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71화 (671/1,021)

#671.

“토니 교수, 지금 이 사태가 모두 저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입니까? 당신 정말 이 스탠퍼드 대학에서 계속 교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토니 투센 교수는 짜증스러웠다. 그는 테일러 박사에게 지금까지 협박받아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까지 잘 버티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멀쩡한 인재의 연구 성과를 자신이 밟아서 무너뜨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모든 일이 자기 책임이라고 말하는 테일러 박사가 혐오스러웠다.

“테일러 박사님.”

“뭡니까? 할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솔직히 이지수 박사는 저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수학적인 모델에 집중했고,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이지수 박사는 토니 투센 교수의 지시를 어기지 않고, 묵묵히 그를 믿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알고리즘을 서서히 만들어냈다.

다만 이 성과물은 워낙에 추상적이라서 딱히 결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이지수 박사는 결국 계속 수박 겉핥기 연구를 거듭해서 여기에 대한 이론 기반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토니 투센 교수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아마 이지수 박사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그때 가서 우리 소유권을 주장해도 됐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이대로 이지수 박사가 우리 연구 성과를 도둑질해 가는 것을 지켜보란 말입니까?!”

“…일단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정말 답답한 분이시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지수 박사의 연구 성과를 뺏으란 말입니다. 안 그러면 당신은 끝장일 겁니다!!”

“…….”

토니 투센 교수는 연구실에 있던 다른 연구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이지수 박사가 그만둔다고 할 때부터 뭔가 싸하다고 생각했다.

테일러 박사와의 관계 때문에 별다른 태클을 걸지는 않았는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업자득이겠지.’

* * *

토니 투센 교수는 이지수 박사에게 연락해서 바로 만났다.

어차피 그녀는 떠나는 사람. 마지막 작별 인사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지수 박사에게 넌지시 KMBOOK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이지수 박사는 역시나 그가 예상한 대로 말했다.

“…그 사실을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테일러 박사에게 들었습니다.”

“아.”

깜짝 놀란 이지수 박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토니 투센 교수는 오히려 피식 웃었다. 그는 마치 세상을 초탈한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설마 모르고 있었습니까?”

“짐작은 했지만…….”

“이지수 박사 당신이 우리 인공지능 연구소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테일러 박사의 짓입니다. 당신이 지원한 다른 연구소에 손을 썼던 거죠.”

“…하면 간혹 이해하기 힘든 지시를 내렸던 것도 교수님 뜻이 아니었던 겁니까?”

“네, 솔직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협박을 받은 처지였으니까.”

“하.”

이지수 박사는 황당한 눈으로 토니 투센 교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는 분노도 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테일러 박사가 뒤에서 꾸민 흉계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곧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녀도 뭔가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연구에 집중하고 싶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솔직히 자신의 연구 성과 일부를 빼앗긴다고 해도 자신이 한 연구 경험 자체는 어디 가지 않으니 말이다.

애니 결과물이 나온 것이 그 증거였다.

그녀가 이 연구소에서 한 경험 덕분에 애니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스탠포드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연구했던 방향과는 좀 달랐다. 때문에 특허를 주장하기 어려웠다. 그녀도 몇 번 당하고 나서 대안을 준비한 것이었다.

다만 이지수 박사 자신도 테일러 박사와 작정하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래서 오히려 피식 웃고 말았다.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일단 보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애니를 이용해서 테일러 박사를 괴롭힐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애니가 꽤 탐이 났나 보군요.”

토니 투센 교수는 오히려 밝게 웃었다.

“테일러 박사가 미친놈처럼 설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토니 교수님 생각은 좀 다른가 봐요?”

“전 이지수 교수가 떠나는 마당에 굳이 태클을 걸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지수 박사는 물끄러미 토니 투센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제야 토니 교수가 자신을 뒤에서 꽤 많이 감싸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만둔다고 할 때도 편의를 봐준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테일러 박사가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면 그만큼 연구소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냥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토니 투센 교수가 알게 모르게 그녀를 많이 도와준 것이었다.

토니 투센 교수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넌지시 말했다.

“테일러 박사는 크게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그 인간한테 한 방 날려주면 더 좋고요.”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한번 해볼게요.”

“제안을 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고 했죠?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그 남자라면 이지수 박사가 꿈꾸는 것을 이루어줄 겁니다.”

“…네.”

이지수 박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토니 투센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도와준 이상 그 역시 스탠포드 대학에 계속 있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문득 최민혁 실장이 새삼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일러 박사와의 악연에 관해서 이야기를 언제 해야 하나 타이밍을 보고 있었어.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 이야기해야겠어.’

* * *

이지수 박사는 나름 자신의 악연과 관련된 일이라서 크게 걱정했다.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테일러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최민혁 실장 반응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미친놈이군요.”

“네?”

“아니, 여자에게 차였다고 지금까지 흉심을 품었다는 말 아닙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아니, 그런 말뜻이 아닙니다. 테일러 박사 일가는 미국 내에서 꽤 유명한 명문가로…….”

“설마 제가 그런 놈 하나 감당하지 못할 거로 생각합니까? 저도 돈 많습니다. 한번 통장 계좌 보여줄까요?”

“아…….”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미국 내에서 억만장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사실 자본만으로 최민혁 실장과 대등하게 싸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욱이 기술 가지고 경쟁해서 버틸 사람은 더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기술마저 더했으니.

오히려 반대였다.

테일러 박사 가문이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부담스러워해야 했다.

최민혁은 물론 다른 제안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적극적으로 나설 겁니다. 그 토니 교수란 사람을 만나서 지원을 해주든지 하죠. 이번 일은 너무 걱정 마세요. 제 사람이 된 이상 끝까지 책임을 질 테니까.”

“…네.”

이지수 박사는 큰소리를 떵떵 치는 유치한 최민혁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 자신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실 이건 회귀 후에 꼭 하고 싶었던 일 중의 하나였다.

인생 1회 차에서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일러 이 새끼야, 이번에는 제대로 밟아주마!’

* * *

최민혁 실장은 바로 토니 투센 교수를 만나서 문제가 생기면 돕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토니 투센 교수의 태도도 이전과는 또 달라졌다.

테일러 박사가 아무리 협박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일러 박사는 자신의 협박에도 토니 투센 교수가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자 크게 분노했다. 그는 결국 자기 가문을 동원해서 존 맥커니 사장을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내세운 명분은 이지수 박사가 개발한 인공지능이었다.

당연히 존 맥커니 사장은 모건 스탠리 이사회를 통해서 욕을 잔뜩 들었다.

그는 자칫하다가는 정말 모건 스탠리에서 잘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그는 스탠리 이사를 개 잡듯이 괴롭혔다.

스탠리 이사는 존 맥커니 사장에게 조직폭력배 조직원처럼 협박을 받았고, 결국 견디다 못 해서 최민혁 실장을 일단 찾아갔다.

‘오, 왔구나, 왔어.’

최민혁은 쾌재를 불렀다. 그도 자신이 좀 도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지수 박사와 테일러 박사에게 손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만 겉으로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요즘 태국 중앙은행이 난리더군요. 바트화 평가절하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태도인데, 누군가 계속 압박하는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아예 허리를 구십 도로 낮추었다.

“그거야 태국 경상적자 비율이 악화하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스탠리 이사의 반응에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린 것에 만족했다.

“그거야 그렇죠. 수출이 잘되었다면 그럴 수 있죠. 그래서 평가절하를 더 할 수가 없죠. 외국인 투자 자체를 막을 테니까. 지금도 태국이 잘 버티는 이유가 평가절하를 막은 이유 때문이니까.”

실제로 올 년 초의 태국 수출이 제법 늘어나면서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장황한 이야기에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속이 타들어가도 별다른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최민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민혁은 태국 경제 사정을 하나둘씩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임금 상승이 가장 큰 문제죠. 중국하고 가격 경쟁에서 밀리니, 더 어려워지죠. 특히 섬유 산업은 직격타이니까.”

다 아는 내용이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가 여기 온 것은…….”

최민혁은 태국 경제에 감정이입 해서 투덜거렸다.

“전 태국 경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모습이 한국 경제랑 판박이처럼 닮았으니까요. 아, 그렇다고 태국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 사업가입니다. 이 상황을 이용해서 이익을 보면 됩니다.”

“…네.”

“설마 아직도 모른 척할 겁니까?”

“네? 뭘 말입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미 인생 1회 차에서 이지수 박사와 관련된 과거 사정을 제법 알았다. 이지수 박사와 친해진 후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이지수 박사를 쫓아다니는 놈도 있었지. 테일러 박사라고 했던가? 헬렌도 좋아해서 두 사람한테 찝쩍거렸지.’

인생 1회 차에서 테일러 박사와 이지수 박사 사이의 갈등은 처음부터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테일러 박사가 이지수 박사를 짝사랑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지수 박사가 테일러 박사의 프러포즈를 거절한 후에는 달라졌다.

자존심이 상한 테일러 박사가 이지수 박사에게 앙심을 품은 것이었다.

뭐 흔하디흔한 남녀 갈등이었다.

그런데 테일러 박사의 집안이 꽤 힘이 있었다. 아니, 미국 내에서 유명한 명문가 중에 하나였다.

이지수 박사를 끌어내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지수 박사의 연구 성과는 진짜였다. 아무리 금력과 권력으로 이지수 박사를 찍어 눌러도 그녀의 결과마저 없앨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는 최민혁 자신과 관련이 없다.

문제는 이지수 박사가 자기 밑으로 온 다음이다.

테일러 박사가 최민혁 자신도 공격한 것이었다. 사실 최민혁의 몰락에는 단순히 최문경 부회장 때문만이 아니라 테일러 박사도 꽤 관여하고 있었다.

특히 최문경 부회장이 테일러 박사에 대한 사실을 알고선 은밀히 그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탠리 이사가 지금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것부터가 압력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태국 바트화 사태를 움직이는 헤지펀드 중의 하나가 테일러 일가이니까. 이지수 박사를 건드리면, 반응이 올 거로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아.’

이제는 그도 자신의 적과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차라리 이지수 박사를 밀어주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테일러 박사를 밟아버릴 정도로 강하게 말이다.

“스탠리 이사님, 전 정말 모건 스탠리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태국 바트화 사태는 꽤 돈이 될 만한 이벤트입니다. 저도 구경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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