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
최문경 부회장은 회의가 끝나자 기획조정실장실을 다시 찾아갔다.
축 늘어져 있는 장승일 실장의 표정은 확실히 꾸민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추가 조사를 하고서야 이 사업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더 나은 미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최문경 부회장은 냉랭했다.
“도대체 미국 가서 뭐 하다가 온 거야?”
“…최민혁 실장님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도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 대단하다던 장승일 실장이 왜 저 모양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조카 최민혁을 상대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그게 고작 채팅 프로그램이라고?”
“네.”
“…지금 날 놀리는 거지?”
장승일 실장도 이번 회의의 분위기를 읽어서인지 조용히 말했다.
“전 교육받은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게 민혁이 그놈이 한 거라고?”
“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장승일 실장을 이리저리 살폈다.
“설마 채팅 프로그램 서비스를 이용해서 또 날 낚으려고 한 거야?”
“…….”
장승일 실장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야기 제작 회사에 연락해서 직접 실무진을 만나기도 했다.
잘하면 투자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투자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채팅 서비스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장밋빛 기대는 고사하고, 암울하기만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불법 카피.
대부분의 사용자가 불법 이야기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
그러니 이야기 사업이 잘될 턱이 없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불안감을 느꼈지만 일단 최용욱 회장의 지시대로 합리적인 이성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역시나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나온 이야기는 메신저 프로그램의 불투명한 미래였다.
더 큰 문제는 이 시장이 이제 막 싹이 튼 단계라는 점이다.
이런 기반 아래에서는 무엇을 해도 결과가 신통치 않을 것이다.
‘최 실장님이 그걸 모를까? 아니면 다른 대안이라도 있는 것일까?’
결국 최민혁 실장은 메신저 시장의 미래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최용욱 회장조차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은 채 다시 자기 저택으로 가버렸다.
최문경 부회장은 영문을 몰라서 장승일 실장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잠깐 머뭇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 역시 듣는 귀가 있다. 최용욱 회장조차 실망했다는 소식을 말이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승일 실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혹시라도 내 뒤통수치려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
장승일 실장은 아예 최문경 부회장을 무시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기획 조정실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구길모 차장이 그 모습을 보다가 뒤늦게 이야기를 꺼냈다.
“최 실장님이 우리를 속인 것일까요?”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최 실장님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내키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아예 입을 열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야기 판매 실적을 토대로 메신저 시장을 분석해 보면, 메신저 시장은 미래가 없습니다.”
“최 실장님 생각은 다르겠지.”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차창 쪽으로 걸어갔다.
“잘 생각을 해봐. MP3 원천기술을 사 모으는 시절 말이야. 그때는 누가 최 실장님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어? 지금 봐. 다들 난리잖아. MP3 로열티 뉴스는 아직도 끊이지 않아. 시사 패널에 가면 계속 이 이야기만 하고 있어. 그 관점에서 보면 메신저 시장이라고 다를 것 같지가 않아. 다만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할 뿐이지!”
“…하긴.”
구길모 차장 역시 뒤늦게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막상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 최민혁 실장이 하고자 하는 서비스에도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메신저 시장의 미래를 도저히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 * *
“도통 모르겠군.”
최문경 부회장은 부회장실에서 담배까지 베어 문 채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권재홍 비서실장은 유심히 장승일 실장이 만든 기획안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너무 많이 당해서 이번 일도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라고 해도 보고안을 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도스 환경하에 있는 채팅 프로그램이라는 틀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인터넷 채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도 이 서비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이와 유사한 일을 수십 차례나 경험했다. 그때는 항상 넘어갔다가 뒤에 가서 뒷북을 쳤다.
혹시나 싶어서 이번에는 장승일 실장을 미국에 보냈는데, 달라진 것은 없었다.
“권 실장, 혹시 뭐 떠오르는 것이 있어?”
권재홍 비서실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저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비서실 직원들에게 하던 일을 중지시켜서 이 일을 분석시켰습니다만 단 하나도 긍정적인 면이 없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다시 의심을 싹을 틔웠다.
“가만, 그럼 이번 일은 혹시 민혁 그놈이 만든 떡밥이 아닐까?”
“네?”
“왜, 그렇잖아. 장 실장이 직접 우리 회장님 지시를 받고 미국에 갔잖아. 그놈도 아버지 이야기는 무시하지 못할 테니, 대충 돌려서 이야기한 거야. 미끼를 물면 좋고, 아니면 아니어도 상관은 없잖아.”
“전 생각이 다릅니다. 최 실장님이 굳이 회장님에게 그럴 이유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냥 입을 다물고 말죠. 이제까지 그래 왔습니다.”
“아니, 내가 있잖아. 이번 일은 내가 강제로 지시한 것이니까. 그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날 노려서 이번 일을 꾸몄을 수도 있어!”
“장승일 실장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말씀입니까?”
“민혁이 그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않을까?”
“…흠.”
권재홍 비서실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막 나가도 그렇게까지 행동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의 지적도 그럴듯했다. 확실히 이번 일은 이전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KM 그룹의 실세인 장승일 실장을 직접 미국에 보냈지 않는가.
최민혁도 이걸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제가 이해하지 못한 건 이 사업안은 어차피 그룹 내에서도 이야기가 돌 거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최민혁 실장의 평판에 좋을 것이 없을 텐데요. 스폰녀 사태보다 이게 더 나쁠 겁니다.”
“그렇지. 맞아. 사실 그게 문제지.”
최문경 부회장 역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야기와 관련해서 사전 조사한 자료를 다시 읽어보았다.
다급하게 만들어진 것은 이야기와 관련된 채팅 서비스 분야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미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알 수가 없군. 도대체 이놈의 꿍꿍이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
권재홍 비서실장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뭔가 하고 싶어도 뭘 할 수가 없었다. 뭘 알아야 손이라도 대볼 텐데 짐작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진짜 답답하네.’
* * *
메신저 서비스의 미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가 않았다.
다만 이 채팅 서비스와 융합한 서비스의 미래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이 미래에 대해서는 가치를 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이지수 박사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다만 그녀는 자기 연구 분야인 인공지능 분야에 좀 더 초점을 뒀을 뿐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다시 메신저 서비스만 놓고 곰곰이 고민해 보고서야 조금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인공지능을 사이드로 둔다면 의외로 적용할 수 있는 분야는 많았다.
당장 POWWOK에 담겨 있는 발전된 개념이 그것이다.
물론 그녀도 얼마든지 POWWOK에 들어간 기술을 고안할 수는 있다.
다만 특허가 문제였다.
그녀는 그것과 더불어 ICQ에 담겨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두 가지를 합치면 꽤 그럴듯하다.
아니, 여기서 끝낼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인공지능 연구를 하면서 쌓은 내공이 있으니까.
그 응용 기술을 일부 가져온다면 꽤 그럴듯한 아이템이 나온다.
‘일테면 음성 인식, 음성 합성,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잖아?’
자신의 연구를 일부 축소한 셈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얼핏 보기에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보다는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꼭 그렇게 단정하기는 힘들다.
만약 유저 샘플 숫자가 늘어난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여기까지 볼까에 대해 의심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헬렌에게 연락해서 부랴부랴 최민혁 실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최민혁 실장은 아직 캘리포니아에 있었다.
“이지수 박사입니다.”
“최민혁입니다.”
최민혁은 갑자기 찾아온 이지수 박사의 방문에 크게 당황했다. 물론 그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지수 박사 역시 외모만 놓고 보면, 헬렌과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왕벌.
헬렌보다는 뭔가 나아도 나았다.
주변을 휘어잡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강준석 팀장은 특히 큰 충격을 받아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며칠 사이에 동양 미인과 서양 미인을 동시에 접했기 때문이다.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이미 잊은 지가 오래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이런 산만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이지수 박사와 처음 만난 이 자리는 가능하면 좋게 보내고 싶었다.
“결심은 하셨습니까?”
이지수 박사는 슬쩍 자기 생각을 한번 꺼내봤다.
“혹시 메신저 서비스를 시작으로 해서 음성 인식 기반 인공지능을 염두에 두신 겁니까?”
“글쎄요.”
최민혁은 씩 웃고 말았다. 그녀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정확히 그는 인생 1회 차에서 이지수 박사가 저 인공지능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내 정치 알력 싸움에 밀려서 결국 퇴출당했지만 말이야.’
인종차별적인 문제도 있다.
이지수 박사가 천재이기는 하지만 시기도 많이 받았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았고 말이다.
그녀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녀도 당시 지치기도 했었다.
그녀가 굳이 한국을 선택한 이유였다.
자신의 운명까지는 잘 모르는 이지수 박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무엇이 최민혁의 진심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눈빛만으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솔직히 전 최 실장님의 제안이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 알고 싶어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저에게 물어보시면 안 되죠. 모든 것은 이 박사님이 하기 나름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연구는 이 박사님의 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제가 투자를 하더라도 일정 지분 이상을 요구하기는 힘듭니다.”
“설마 자금만 대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박사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울 겁니다. 다만 다른 투자와는 달리 소극적인 형태가 될 겁니다.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이 박사님입니다. 그러니 이 박사님의 지분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지수 박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크게 당황했다.
“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최민혁은 당혹스러워하는 이지수 박사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옆에 동행한 헬렌은 그저 자신과 이지수 박사만을 교대로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지수 박사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역시 기반이겠죠. 이왕이면 시간을 줄여야 하니, POWWOW와 ICQ면 되겠습니까?”
“설마 그 회사를 인수하란 말인가요?”
“굳이 특허 가지고 나중에 싸울 이유는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