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암묵적인 협박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제는 행동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냥 존 맥커니 사장에게 보고하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존 맥커니 사장 사무실 문 앞에까지 갔다가는 슬그머니 다시 물러났다.
존 맥커니 사장은 일단 최민혁을 먼저 공격한 후에 바트화 협상은 어렵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자신이면, 결국 보복의 화살은 자신에게 반드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맡은 사업 부분을 최민혁 실장이 뒤집어엎을 수도 있었다.
‘중국, 멕시코, 태국을 비롯한 이머징마켓 시장 전체가 될 수 있어. 결국 최민혁 실장의 타깃이 되지 않으려면, 타이밍이 문제인데.’
일단 보고는 해야 했다.
존 맥커니 사장이 계속 자신을 호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끙끙 앓는 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킬리언 시몬스 이사에게 연락했다. 샐로먼 브러더스 측이라면 혹시 최민혁 실장을 잘 알지 않을까 싶었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네?]
[최민혁 실장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화로는 말하기 곤란한 내용입니다.]
[…알겠습니다.]
킬리언 시몬스 이사도 스탠리 로버트 이사의 조용히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 * *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두 사람은 서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즈니스 문제로 간혹 파티 할 때 가끔 만나서 술자리를 같이한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는 단 두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둘은 서로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였다.
다만 사람들은 그걸 잘 몰랐다.
굳이 킬리언 시몬스 이사가 이 자리에 온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물론 시작은 역시 다른 이야기다.
“곡물 투자는 잘 되어갑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피식 웃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 말이 나와서 한발 물러선 상황입니다.”
이번 곡물 가격 파동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한국과 같은 나라 역시 이 파동의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제곡물협회도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투기 세력들에게 경고장을 던졌다.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지만 이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이미 미국 정부에 레드카드를 받은 상황이라서 일단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모건 스탠리 역시 어느 정도는 대응해야 했다.
이게 또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곡물 생산량 자체가 작년과 비교하면 4.5% 가까이 줄어들었는데, 소비량은 오히려 1%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급이 줄고, 수요가 늘었다.
곡물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거기에 모건 스탠리를 비롯한 투기 세력들이 곡물을 꽤 많이 매집했다.
이렇다 보니 곡물 가격 폭등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모건 스탠리는 이런 상황에서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샐로먼 브러더스가 마녀 사냥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넌지시 투기 세력에 대한 주의를 시키면서 샐로먼 브러더스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젠장.’
킬리언 시몬스 이사는 간단한 이야기에도 문제가 생긴 것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
“제가 들은 정보로는 모건 스탠리가 에플 주식을 대거 정리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건 아직 결정이 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허위 정보란 말입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사전에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는 이를 알려야 했다.
“그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사실 이제 막 검토 중인 단계입니다.”
이미 내부적으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외부에 이 정보를 흘리기 앞서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단순히 검토만은 아니겠군요.”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최근 최민혁 실장과 스티븐이 갑자기 만나서 뭔가 음모를 꾸미는 정황을 발견했다. 다만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그 내막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임직원 출퇴근까지 다 막아버렸으니.’
황당한 것은 스티븐이 이번 일과 관련된 임직원들의 출퇴근을 전부 강제로 막았다. 심지어 핸드폰까지 압수해서 외부 통화도 일절 못 하게 했다.
이러니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네. 그런데 이번 일에는 최민혁 실장과 스티븐이 끼어 있어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쪽에 정보를 주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말씀 좀 해주시죠.”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양해를 구한 후에 존 맥커니 사장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존 맥커니 사장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차 했다는 반응이었다. 모건 스탠리가 최소한 주식을 정리하기 전에 이해관계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정보를 넘겨야 했다.
그래야 그들도 손해를 줄일 수가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왕이면 같이 에플 주식을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그렇게만 된다면 에플 주가도 하락이 아니라 대폭락이 될 테고, 그게 곧 최민혁 실장에게 경고도 될 테니까. 그 정보를 이용하면 공매도로도 이익을 극대화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그는 킬리언 시몬스 이사에게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에플 주식을 정리하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 무조건 권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 와서 한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협상했던 부분을 조목조목 하나씩 말했다.
“이상하군요. 너무 자세한 정보를 줘서 크게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도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네, 이번에 한번 제대로 흔들 생각입니다.”
킬리언 시몬스 이사는 뜻밖의 정보에 미소를 지었다. 모건 스탠리가 자신들과 손을 잡는다면, 그건 꽤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에플 주식을 가지고 공매도를 친다면 그 이익은 상상을 초월할 거야.’
“호, 그래요?”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과 사이가 나쁘다고만 알아줬으면 합니다.”
“…네.”
킬리언 시몬스 이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과 사이가 좋은 기업은 그렇게 흔치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싸움닭처럼 한국 대기업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렸으니 말이다.
‘특히 MP3 특허를 이용해서 한 갑질이 대박이니까. 로열티 누적 수익이 벌써 2,500억을 넘었다는 소리도 들었고.’
그랬다.
MP3 로열티 누적 수익은 지금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워낙에 행패를 부린 탓에 다들 겁을 먹은 것이었다.
최민혁의 처지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로서는 최문경 부회장과 갈등하다 보니, 일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간 것뿐이니 말이다.
실상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중의 하나가 샐로먼 브러더스였다.
하지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그런 내막까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킬리언 시몬스 이사는 이번 기회에 최민혁 실장에 대한 하소연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저희 회사 입장이 이렇습니다. 최민혁 실장에게 보복하고 싶어도 쉽지 않았는데, 마침 기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번 일은 본사에서는 심각하게 검토할 겁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모건 스탠리 쪽과 행동을 같이하겠습니다.”
“다행입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샐로먼 브러더스가 최민혁 실장 보복 전선에 협조해 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 * *
최민혁도 장승일 실장의 우려를 마냥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샐로먼 브러더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듣자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이들에게 사람을 붙여놓았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 역시 그런 이들 중의 하나였다.
“예상대로군요.”
다만 이번 일을 지시한 김명준 과장은 다소 걱정스러웠다.
“괜찮겠습니까. 이번엔 샐로먼 브러더스까지 붙었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전장은 제가 준비했습니다. 적군이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제가 만든 전장 안으로만 들어온다면 다 매장시켜 버리는 건 쉬운 일이죠.”
“…인공지능 말씀이군요.”
“네. 뭐 그 기술도 기술이지만 중요한 것은 홍보이니까요. 그걸 어떤 식으로 어필하느냐에 따라서 대중의 반응은 달라질 겁니다.”
“하면 샐로먼 브러더스나 모건 스탠리가 어떤 행동을 보여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어차피 그들이 할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바로 에플 주식을 이용한 차익 실현. 아마 두 회사가 보유한 에플 지분이라면 못해도 10%는 넘을 겁니다.”
지금 에플 주가는 대략 8달러 내외로 과거와 비교하면 무려 8배가 올랐다.
즉 에플 시총 가치는 대략 8조 원이 넘는다는 의미였다.
그중에 10%라면 8천억 가까운 에플 주식이 한 번에 시장에 풀린다는 의미다. 심지어 최소로 잡은 게 이 물량이다.
그렇게 되면 에플 주가의 폭락은 당연했다.
“하면 지분 평가액에 따라서 KM 전자 주가도 폭락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딱 그 시기에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을 앞세워서 날 흔들 수 있죠. 비록 아무리 꼼수를 부려 만든 30~40% 지분이라 해도 무시하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게 사실 가장 무난한 공격 방법이니까요.”
최민혁은 마치 흑막 속의 보스인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공매도는 덤이죠.”
“…정말 괜찮겠습니까?”
김명준 과장도 꽤 걱정되는 눈치였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말이다. 그는 최민혁이 대체 왜 이렇게 싸움닭처럼 사방을 뒤흔드는지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제 적이 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모건 스탠리에게 말입니다.”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당연하죠. 전 모건 스탠리를 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해요. 그래야 전쟁이 끝난 후에 손을 내밀 수가 있어요. 그땐 그들이 제 손을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네.”
김명준 과장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음모를 꾸미는 소설 속의 최종 보스 같은 최민혁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황당해서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긴 모건 스탠리 같은 인간들을 믿을 수는 없겠지. 결국, 길들이기란 말인가? 하지만 상대도 상대잖아.’
최민혁은 물론 김명준 과장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모건 스탠리와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의 움직임에만 집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모건 스탠리로 돌아와서 존 맥커니 사장에게 킬리언 시몬스 이사와 만나서 한 이야기를 보고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최민혁의 진정한 의도를 슬쩍 끼워 넣었다.
존 맥커니 사장도 이 부분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 실장이 한 행동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바트화 문제가 핵심이었군.”
“네. 최민혁 실장은 심지어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지분을 헐값에 팔 생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다르게 말해서 바트화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답은…….”
“이미 모건 스탠리 이사회에서 결론을 내렸어. 바트화 협상은 없네.”
“결국 최민혁 실장과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겠지.”
“하면 바트화 사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대응책을 세워야겠지.”
“…대안이 있습니까? 최민혁 실장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 규모가 만만치 않은데…….”
“뭐, 우리 힘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가 있어. 아니, 설령 힘들다 해도 아군은 많으니, 자네가 만난 샐로먼 브러더스부터 시작해서 꽤 있잖아.”
“아.”
샐로먼 브러더스는 작은 회사가 아니다. 메릴린치, 골드만 삭스, 리만 브러더스, 모건 스탠리에 이은 미국 5대 증권사 중의 하나다.
다루는 자금 규모도 어지간한 한 나라의 예산을 넘어선다.
최민혁 실장 때문에 본의 아니게 찬밥 대우를 받았지만 그렇게 대우받아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
그런 샐로먼 브러더스와 모건 스탠리가 손을 잡고 벌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