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
갑자기 바뀐 말.
스탠리 이사는 전혀 예상도 못 한 최민혁 실장의 대답에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서, 설마 저, 저희 일을 바, 방해할 생각입니까?”
“방해라니? 그런 멍청한 짓을 제가 왜 합니까?”
“하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이 문제를 꼭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느긋했다.
“저 같은 한국 기업가가 어떻게 모건 스탠리 일을 방해합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스탠리 이사 역시 며칠 전까지는 최민혁 실장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최민혁 실장의 태도가 공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은근슬쩍 부정적인 태도를 다시 바꾸었다.
“그저 모건 스탠리와 이익을 나누겠다는 뜻이죠. 전 모건 스탠리 말을 충실히 들을 겁니다. 자금이 필요하면 더 도와줄 생각도 있습니다.”
모건 스탠리 스탠스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말인데, 투자 금액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진다.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태국 바트화 사태는 이미 판이 다 짜인 형세다.
여기서 최민혁 실장을 굳이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 역시 그런 점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이익이 줄어드는 게 문제가 아니라 최악의 경우 판 자체가 엎어질 수도 있어.’
솔직히 미국 내의 다른 자본가도 믿을 수가 없는데, 최민혁 실장은 더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최민혁은 이죽거렸다. 그는 계속 상황이 늘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놈의 고민은 언제 끝나는 겁니까. 기다리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그런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워낙에 큰일이라서요.”
“뭐, 그렇겠죠. 태국 바트화를 흔들어서 재미를 보는 일이니, 아마 미국 언론에서도 알면 진짜 난리가 날 일이죠.”
“그,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투자입니다. 환율 투자는 채권투자처럼 도박이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태국 정부 이야기는 다르더군요. 환율 투기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던데요?”
“그거야 몇몇 투기 자본 세력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모건 스탠리는 세계적인 투자은행으로, 그런 불법적인 투기 세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네.”
바로 꼬리를 내리는 스탠리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뭘 요구하는지 알 것 같았다.
태국 바트화 사태에 직접 끼어들면 문제의 소지가 생기니 말이다.
하지만 모건 스탠리를 통해서 곁다리로 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차피 욕은 환율 투기 세력이 먹는다.
모건 스탠리 브로커를 통해서 자금세탁까지 하니, 이익도 보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 애국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모건 스탠리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네.”
스탠리 이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을 전혀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첫 만남에서는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장난삼아서 툭툭 던지는 말만 봐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몇 번 만나고 나서야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을 단단히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적당히 거리만 두면 최민혁 실장이 떨어져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솔직히 태국 바트화 계획을 그가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젠장, 안일했어.’
모건 스탠리는 세계적인 대형 투자신탁 회사다.
미국 내에 있는 어떤 기업도 모건 스탠리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구멍가게 사장을 상대하듯이 대했다.
조성돈 팀장은 스탠리 이사가 떠나는 모습을 보자 우려했다.
“괜찮겠습니까? 모건 스탠리는 가볍게 볼 회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뭐, 이전이라면 저도 이렇게 못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상은 모건 스탠리도 무리수를 두지 못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압박할 필요가 있어요.”
“이해관계라면, 혹시 에플 말씀입니까?”
“네. 모건 스탠리는 자체적으로 에플에 투자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서 꽤 많은 지분을 흡수한 것으로 압니다. 에플 이사회에도 이미 손을 썼으니까요.”
조성돈 팀장은 모건 스탠리와 에플이 나오자 마른침을 삼켰다.
“…하면 더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은 결코 제 제안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대안이 없으니까요. 다만 우리 내부도 지금 이 상황을 몰라서 오해하도록 둘 수는 없죠. 알아야 할 사람에게 적당히 상황을 이야기하세요. 아, 이왕이면 채팅이나 메신저 미래가 아주 안 좋다는 식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앞세우면 잘될 겁니다. 특히 불법 복제 있잖습니까. 그걸 좀 부추기세요.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은 바로 손을 뗄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최민혁 실장이 간혹 미국에 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부분 단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 일정은 좀 달랐다.
최민혁의 미국 체류 기간이 제법 늘어났다.
덕분에 최민혁 스캔들 이슈도 점점 시들어갔다.
국내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미국에 있는 최민혁 실장이 반응하지 않아서다.
최민혁도 송도연보다는 인공지능 이슈가 커서 오히려 여기에 더 집중했다. 송도연과 인공지능이 힘을 합친 무대라면 그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안재운 전무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 쪽과는 거리를 둔 것도 이 이유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정보는 사전에 알릴 이유가 없었다.
굳이 노이즈마케팅을 더 크게 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KM 전자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최민혁 실장님이 귀국하면, 기자회견을 열어서 답변하겠습니다!]
처음에는 한영 일보를 비롯한 언론사가 이걸 꼬투리 잡아서 계속 공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들 역시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구골 설립 이후에는 오히려 야후의 나스닥 상장에 관한 예측 기사를 내보냈다.
그 와중에 KMBOOK이란 회사 추가 설립이 알려졌다.
메신저 서비스 이야기는 바로 나왔다.
다만 국내에서 이야기란 프로그램이 이미 있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송도연 스캔들은 쑥 사라지고 말았다.
최민혁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만 기획 팀은 좀 달랐다. 그들은 겨우 안도했다. 대신에 이들이 한 일은 바로 이야기와 관련된 아이템을 집중적으로 파는 것이었다.
이미 KM 그룹 본사에서도 검토된 아이템이라서 거칠 것이 없었다.
물론 결과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박광민 사원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미국판 이야기 서비스를 한다는 것 같은데, 그게 가능성이 있을까요?”
배종대 과장 역시 아침 대용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툴툴거렸다.
“이번에는 최 실장님이 실수한 것 같기도 해. 솔직히 채팅 사이트는 의미가 있나?”
“이야기를 잘 만들기는 했죠. 그런데 불법 카피가 문제이니까. 최근 나온 신제품은 불과 1주일만에 4만 장이 넘는 불법 파일이 돌아다닌다던데요?”
“아니, 그 이상인걸?”
배종대 과장은 넌지시 자신도 이야기 불법 파일을 사용한다고 툴툴거렸다.
그런데 이건 기획 팀 중에 예외는 없었다.
“어, 저도 이야기 불법 복제인데…….”
“솔직히 이야기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식으로 돈 주고 이야기를 사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의 불안한 미래 상황이 나오자 기획 팀 분위기는 썩 좋지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서 하는 일이 자칫하면 실패할 수도 있다.
“KMBOOK과 관련해서 벌써 천억이 넘는 자금이 소요되었다고 하던데, 그거 정말입니까?”
“저도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행이라면 그 자금은 벨린 투자가 한 부분이라서 KM 전자와는 관계가 없다는 소리가 있어요.”
“하면 이번 일도 최민혁 실장님이 자기 자금으로만 투자한 겁니까?”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솔직히 불법 복제가 사라진다면 메신저 서비스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메신저 서비스가 채팅과 똑같은 겁니까?”
여기에 대해서 답변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채팅이나 메신저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이미 사전 정보를 들은 박상기 차장이 한마디 했다.
“최민혁 실장님이 일을 진행할 때는 다 사전에 준비한 것이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박광민 사원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최민혁 실장도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 실장님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우리가 나서서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후 때문에 구골을 설립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KMBOOK은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요?”
하지만 마냥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특히 정성근 대리가 한 가지를 걸고넘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몇 차례나 있었지 않습니까? 늘 최민혁 실장님 행보를 까다가 뒤에 가서는 아 역시 갓실장님, 그랬잖아요.”
배종대 과장이 정성근 대리를 타박했다.
“이번은 상황이 다르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응, 난 그렇게 생각해.”
결국 상황을 보다 못한 박상기 차장이 코웃음을 쳤다.
“최 실장님이 이런 상황을 모르고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해? 오죽하면 인 지능 서비스까지 넣은 새로운 메신저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겠어?”
“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은. 말 그대로야. 이지수 박사라는 인공지능 전문가와 손을 잡았다고 하니까. 이미 프로토타입도 나왔고.”
* * *
박상기 차장은 말로만 하지 않았다. 기획 팀도 이제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회의를 소집해서 조성돈 팀장이 보내온 파일을 보여주었다.
비록 단기에 걸쳐서 작업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 결과를 촬영한 장면이었다.
일반인을 투입해서 음성 인식을 실험했는데, 꽤 그럴듯하게 먹혔다.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드웨어 시스템이다.
특히 마이크 노이즈가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단기에 나온 결과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를 보였다.
“…서, 설마 저거 인공지능입니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좀 있어. 당장 상용화는 무리이니까. 하지만 아이컴에 적용할 대안을 지금 강구 중인 것 같아. 오죽하면 모건 스탠리가 에플 지분 매각을 다시 검토하겠어?”
“네? 거기 모건 스탠리 이야기는 또 왜 나오는 겁니까?”
“모건 스탠리가 에플 대주주이기도 하잖아.”
“맙소사.”
박광민 사원은 상상을 초월한 전개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들은 미국에 가 있는 최민혁 실장이 뭔가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모건 스탠리와 협상을 진행 중인지는 몰랐다.
박상기 차장은 깜짝 놀란 기획 팀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역시 조성돈 팀장에게 자료를 받고 나서는 꽤 충격을 받았다.
일단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 전개가 너무 빨랐다.
‘최 실장님은 사전에 저렇게 상황이 전개될 거라는 것을 안 것일까?’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지수 박사의 경우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정성근 대리가 슬쩍 손을 들었다.
“박 차장님, 그러면 앞으로 저 일은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그게 핵심이지. 최 실장님은 지금 굳이 국내에서 메신저 서비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을 원치 않아.”
“네?”
“으음, 쉽게 말해서 이야기 만든 업체 쪽과 협상을 하면서 이 메신저 서비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일부러 보여주는 거지.”
“…혹시 최문경 부회장 측을 흔들기 위함입니까?”
“그렇겠지. 오성 그룹을 비롯한 다른 쪽 시선을 고려해야지. 요즘 그 작자들이 최 실장님이 하는 일이라면 미친 듯이 감시하잖아. 그걸 막기 위한 것도 있어.”
“…알겠습니다.”
다들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모건 스탠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음모론을 꺼냈다. 그들로서는 최민혁 실장이 왜 모건 스탠리와 만나서 협상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에플 지분만으로는 설득력이 좀 부족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