컴 관련 내용을 살폈다. 그런데 그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좀 이상했다.
“…가만, 이 보고서대로라면 아직 인공지능 기술이 완성되지 않은 겁니까?”
“인식률이 좀 떨어지죠. 뭐, 흔한 문제이고, 일정 안에는 인식률을 최대한 끌어올릴 겁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이 인공지능 기술 완성도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아뇨. 그 상당한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물론 일정 안에는 될 겁니다. 다만 이번 CF 촬영에서는 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딱 그렇게만 외부에서 알아야 합니다.”
“…외부에서 이렇게 알아야 한다. 으음, 지시를 이해했습니다.”
최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강준석 팀장이 꽤 명석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특히 지시에도 잘 따르고 말이다.
“이왕이면 이 정보를 오성 그룹을 비롯한 우리 반대 측에서 알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요? 네, 미남계 맞습니다. 저번에 당했으니, 제대로 보복을 해야죠.”
“…네.”
강준석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계속 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지시한 대로 따를 뿐이었다.
‘다만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할 줄은 몰랐네. 다른 것을 떠나서 제임스 감독 차기작 제작사와도 협상을 해야 하잖아?’
영화 제작사와의 협상은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차기작과 관련해서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다 분석해야 하니 말이다.
‘후유,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생기네.’
* * *
서아은은 지난번에 강준석 대리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는 윗선에서 구박을 많이 받았다. 은근한 갈굼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안 그래도 그녀를 싫어하는 이들이 계속 이 사건을 명분 삼아서 괴롭혔다.
그녀는 결국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강준석 팀장에게 연락했다.
한편으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방법이 없었다.
일단 인정을 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녀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강준석 팀장이 결국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장했다. 강준석 팀장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으로 말이다.
다시 만난 강준석 팀장은 확실히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 예, 예쁘네.”
“어, 그래? 고마워.”
서아은은 청초한 풋내기 소녀 연기를 멋지게 했다. 실제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레스토랑을 오가는 남자들의 시선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강준석 팀장이 화장실을 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의자에 놓아둔 서류 가방을 슬쩍 열어서 확인했다.
그 안에는 아이컴 광고와 관련된 기획안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심지어 아이컴의 문제점도 말이다.
그녀는 이때를 위해서 준비해 둔 카메라로 서류를 찍었다.
다 찍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부분만 말이다.
다행히 강준석 팀장은 큰 것을 누는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식은땀마저 흘린 채 결국 관련 서류를 다 촬영했다.
때마침 강준석 팀장이 나타났다. 그는 잠깐 서류 가방을 살피나 싶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가볍게 포도주를 곁들인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서아은은 지난 일을 다시 사과했고, 강준석 팀장과는 잘 헤어졌다.
‘성공이다.’
* * *
서아은이 구해 온 아이컴 광고 서류는 곧바로 권태성 실장의 손에 들어갔다.
권태성 실장은 아이컴 광고 안에서 아이컴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역시 아직 인공지능 기술은 완성되지 않았구나. 하긴 소프트웨어이니, 시간을 두고 진행해도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광고는 좀 문제가 되는구나.’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저 이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만 했다.
그런데 이제 명확한 증거를 얻은 셈이다.
이제 눈으로 확인만 하면 된다.
안재운 전무는 쾌재를 불렀다.
“역시 최 실장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군요.”
“아무래도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에플의 상황이 벼랑 끝으로 몰려 있으니, 아이컴에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이건 과장 광고로 몰기에는 어려운 구석이 있군요.”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도 버그가 생겼을 뿐이라고 변명할 겁니다.”
“빠져나갈 구석은 많군요. 하지만 소비자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특히 분노한 미국 소비자라면 고소를 하고도 남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