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
그는 때문에 세 사람의 진지한 시선을 보자 내심 갈등했다. 아니, 화가 났다. 자칫하면 이지수 박사의 능력을 말해야 하는데, 그건 곧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처음에는 분노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당장 가주세요!”
“보안 문제 때문에 설사 제가 아는 사실이 있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이크 라이언 이사 때문에 두 사람에게 억지를 부릴 수만은 없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테일러 박사의 행동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느꼈다.
그 역시 에플 지분 매각을 이미 결정했지만, 또 다른 변수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거기에 최민혁 실장의 행동도 석연치 않았다.
‘그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뭔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박사님, 이번 일은 감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최민혁 실장과 스티븐이 이번 일에 껴들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의 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설마 내가 그 두 사람보다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모건 스탠리 이사회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칫하면 그 책임을 마이크 라이언 이사 자신이 지게 될 수도 있었다.
테일러 박사는 잠깐 격하게 반응했지만,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설득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확히 뭘 원하는 겁니까?”
존 맥커니 사장이 그제야 불쑥 질문했다.
“그 인공지능 기술 말입니다. 정말 상업화가 가능한 겁니까?”
테일러 박사는 그놈의 ‘인공지능’ 기술이 지긋지긋해서 분노했다. 이미 그 일은 다 끝난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조용히 시간만 흐르면 되는 거였다. 얼마 남지도 않았었다. 이지수 박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벼랑 끝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이지수 박사의 손을 잡아주면서 상황이 아주 달라졌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분노부터 치밀어 올랐다.
겨우 참았는데, 다들 이렇게 자신 앞에 나타나서 그놈의 인공지능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이를 악문 채 참았다. 심호흡까지 한 후에 따가운 눈으로 마이크 라이언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 이론적으로 가능할 겁니다.”
존 맥커니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정말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 이론적으로! 정말 말을 그렇게 못 알아듣습니까?! 넘어야 할 기술적인 장벽이 꽤 있어요. 특히 음성 인식만 해도 하드웨어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걸 다 극복해야만 그제야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이후 기술은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존 맥커니 사장은 말의 앞 단락과 중간 단락을 무시한 채 말끝 부분만을 인식했다.
“가, 가만. 그러면 하드웨어 성능만 받쳐준다면 정말 인공지능 상업화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하.”
테일러 박사는 미칠 것만 같았다.
실상 존 맥커니 사장의 태도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고, 테일러 박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인공지능 시대의 개화는 심층 신뢰 신경망(DBN) 알고리즘이 나온 이후였다.
즉 그 전까지는 단순한 연구 분야 정도였다.
연구 기관에서 연구하는 수준, 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의 ANM은 DBN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여기에 최민혁 실장이 음성 인식을 상업화가 가능한 기술 수준까지 끌어올렸으니.
이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다.
다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인공지능 기술 상업화는 엄밀히 말해서 불가능했다.
테일러 박사도 이런 미묘한 점까지는 잘 몰랐다.
인공지능 전문가인 그조차 그 정도였으니.
제3자는 그 내막을 이해하기조차 힘들었다.
다만 여기에 걸려 있는 판돈이 만만치 않았다.
비전문가는 결국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업적으로 어렵다는 말이군요.”
“하, 정말 왜 이렇게까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테일러 박사 역시 이런 인공지능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역시 이지수 박사가 몇몇 부분에서 앞서 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깊숙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특히 이지수 박사가 스탠퍼드 대학에 합류한 이후에 이룬 성과는 전혀 몰랐다.
토니 투센 교수가 테일러 박사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은 점도 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이지수의 인공지능 관련 기술은 묻혀 버린다.
그리고 테일러 박사는 이지수 박사가 초기에 고안한 인공지능 관련 원천기술의 일부만을 얻게 된다.
딱 이게 다였다.
그 이후 이지수 박사 팀이 고안한 기술이 결국 다른 연구 팀으로 흘러간다.
이게 씨앗이 되어서 인공지능이란 나무가 자라게 된다.
결국 DBN이란 기술은 이지수 박사가 만들어놓은 씨앗 위에서 그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인공지능 기술이 당장 어떻게 될지 알 수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우리말을 이해 못 하시네. 상업적으로 극히 어려울 겁니다. 뭐, 그 인공지능 수준이 어디까지냐에 따라서 다르겠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최민혁이 굳이 2 마이크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상업화가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사전에 걸러 최소화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시도해 볼 만하기 때문이다.
뭐, 이것 외에도 넘어야 할 기술적인 장벽이 제법 있었다.
물론 이지수 박사의 ANM 기술이 없다면 이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만 테일러 박사도 ANM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원천기술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티븐이 이런 점을 검토하여 대안을 찾는 중이었다.
“자, 잠깐만요. 마, 만약 스티븐이나 최민혁 실장 같은 인물이 도와준다면 어떻게 됩니까?”
“스티븐이라면 에플의 스티븐을 말하는 겁니까? 글쎄요. 스티븐이 정말 한 쪽을 분담한다면…….”
테일러 박사도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제까지 이지수 박사만을 생각했다. 이지수 박사는 생각보다는 인맥이 넓지 않았다. 의사소통을 융통성 있게 잘하는 편도 아니고 말이다.
그는 그 덕분에 이지수 박사를 입맛대로 요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최민혁 실장 그 새끼 때문에.’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나오자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서 얻었던, 최민혁 실장이 이지수 박사, 심지어 헬렌도 껴서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한 사진을 떠올렸다.
이들 모습은 뜨거운 연인 같았다.
좀 애매한 관계이기는 한데.
일테면 이지수 박사의 시선은 최민혁 실장을 향해 있고, 헬렌의 시선은 이지수 박사를 향해 있었다. 최민혁은 두 사람의 시선에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사진에 적나라하게 나왔다.
테일러 박사는 그 미묘한 사진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지수 박사에게 공을 들였지만, 헬렌 역시 몇 년에 걸쳐서 나름 꽤 많은, 무려 수백만 달러나 되는 막대한 돈을 퍼부었다.
테일러 박사는 자기 여자를 강탈당했다는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
이지수 박사를 떠올리자 도저히 최민혁 실장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질투심에 사로잡혀 버렸다.
“…제가 해줄 수 있는 답변은 지금 현재 공학 기술 기준입니다. 솔직히 이지수 박사, 스티븐, 최민혁 실장 할아버지가 손을 잡는다고 해도 다른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그렇게 만만한 기술이 아닙니다. 지금 기술 수준으로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10년, 아니, 적어도 5년은 더 지나야 인공지능 기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그제야 안도했다. 그는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에플 지분 매각 건도 큰 리스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존 맥커니 사장이 하도 심각한 표정이라서 분위기에 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 일은 에플 지분을 정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 딱히 존 맥커니 사장의 우려를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공지능이라니.
“박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국방부 과제 정도여야 어느 정도 가능할 뿐입니다. 수천만 달러를 퍼부으면 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개인용 PC 수준에서는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인공지능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최민혁 실장이 인공지능 기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점을 악용한 겁니다. 인공지능 기술이 뭔지 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
존 맥커니 사장은 잠깐 테일러 박사의 눈치를 봤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테일러 박사의 의견이 현실적으로 맞기 때문이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굳이 자기 의견을 내세울 생각이 없었다.
‘설마 이러고도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겠지.’
* * *
결국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이제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편한 얼굴로 다시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
그런데 최민혁 역시 자신이 지난번에 협박이 좀 과했다고 생각해서인지 당근 하나를 내밀었다.
“저는 바트화 문제에 진지합니다. 만약 제 제안을 들어준다면, 미래 기술 지분 20%를 2,000억에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 지분이라면 모건 스탠리 쪽에서는 다양하게 이용할 수도 있겠죠. 귀사에서 투자한 TDMA 통신업체의 핸드폰 배터리 쪽에도 적용할 수 있으니까. 다만, 아시죠?”
당근이라고 내놓은 게 미래 기술 지분 20%를 2,000억에 팔겠다는 거라니.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혀를 찼지만 차마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협박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차세대 배터리 문제도 심각했다.
구골, KMBOOK, 에플, 바트화 이슈에 묻혀서 순위가 밀렸을 뿐이다.
거기에 구골이나 KMBOOK 제안 역시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새삼 최민혁 실장이 가진 카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최민혁 실장 역시 계속 반복되는 스탠리 이사의 말을 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도 이번에는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같은 말만 하시는군요. 그놈의 확인은 언제 끝나는지 정말 짜증이 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알려주세요. 다시 말하지만 전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괜히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서 미움받고 싶지 않습니다.”
“…네.”
스탠리 이사는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한번 떠보았다.
“좋습니다. 혹시 구골 지분을 우리 측에 매각할 생각은 있습니까?”
“아, 구골 지분 말입니까?”
“이미 말씀하셨지만, 혹시 그쪽에 저희도 투자할 수 있습니까?”
최민혁은 처음과는 달리 삐친 얼굴로 툴툴거렸다.
“글쎄요. 고객 요청에 입을 다무는 회사를 믿을 수가 있어야죠. 바트화 문제를 해결해야 그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탠리 이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국 바트화 문제만 해결되면 구골 투자를 허락하시는 겁니까?”
“태국 바트화 협상만 잘 해결된다면,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아, KMBOOK에 대한 정보도 얻었겠죠? 그쪽 지분 일부를 넘길 생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 모건 스탠리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서로 친구가 되려면 믿을 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태국 바트화 문제가 중요하죠. 아, 다른 제안은 태국 바트화 협상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할 겁니다.”
“…네.”
그는 태국 바트화 협상 문제는 ‘NO'라고 해야 했지만 차마 그 이야기까지 하지는 못했다.
지금 이야기하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단순히 태국 바트화 문제에 그저 관심만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은 바트화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최민혁의 내심을 잘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최민혁의 입장에서 바트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후환이 될 수 있는 샐로먼 브러더스 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