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
솔직히 너무 단기에 바짝 쪼아서 나온 결과물이다.
완성도가 높을 리가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애니 AI 기술은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개인용 PC에 적용된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물에 많은 완성도를 요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최민혁 역시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고려해서 해당 엔지니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도 이지수 박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지.’
일단 이 기술과 관련된 특허는 꽤 의미가 있다.
당장 보스와 협상할 때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최민혁 입장에서 이 원천기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보스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들이 기존 영역에서 사업 영역을 넓히려면 반드시 이 원천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지금 당면한 문제 해결이 더 급하니까.’
거기에 PC용으로 포팅하는 일은 더 쉬웠다.
이지수 박사가 간단간단한 작업을 할 때는 모듈별로 잘라서 따로 테스트했는데, 그게 다 PC용으로 이미 작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티븐은 이지수 박사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놀랐습니다!”
“확실히 대단하죠. 도대체 언제 이런 프로그램을 코딩해 둔 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지수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토니 투센 교수님 도움이 컸습니다.”
정작 토니 투센 교수는 이지수 박사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는 테일러 박사 지시를 받아서 이지수 박사가 스스로 자기 연구를 포기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는 자신이 뜻한 바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모든 힘을 다 발휘해서 노력했다.
그런 과정 중에 이런 프로그램 알고리즘이 나온 것뿐이다.
실상 그녀가 목표한 결과물 중에 생겨난 빵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사실 이 연구는 원래 목표한 바와는 좀 달라요. 그냥 틈틈이 시간을 내서 한 결과물 중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물론 스티븐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겸손하십니다.”
“…….”
최민혁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지수 박사가 얼마나 놀라운 성과들을 냈는지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이 내용은 그의 기억에도 없는 것이었다.
인생 1회 차와는 전혀 다른 전개였다.
솔직히 그는 이지수 박사 한 사람의 역량이 이렇게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좋습니다. 두 분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스티븐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플 본사에서 일하는 관련 연구원들을 몽땅 이곳 캘리포니아 KMBOOK 연구소로 호출해서 쥐어짰다.
단순하게 봐서는 불과 3~4일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개발에 들어간 시간은 3~4년은 족히 됐을 법한 완성도였다.
이지수 박사 연구 팀이 그렇게 집중해서 전력을 쏟았으니까.
덕분에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KMBOOK 본사에서 말이다.
[애니, 기분이 어때?]
[좀 답답합니다.]
푸념을 하는 애니는 아이컴 안이 너무 불편하기만 했다.
아이컴 화면에는 귀엽게 생긴 애니가 나타나서 이런저런 푸념을 털어놓았다.
애니 아이콘은 딱 이지수 박사와 비슷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머리와 하반신을 강조해 캐릭터화 시켜놨을 뿐이다.
그게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말을 찰떡같이 잘도 알아들었다.
최민혁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했다.
그중엔 알아듣지 못하는 말도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반복하자 상황이 좀 달라졌다.
애니는 서너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나면 이후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이지수 박사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인공신경망 기술을 응용했습니다.”
인공신경망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온 용어였다. 80년대에는 연구가 활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연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나 컴퓨터 성능이다.
지금 시점으로 본다면 5년 정도 지나야 어느 정도 현실에서 써먹을 정도로 컴퓨터 성능이 발전한다.
이런 기술 추세에 변화가 생긴 시점은 그로부터 다시 5년이 더 흐른 후, DBN(Deep Belief Network) 알고리즘이 나온 이후다.
인공신경망 핵심 알고리즘인 셈이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연구해 온 ANM(Audio Neural Model)이 이 DBN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인공신경망 알고리즘과 관련된 전문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애니 결과가 왜 저렇게 나온 것인지 나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려 했다.
하지만 설명을 듣던 스티븐은 곧 손을 들었다.
옆에서 같이 듣던 다른 엔지니어 역시 불과 30분을 넘기지 못하고는 항복했다.
수학과 논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 ANM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
스티븐은 입을 딱 벌린 채 이 테스트 상황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이지수 박사에 관한 이야기는 관련 엔지니어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이 AI 연구를 하려면 꼭 필요한 최고의 인재라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직접 그 성과를 보고서야 자신이 이지수 박사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늘 이 시스템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노래를 부른 엔지니어를 힐끗 째려봤다.
그러자 다들 스티븐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들은 정말 현재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달랐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는 최민혁의 능력이 아니었다.
이지수 박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의 도움을 얻어서 다시 고안한 노이즈캔슬링 알고리즘을 시기적절하게 적용했다.
그 과정에서 오차는 있지만 이상적인 테스트 환경을 만들 수 있었던 셈이다.
그녀는 역시 공학자답게 비관적인 부분을 먼저 걸고넘어졌다.
“다만 여전히 몇 가지 문제는 있어요. 딱 아이컴에 최적화된 경우라서 안정성을 보장 못 합니다. 특히 이 아이컴 시스템 형태가 아닌 일반 PC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을 겁니다.”
스티븐은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겁니다. 우리 아이컴에만 적용 가능한 인공지능이어야 합니다.”
이지수 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러면 이 시스템 판매량이 생각보다는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스티븐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경영자 관점에서 이 애니 시스템을 봤다.
“그건 아이컴 가격을 더 올려서 팔면 되는 부분입니다.”
“판매량에 영향을 줄 텐데요?”
“PC에 비해서 확실한 기술적 우위라서 충분합니다. 특히 KM 메신저를 응용하면 더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스티븐이 하는 주장은 간단했다. 독점 기술을 이용해서 초고가에 판다는 정책이다. 이러면 당연히 이익이 많이 남는다.
기술적인 우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스티븐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
동일한 사양의 아이컴과 PC라면 당연히 아이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지수 박사는 그러면 판매량이 계속 줄지 않느냐라고 다시 질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티븐은 그제야 시장 독점적인 방식에 집착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건 전부 다 기술 독점과 관련이 있다.
실상 이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 가능한 것은 현재는 아이컴 뿐이다.
해당 아이컴에 단순한 디자인 변화를 준 것만으로도 이 기술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음향 노이즈 반사를 비롯한 다양한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다.
해당 기술은 아이컴을 사용할 때의 딱 정해진 마이크 위치의 음성만 가지고서 설계되었다.
거기에 소프트웨어적인 불안정성 역시 문제다.
이 부분은 분명히 소비자 클레임이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스티븐은 그 문제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다.
최민혁 역시 스티븐과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튜닝 작업은 제품을 팔고 나서 해도 충분합니다.”
“…정말 괜찮을까요?”
최민혁은 대답하면서도 힐끗 스티븐을 쳐다보았다.
“제품 양산이 좀 문제일 겁니다.”
스티븐은 애니와 대화 테스트를 진행하는 엔지니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양산 문제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박사님은 이 애니 AI의 안정성을 높여주십시오. 특히 하드웨어적인 문제를 사전에 찾아내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수정할 수 있으니까요.”
“…네.”
스티븐은 곧 미친 사람처럼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추가된 부품 수급과 신뢰성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일정이 생각보다는 넉넉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CES 전시회는 그렇다고 해도, 판매 시기를 늦추어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마케팅 측면에서 그다지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스티븐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거라면 모건 스탠리 측도 에플 주식으로 장난치지는 못할 거야. 스탠스를 달리해야겠지. 꼼수를 쓰기도 힘들 거야. 다만 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인데…….’
솔직히 최민혁은 태국 바트화 문제만 아니었다면 모건 스탠리를 제대로 역 멋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앞날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굳이 모건 스탠리와 같은 세계적인 투자 은행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그건 지금의 최민혁에게도 좀 무리였다.
‘내 적은 샐로먼 브러더스잖아. 모건 스탠리는 샐로먼 브러더스를 상대할 동료로 삼는 것이 맞아. 지금은 어쩔 수가 없지. 만약 모건 스탠리가 헛짓하면, 나중에 가서 손을 써도 늦지 않잖아. 더욱이 지금 모건 스탠리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조금만 더 시간을 줘보자.’
* * *
존 맥커니 사장도 스탠리 이사에게 최민혁 실장 문제를 떠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태국 바트화 하락과 관련해서 태국 중앙은행이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중앙은행까지 만나서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태국 사태가 위기 국면으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서다.
더욱이 외국 투매가들이 아예 태국 정부를 노린다는 것이 문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동남아 주요 은행들도 태국 사태를 무시하지 못했다.
결국 헤지펀드 세력이 나서서 미국 정부를 압박했고, 이들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게다가 태국 정부가 미국에 반해서 한 몇 가지 활동에도 제동을 걸었다.
정치적인 수단이라서 그나마 먹힌 것이었다.
다행히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태국 정부가 생각보다는 잘 버텼다.
다만 존 맥커니 사장도 스탠리 이사가 의도한 바를 이루지 못한 후에 다른 대안을 검토해 봤지만 여전히 뾰쪽한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고 보고받았다.
스탠리 이사는 존 맥커니 사장의 눈치를 봤다. 그는 최근 최민혁 실장이 스티븐과 연구진을 KMBOOK 연구소로 호출해서 뭔가 한다는 것까지는 파악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팔로알토 네트웍스 본사 건물을 사용한 KMBOOK 연구소의 보안이 생각보다 좋아서다.
존 맥커니 사장도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그를 압박하지 않았다.
“대안책을 못 찾았나?”
스탠리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 실장의 국적이 미국인이라는 것까지 알았을 뿐입니다.”
“…뜻밖의 정보군.”
“최민혁 실장은 미국 국적을 얻을 기본적인 자격이 안 됩니다. 최민혁 실장은 최소한 미국 거주 기간 5년이라는 기본 요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설마 미국 국무부가 손을 쓴 건가?”
“조시 차관보 태도를 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흠.”
존 맥커니 사장은 혀를 내두르다가 불쑥 질문했다.
“하면 언론을 이용해서 문제를 만들어도 되지 않나?”
“소용없을 겁니다. 설마 지금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싸우란 말입니까?”
“방법이 없다면…….”
“그 태국 바트화 사태 말입니다. 그거 다 미국 정부가 암묵적으로 밀어줘서 진행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와 적대하란 말입니까? 설마 샐로먼 브러더스 같은 꼴을 당하란 말입니까?”
“그거야…….”
그도 샐로먼 브러더스가 불법으로 저지른 일 때문에 미국 정부에게 계속 압력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샐로먼 브러더스가 여전히 잘나가고 있어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