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66화 (666/1,021)

#666.

존 맥커니 사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들은 정보야. 다들 쉬쉬하지만 이미 아는 사실이니, 이제 와서 숨길 일은 아니지. 다만 우리 처지에서는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 해. 그래야 어설픈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

‘국방성은 보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이 정보를 다 덮었군.’

결국 이지수 박사 연구 팀 성과는 폐기되었고, 그 기술 소유권자는 국방성 관할 연구소로 넘어갔지만 말이다.

‘이건 뭐야?’

실로 어이가 없는 일.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힘이 없으면 연구 성과를 뺏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누군가 이 일에 깊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명백하다.

그런데도 이지수 박사는 여전히 잘나가는 중이다.

워낙에 이룬 성과가 많아서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이지수 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실상 독보적이었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 팀이 지금 진행하는 인공지능은 바로 이 무인 드론 인공지능보다도 더 발전된 개념이었다.

“…….”

스탠리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존 맥커니 사장을 힐끗 째려봤다.

존 맥커니 사장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날 그런 식으로 보지 마. 나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이니까.”

“이지수 박사의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그쪽하고 제대로 된 협상을 하지 그랬습니까?”

“잘 알면서 그래.”

“계륵입니까?”

“아무래도 한국인 출신이니까.”

“쯧.”

‘인종차별인가. 그럴 수도 있어. 아니 더했을 수도 있겠어. 고작 동양인 여자 하나와 경쟁에서 밀렸다면 말이야.’

그는 그제야 이 서류가 꽤 중요한 기밀 문건에서 나온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서류가 그냥 나왔을 리는 없다.

‘정부 고위층에서 정보를 흘린 건가?’

그럴 수 있다.

태국 바트화 사태도 보면, 단순히 헤지펀드 마음대로 할 범위를 넘어섰다.

이 일의 배후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자와 이지수 박사에게 압력을 넣은 인물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미국 국방성과 미국 정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배후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다.

존 맥커니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국방성 내의 역학 관계는 잘 몰라. 이지수 박사가 배척받은 이유는 그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이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냐.”

그도 내부 정치 역학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리쳤다.

“아니, 이지수 박사 연구가 그만큼 가치가 있다면, 그쪽을 밀어주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자네도 눈치를 좀 챘을 텐데? 이지수 박사를 싫어하는 이가 있다니까!”

스탠리 이사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논쟁에 눈살을 찌푸렸다. 일종의 밥그릇 싸움일 것이다. 그도 대충 돌아가는 모양새를 깨달았다. 이지수 박사가 그만큼 주목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최민혁 실장이 끼어들기 전에는 말이다.

이지수 박사는 인공지능이라는 순수 연구 쪽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니까.

더욱이 중간에 이리저리 압력을 넣어서 연구를 방해했다.

아무리 이지수 박사가 대단한 실력자라고 해도 주변에서 온갖 음해 공작이 들어가는데,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심지어 연구 성과를 베꼈다고 고소당해서 소송도 몇 번 치렀다.

이 소송도 몇 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중간에 포기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지수 박사가 만든 성과물을 조금씩 가로채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이지수 박사 입장에서는 다른 연구원들의 처지를 생각해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일테면 연구 과정에서 나온 특허 일부를 매각하는 것 말이다.

이런 과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서로 윈윈이니까.

더욱이 이지수 박사는 큰 공명심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순수 연구 쪽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연구가 현실로 나오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이지수 박사의 연구 성과물이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주의할 인물인 최민혁 실장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스탠리 이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최근 행적에 대한 보고서 내용을 떠올렸다.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이지수 박사와 손을 잡은 것 말이다.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지수 박사를 아는 이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그들은 갑자기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막상 최민혁 실장에게 손을 대려니, 이것저것 걸리는 문제가 너무도 많았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은 태국 바트화 플랜의 냄새까지 맡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존 맥커니 사장을 쳐다보았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이지수 박사의 진정한 실력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존 맥커니 사장은 책상 한쪽에 엉덩이를 걸친 채 인상을 찌푸렸다.

“몰라.”

“정말입니까?”

“나도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이지수 박사만 엮이지 않았다면 자네에게 이런 복잡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건 더 이상하군요. 최민혁 실장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 뭔가 알고 있었겠죠.”

“그건 아무도 몰라. 최민혁 실장 본인만 알겠지.”

존 맥커니 사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번 일은 일의 성격상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스탠리 이사와 단둘이 고민 중이었다.

당연히 일이 쉽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스탠리 이사는 이제까지 쌓인 호기심을 푸는 것에만 집착했다.

“…이지수 박사가 하는 연구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구골 엔진이야 어차피 야후와 같은 계열이잖아. 그러니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해. 하지만 인공지능 분야는 좀 달라. 기술이 어느 수준인지,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 응용 분야가 어느 정도까지 적용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까.”

“아니, 그걸 안다면 이지수 박사에게 투자하면 되지 않습니까?”

존 맥커니 사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이미 이지수 박사 주변 지인을 통해서 이지수 박사가 외부 투자에 얼마나 부정적인지 잘 알았다.

그녀는 이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의 투자 제안을 왜 받았는지도 모르겠으니까. 아니, 어쩌면 최민혁 실장이라서 제안을 받은 것일까?’

“…그게 문제지. 그건 자네 일이랑 지금 관련이 있잖아?”

“…태국 바트화 플랜 말입니까?”

“어, 그 일에 최민혁 실장을 엮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 이지수 박사와 진행하는 프로젝트 지분은 확보해야 해.”

“최민혁 실장 제안을 거절하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투자하겠다는 제안을 하란 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이 그 제안을 받겠습니까?”

“그게 문제지.”

존 맥커니 사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도 이 정보는 고위층(?)을 통해서 알았다. 그쪽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지금처럼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는 게 그 증거였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자신들을 건드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부랴부랴 조사한 결과.

결국 이 일의 발단이 된 것이 모건 스탠리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존 맥커니 사장은 덕분에 이 일로 엄청나게 깨지고 말았다.

왜 긁어서 부스럼을 냈느냐는 거다.

솔직히 그로서는 억울했다.

그는 솔직히 입을 다물면 최민혁 실장도 알아서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이지수 박사와 손을 잡고 이런 식으로 사태를 악화시킬 줄은 몰랐다.

‘이지수 박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인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거듭해도 뾰쪽한 대안을 찾지는 못했다.

아니,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장님, 이런 말 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혹시 그 정보를 준 쪽에 부탁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쪽 인맥이라면 최민혁 실장 친구 쪽과도 선이 닿지 않겠습니까?”

“글쎄.”

존 맥커니 사장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스탠리 로버트 이사의 제안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들이야 최민혁 실장과 이해관계 당사자라서 아쉬운 소리를 하기 힘들지만 제3자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누가 좋을까? 역시 에플 이사회 쪽이면 답이 될까?’

* * *

최민혁은 물론 급한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느긋했다. 이게 낚시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급한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말이다.

‘태국 바트화 쪽을 한번 흔들어 봐?’

아마 여윳돈 일부만으로도 태국 중앙은행 쪽은 좋다고 손뼉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IMF를 막을 목적이라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IMF를 이용하면 최문경 부회장을 위시한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적대 세력을 일거에 다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어. 어차피 한 번은 앓아야 할 홍역이니까.’

다만 그렇다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스티븐에게도 연락해서 상황을 확인했다.

스티븐은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최민혁이 미국에 도착하고도 자신을 직접 찾지 않아서다.

그는 송도연만 달랑 보낸 최민혁 실장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보낸 음원이 괜찮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크 실러는 리스크 문제를 가지고 일단 스티븐을 설득했다.

두 사람은 결국 송도연의 리허설 현장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CES 기조 연설 무대를 위한 사전 리허설 준비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수였다.

이벤트 무대 주인공인 송도연이 얼마나 제대로 된 무대를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무대의 총지휘를 맡은 윌리엄 고디 실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송도연이 기대 이하 실력을 보여준다면 그냥 교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소녀처럼 보이던 송도연이 무대에 올라서자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멋진 무대를 연출했다.

더욱이 한 번 익숙해지자 그다음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민혁 실장이 송도연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자신감을 붙여준 성과였다.

그녀는 뒤에서 연주해 주는 이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꼼꼼하게 연주할 때 자신과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를 하나씩 지적했다.

이것 역시 전부 다 과거 한국에 있을 때 최민혁 실장에게서 배운 내용이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그녀는 무대 위와 무대 아래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동양인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만, 음원 자체는 진짜였다.

스티븐은 그 모습을 무대 입구에서 보자 힐끗 마크 실러를 쳐다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때?”

마크 실러는 평소에 감정 변화를 잘 보여주지 않는 인물인데, 이례적으로 당황했다.

“…생각보다는 더 좋네요.”

“글쎄,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특히 그가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단순한 무대 퍼포먼스나 가창력이 아니었다.

음원 그 자체였다.

‘노래가 정말 죽이네.’

자신 역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송도연이 부르는 노래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더욱이 모타운이 나서준다면 송도연 노래를 미국에 알리기에도 좋았다.

‘그 시작이 CES 이벤트에, KMP-02B 앨범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어.’

한국에서 팔린 KMP-01을 기준으로 할 때 미국 내에서 최소 팔리는 KMP-02B 판매 수량이 300만 대 이상은 될 테니 말이다.

스티븐이 턱짓으로 쳐다본 이는 윌리엄 고디 실장이었다.

세계적인 공연 수십 개를 지휘했던 그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꽤 만족한 얼굴이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았다.

송도연은 아직 원석이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더 큰 발전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는 송도연에서 부족한 점을 발견하자 기꺼이 무대 위로 나서서 하나씩 그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스티븐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마크 실러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