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
그녀도 솔직히 최민혁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을 느꼈다. 바로 최민혁 실장의 진심을 말이다.
이지수는 이런 감정을 몇 년 만에 느낀 탓에 최민혁 실장을 따스하게 쳐다보았다.
이에 반해서 한쪽에 서 있는 헨렌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최민혁 실장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최민혁은 따스하고, 차가운 상반되는 시선을 느끼면서 혀를 찼다. 덧붙여 그는 조성돈 팀장과 김명준 과장의 부러운 시선에도 혀를 찼다.
‘…레즈비언하고 경험(?)이 없으니, 좋아 보이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겠어. 어쨌든 시작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당분간은 조심해야겠어.’
* * *
KMBOOK 회사는 설립과 동시에 정신없이 돌아갔다.
애초에 POWWOW, ICQ, 인공지능 팀은 각자 해놓은 결과물이 있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건 이것들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지수 박사 연구 팀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음성인식이라는 일부 분야만 일단 적용하면 되었다.
이런 부분은 이미 이지수 박사가 통합을 위한 뼈대를 만들어놓았기에 그다지 난관이 별로 없었다.
상업적인 부분이 문제였지만 그건 시스템 설비가 어느 정도 커버했다.
슈퍼컴퓨터 두 대와 막대한 서버가 시간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다.
스티븐과 마크 실러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최민혁 실장에게 연락했다.
최민혁은 이미 존 맥커니 사장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두 사람을 팔로알토 네트웍스 빌딩으로 안내했다.
스티븐은 물론 호기심을 쉽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솔직히 존 맥커니 사장이 왜 그렇게 최민혁 실장에게 집착하는지 알고 싶었다.
“최 실장님, KMBOOK이란 회사는 어떤 목적으로 설립한 겁니까?”
“말보다는 직접 보시는 것이 훨씬 좋겠죠.”
“네?”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의 태도에 놀랐고, 마크 실러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 CES 기조연설을 도와주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봐서는 CES 기조연설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송도연의 무대에도 말이다.
최민혁은 따가운 두 사람의 시선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연이 무대나 CES 기조연설 역시 에플 홍보를 위한 수단입니다. 지금 보여주려는 일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홍보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제품 경쟁력도 무시 못 합니다. 특히 기술적으로 우위인 면이 있다는 것을 빼놓을 수가 없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지수 박사와 헬렌이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스티븐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서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스티븐은 이미 이지수 박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당신이 그 이지수 박사군요.”
“네? 아, 제가 이지수 박사입니다.”
스티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지수 박사의 얼굴을 살폈다. 단순히 화려한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음성인식 분야에 깊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스카우트할 대상까지 어느 정도 검토 중이었다.
지금 당장은 에플이 하는 일이 있어서 뒤로 미뤄두기는 했지만 KMP-02B와 아이컴 출시 이후에는 손을 쓸 생각이었다.
다행인 게 있다면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아는 이들이 없어서 직접 행동에 나서기 전까진 견제를 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놀랍게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이런 예상과는 달랐다.
최민혁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애니였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애니도 잘 지냈어?]
[아뇨. 전 좀 피곤합니다. 요즘 일이 갑자기 늘어나서 많이 불편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인간끼리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컴퓨터 화면 한쪽에 나오는 문장만 봐도 그럴 리가 없었다.
인간과 컴퓨터가 하는 대화 장면은 SF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특수효과가 아니라 정말 순수한 알고리즘으로 진행되는 대화였다.
스티븐도 처음에는 최민혁이 자신을 놀리나 싶어서 웃었다.
“최 실장님이 아무래도 나를 심하게 놀리려고 하는 것 같아.”
마크 실러 역시 스티븐 장단에 맞춰줬다.
“짓궂은 면이 있습니다.”
“그러게. 최 실장님의 이런 면은 처음이라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이런 장면에서 나도 깜짝 놀란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마크 실러 역시 과장되게 웃었다.
“저도 가만히 있어서는 곤란하겠군요.”
그러고선 두 사람은 서로 과장된 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과 애니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애니, 네 인공망 코어 쪽의 설계도를 보여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지금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마치 암호로 이루어져 있는 바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백만 개의 코드 패턴이 서로 그물처럼 엮여 있었다.
그리고 애니가 입을 열 때마다 그 코드 중 일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작하는 인공망 일부를 시뮬레이션해서 보여준 것이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 차 미래 영화에서나 볼 만한 장면을 직접 확인하면서 본인도 입을 살짝 벌렸다. 그도 애니의 능력이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긴 이 박사가 한 결과물이 사장되면서 나도 본 적이 없었어.’
그렇게 본다면 외부에 공개된 건 이게 최초였다.
이지수 박사가 가진 능력의 일부를 처음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그는 애니의 만족스러운 동작에 기뻐하는 이지수 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헬렌은 그 와중에 슬쩍 이지수 박사를 포옹했다.
물론 이지수 박사는 단순히 축하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이거 설마.”
스티븐도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곧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서, 설마 이, 인공지능?!”
최민혁은 그제야 방긋 웃었다.
“뭐, 영화에 나오는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약속을 정하면 대화를 할 정도는 됩니다. 일테면 채팅 같은 수단으로 말이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민혁과 애니 사이의 대화 리스트가 쫙 떠올랐다.
이지수 박사는 경악한 스티븐을 염려해서인지 슬쩍 설명을 해주었다.
“최 실장님은 이미 어느 정도 애니가 음성 패턴 특성값을 인식한 상태라 오차 없이 바로 적용되는 겁니다. 일반인은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습니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오차가 많이 생겨났다.
더욱이 사용하는 컴퓨터가 개인용 PC였으니, 슈퍼컴퓨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는 방향 자체는 맞았다.
스티븐 자신이 차세대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방향이었다. 그는 그 기술에 대해 꿈만 꾸고 있었는데, 벌써 떡하니 눈앞에 그 결과물이 나온 것이었다.
“아, 아무래 그래도, 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이런 성과가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스티븐.
이지수 박사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저도 이렇게 결과로 도출한 것은 처음입니다. 주변 환경이 이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테일러 박사가 집요하게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을 막아버렸다.
특허라는 명목.
그녀로서는 그저 지시에 따르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문제는 스탠퍼드 대학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도 그녀에게 집요하게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까.
최민혁이 아니었다면 이런 시도는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도 스티븐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아무리 자신이 이지수 박사를 도왔다고 해도 이렇게 빠르게 결과물이 나올지는 몰랐다.
‘테일러 그 새끼가 이지수 박사의 기술을 사장했었을지도 모르겠어. 하긴 이지수 박사의 결과물은 너무 복잡해서 제대로 다 아는 이도 손에 꼽았으니.’
솔직히 그 역시 결과물을 분석하는 이지수 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지수 박사는 돈이나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니까.
얼핏 봐서는 호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성정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연구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갖춘 진정한 실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민혁 자신조차 이지수 박사의 진정한 잠재력을 완전하게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스티븐이 망상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당장은 이 기술을 개인용 PC 시장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려면 단계별로 적용해야 할 겁니다. 필요하다면, AI 칩을 따로 설계해야 할 겁니다.”
“아, 역시 성능 때문입니까?”
“네. 단순히 음성인식 한 분야만 해도 여러 가지로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당장 KMP 시리즈에는 적용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이컴에는 좀 다르겠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아이컴 CPU 성능이라면 제법 효용 가치가 있을 겁니다."
“…혹시 특수한 장비가 필요합니까?”
“천만에요. 다만 아이컴 쪽은 다시 검토해야 할 겁니다. 하울링과 같은 문제가 있으니까요.”
“아, 그게 문제군요.”
“그게 생각보다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처리 가능한 범주 내의 음성이기에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개인 PC는 그게 달라요. 성능이 들쭉날쭉해서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이크 장치는 사전에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컴의 형태 자체가 고정돼 있어서 일반 PC와는 달리 특성 자체도 고정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컴 모형 자체가 고정되면, 마이크의 성능 역시 일정 범위 내에 들어간다. 따라서 노이즈 문제를 해결하기 더 수월해진다.
“과연!”
스티븐은 여기 오기 전에 존 맥커니 사장이 한 말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그딴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기술을 아이컴에 적용하기만 한다면 다른 PC와 비교해서 무조건 비교 우위에 있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이런 시스템이라면 홍보하기에도 좋았다.
일테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을 상대로 적절한 이벤트만 마련해도 아이컴의 인기는 독보적일 테니까.
다만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아이컴 양산 전에 시스템 변경이 가능한지도 확인해야 했다.
스티븐은 오랜만에 자신의 피가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존 맥커니 사장이 왜 최 실장님을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 양반이 절 협박이라도 하랍니까?”
“아니, 그 반대입니다. 아무래도 최 실장님이 부담스러워서 저에게 부탁했으니까요. 저도 입장이 있어서 존 사장의 제안을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굳이 그런 제안 따위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전 아이컴과 이번 CES 이벤트에만 집중할 예정입니다.”
“좋네요. 하지만 아이컴 시스템에 대한 것은 이지수 박사님과 같이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아마 시스템 수정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지수 박사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예요. 지금과 같은 효율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반 하드웨어가 탄탄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용 문제 때문에 그러질 못해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직접 개발하면 됩니다. 그러니 자금에 구애받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마크 실러는 이들의 대화를 무시한 채 멍하니 애니 화면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마크 실러를 무시한 채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제가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줄 테니, 그 자료를 존 맥커니 사장에게 넘기세요. 언제까지 버티나 한번 봅시다!”
* * *
존 맥커니 사장은 스티븐에게서 필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티븐이 보내온 자료를 살피면서 자신이 착각했나 싶어서 스티븐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직접 확인했다.
[사실입니다. 뭐, 최민혁 실장이 직접 고안한 것이 아니라 이지수 박사가 만든 결과물이더군요. 당시 이지수 박사가 개발한 인공지능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제대로 데모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최민혁 실장이 한 한국식 격언에 따르면, 곤란하던 차에 돗자리를 깔아준 셈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