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90화 (690/1,021)

#690.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크게 당한 적이 많았다. 그는 때문에 이번 일도 최민혁 실장이 의도한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꼼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선 자기 일을 먼저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감정이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 쪽의 연락을 안 받았다고 해도 계속 그러지는 못할 거야. 시기가 되면 연락을 받겠지. 그때는 이제까지 계획한 음모를 진행할 거야. 그걸 조심할 필요가 있어.’

* * *

권태성 기획실장은 곧바로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이번에는 최민혁 실장 본인만이 아니라 미국에 와 있는 이들 모두에게 일일이 전화했다.

최민혁 실장 본인은 전화를 안 받았지만 역시나 조성돈 팀장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오성 전자의 권태성 기획실장입니다!]

[…….]

딱 한마디에 조성돈 팀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서 권태성 기획실장의 전화를 그냥 끊지는 못했다.

아니, 옆에서 같이 일정 협의를 하던 최민혁이 굳이 전화를 끊지 말라고 손짓했다.

결국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잠깐 만나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아마 이미 우리 쪽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면 알 수 있겠지만, IBM 측과 5년 동안 100억 달러 반도체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계약 물량과 연관되는 패키지 부분 일부 공급 계약을 KM 산업 쪽으로 넘길 수도 있습니다.]

KM 산업은 KM 전자와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KM 그룹 경영 승계를 노리는 중이다.

따라서 오성 전자에게 일부 물량을 받아 오는 것은 큰 실적이 된다.

‘이 정도 물량이면 우리 부회장에게도 제법 타격이 될 거야.’

특히 최영란 본부장이 이 계약을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당장 KM 그룹 내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이건 최용욱 회장도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KM 그룹 내의 주도권을 잡는 사람이 최영란 본부장이라면 말이다.

한창 권 실장이 내건 거래 제안의 가치를 고민하던 최민혁은 옆에서 통화를 들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설마 권태성 기획실장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못해도 10억 달러 규모는 넘을 텐데, 좀 과하잖아.’

아니, 안재운 전무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안재운 전무는 IT 나발을 불던 사람이다.

비록 시기를 잘못 타서 쫄딱 말아먹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민혁 자신이 지금 준비하는 사업에 한 다리 걸친다면 꽤 이익을 볼 수 있다.

그건 오성 그룹 경영 승계자인 안재운 전무에게도 꽤 중요한 실적이었다.

최민혁은 좀 더 밀당을 할까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결국 그는 조성돈 팀장 대신 전화기를 받았다.

[최민혁 실장입니다.]

[아, 최 실장님, 드디어 통화할 수 있겠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지난 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저 최민혁 실장과 통화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저자세였다.

최민혁은 오히려 그 자세가 더 무서웠다. 그는 권태성 실장이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보안 문제 때문에 연락도 할 수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무슨 보안 문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최소한 사과 전화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나.

아예 잠적을 해 버리고 나서 이런 반응이라니.

[…괘, 괜찮습니다.]

사실 권태성 실장도 내심 크게 분노했지만, 문득 ‘인공지능 상업화 이슈’를 떠올리자 마냥 최민혁 실장에게 뭐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옆에서 심호흡을 거듭하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사무실을 뛰어나가는 안재운 전무의 뒷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건 만에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정말 인공지능 상업화 검토가 진행 중이라면 보안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SISA 가용 인력을 동원한 결과로는 인공지능 상업화는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했다.

‘도대체 KM 그룹은 왜 그런 정보를 흘린 것일까?’

결국은 지금 전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최민혁과의 통화를 통해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최민혁의 답변은 이전과는 달랐다.

[이런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 자신이 원하는 답이라서 일단 전화를 끊기는 끊었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의 의도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당했지만, 지금 당장은 뭐라 항의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자신이 한 대규모 계약 중의 일부를 떠먹여 주고도 말이다.

‘하, 기가 막히는군.’

다만 약속과 시간이 다음 주말이라는 것을 알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일정을 미룬 것일까? 후유, 아니다. 괜한 이야기를 해봐야 바쁘다고 약속을 아예 엎어버릴 수도 있어. 일단 만나자. 만나면 뭔가 알 수가 있을 거야.’

그도 솔직히 안재운 전무에게 참으라고 했지만 본인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담배가 당겼다.

‘젠장.’

* * *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의 반응이 뜻밖에 조용하자 고민에 빠졌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벤트가 약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이제까지 모건 스탠리를 상대로 잽만 날렸다.

모건 스탠리를 이용해서 샐로먼 브러더스도 건드렸고 말이다.

양손 잽을 날려서 일단 반응부터 본 셈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여기에 최문경 부회장도 붙었고, 결국 안재운 전무까지 달라붙었다.

‘아, DL 그룹이 남았나? 얘들은 꽤 조용하네. 역시 무리하게 일본 자금을 끌어온 휴우증 때문일까. 아니면 지역 경제가 줄초상 나서일까?’

지방 저축은행 도산 문제는 가끔 뉴스로 나오기는 하지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DL 그룹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쪽에도 제법 자금을 융통했기 때문이다. 저축은행이 망해 버리면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최문경 부회장, 안재운 전무의 행동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한껏 신중해졌고, 최대한 조심스러웠다.

‘의심이 생기면 투자를 접겠지. 그렇게 되면 천하의 모건 스탠리라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특히 권태성 기획실장은 최민혁 자신에게 수십 차례나 당했다. 그런 그가 모건 스탠리나 샐로먼 브러더스를 믿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다면 최문경 부회장 역시 아니다 싶으면 손실을 좀 보고서라도 꼬리 자르기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건 최민혁 자신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고작 그런 정도였다면 미국에 와서 구골, KMBOOK 설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부회장님 자산을 크게 흔들 필요가 있어. 그러려면 좀 더 깊이 끌어들여야 해. 도저히 손실 때문에 도망갈 수 없도록 말이야.’

최민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는 어차피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샐로먼 브러더스나 최문경 부회장에게 직접 미끼를 던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본다면 권태성 실장은 꽤 괜찮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결국 권태성 실장이 자신이 지금 진행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불가능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만 되면 에플 공매도에 뛰어들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KM 전자 공매도를 칠지도 모르지. 이게 되어야 최문경 부회장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샐로먼 브러더스는 더 말할 것도 없어. 모건 스탠리는 이때서야 손을 쓸 것 같고.’

반최민혁 실장 세력은 실상 직간접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스티븐에게 연락했다.

[혹시 광고 영상을 찍을 때 할리우드식 방식을 이용해서 과장할 수 있을까요? 아, 제 말은 실제로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그게 마치 할리우드 영화 기법인 것처럼 말이죠.]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 이왕이면 외부에서 인공지능 기술이 허위라고 생각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요.]

스티븐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모건 스탠리가 주식으로 장난치려고 하지 않습니까. 걔들을 엿 먹이려면 우리 인공지능 기술이 허위 과장 광고라고 인식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요.]

스티븐도 뒤늦게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자 혀를 내둘렀다.

[설마 모건 스탠리가 그걸 믿겠습니까?]

[믿게 하여야죠. 그게 연출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테면 지금까지는 인공지능 성능이 괜찮았는데, 광고 촬영 중에 그 성능에 문제가 좀 있었다는 식이 되어도 좋습니다.]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다. 개발 중에는 문제가 없다가 마지막에 가서 문제가 터진 경우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스티븐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광고는 문제가 될 텐데요?]

[물론 나가는 광고는 실제 인공지능을 이용한 장면으로 하면 됩니다. 요는 보여주는 것이 할리우드 기법을 이용한 것이면 되겠죠. 중요한 점은 애니 성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런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에플 주식을 가지고 장난쳐도 규모가 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

스티븐은 최민혁의 의도를 알고 나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사람을 불러와서 할리우드식으로 광고 촬영 장면을 제작한 후에 실제로 나가는 광고에는 실제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광고가 나간 후에 바로 특집 방송을 내보내면 됩니다. 실제 광고 촬영장에 나간 스태프와 주인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식으로요. 우리 애니 기술이 어느 수준에 왔는지 말입니다. 그때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서 애니의 잠재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번에 모건 스탠리가 독이 단단히 올랐습니다. 한 번 기를 죽일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앞으로 투자받기도 편합니다. 에플 이사회에서 스티븐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겁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하려면 이들이 이번에 큰 손실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모건 스탠리가 무리수를 두려면 그만큼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군요.]

스티븐도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스티븐이 자신의 의도를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연출자도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지인을 통해서 감독을 찾아보겠…….]

[아뇨. 그냥 흔한 감독이면 안 됩니다. 명성이 좀 있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제임스 감독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임스 감독 말입니까?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지 않을 겁니다.]

[평범한 제안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라면 좀 다를 겁니다. 더욱이 지금은 찍는 작품이 없어서 시간도 넉넉할 테니까요. 그쪽과 약속만 좀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티븐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자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 * *

제임스 감독은 차기작이 중박으로 무난한 성적을 거뒀지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더욱이 자신이 SF 액션영화만을 잘 만든다는 평가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래서 이번 차기작을 통해서 이런 평가를 일소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물이 배경인 영화가 죄다 다 망했다는 거다.

그것도 그냥 망한 것이 아니라 최악의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차기작인 대형 배 재난 영화는 제작사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제작사에서 태클을 건 것은 역시 천문학적인 제작 비용 부분이다.

그들은 자신이 제안한 플랜을 토대로 들어가는 비용을 산출한 결과 제작비만 무려 2억 달러가 가볍게 넘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시작부터 제작사가 자신의 말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었다.

만약 제임스 자신의 지난 이야기가 초대박을 치지 않았다면 이미 다른 감독으로 대체하고도 남았을 분위기였다.

그는 더욱이 이번 차기작에서 단순한 특수효과뿐만 아니라 실제 모형을 제작해서 몰입감을 높일 계획을 내세웠다.

이게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제작비가 얼마나 더 들어갈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만약 이 영화가 초대박을 친다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만약 실패라도 한다면 제작사는 막대한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덕분에 제작사와 영화 제작비와 관련된 안건을 가지고 계속 대립해야 했다.

[정 자금이 부족하면 제 보수를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제작사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바다가 들어간 영화가 폭삭 망해 버린 사례가 너무 많아서 선뜻 이번 영화를 촬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작사 핵심 경영진이 갑자기 몇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