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
‘그래도 메신저 서비스 법인이 설립되면, 모건 스탠리 쪽에 정보는 들어가겠지. 이지수 박사나 헬렌 소식도 곧 따라 흘러갈 테고. 일단은 그게 중요해.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남은 것은 과연 우리 이지수 박사가 어느 정도 능력을 발휘할까 하는 문제지.’
이지수 박사와 손을 잡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 자신에 대한 음모론을 희석시키고도 남으니까.
더욱이 다른 업체와의 초 격차를 유지하려면 다른 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기술 영역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인공지능은 딱 그 지향점으로 나쁘지 않았다.
* * *
이지수 박사는 헬렌이 가져온 제안서를 들고는 일단 인공지능 팀 연구원들을 다들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브레인스토밍에 들어갔다.
그런데 반응은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와, 최민혁 실장님이 우리에게 투자한다는 말입니까?]
[설마 구골처럼 우리도 검색엔진을 개발하는 겁니까?]
[인터넷 메신저라.]
그들이 특히 관심을 둔 것은 바로 ICQ였다.
“…ICQ도 나쁘지 않잖아?”
“나도 골드핑그가 와서 이야기할 때 봤는데,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었어.”
“글쎄, 지금 POWWOW 사용자를 봐서는 미래가 불투명하잖아.”
POWWOW는 존 맥아피에 의해서 설립된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초의 메신저 프로그램이었다.
다양한 개념이 탑재된 이 프로그램은 웹서핑까지 동시에 할 수 있다.
다만 사용자가 너무 없었다. 지금은 대안으로 OEM 방식을 검토 중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도 신통하지는 않았다. 상대 기업 측에서도 계속 태클을 걸어댔다.
즉, 지금은 너무 앞서 나간 프로그램이었다.
이지수 박사 역시 POWWOW와 ICQ에 대해서 검토한 기억을 떠올렸다. 두 가지 프로그램과 인공지능을 결합하면 시너지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채팅 프로그램에서 화자 상대편이 인공지능이라면 응용할 곳은 많아지니까.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인공지능 인프라를 축적할 수가 있어. 차라리 그런 데이터를 우선적으로 모아서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것은 어떨까?’
인공지능은 곧 사고.
화자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모델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필요한 코어 데이터도 모을 수가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다면 지금과 같은 연구처럼 방향이 마냥 추상적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사용자가 너무 없다는 점이다.
POWWOW조차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ICQ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최 실장은 왜 이런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일까?’
이지수 박사 역시 최민혁 실장의 명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는 더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녀가 가진 MPEG4 비디오 특허 원천기술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 박사 학위 시절에 MPEG4 표준화 작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MP3 표준화는 여력이 되지 않아서 그저 보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MP3 관련 원천기술이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얼마나 황당하던지.’
이지수 박사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최민혁 실장을 이상하게 생각해도 믿지 않았다. 한국 내의 최민혁 실장의 스캔들에 그저 웃기만 했다.
그건 헬렌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MP3 원천 기술을 가지고 지금 한 결과를 본다면 지금 제안한 이 계획 역시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그게 뭐라고 생각해?”
“차세대 메신저 프로그램?”
그녀는 천재 공학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하지만 경영 부분에 관해서는 초짜다. 아니, 아예 모른다는 것이 정확했다.
“그게 가능성이 있을까?”
“나야 모르지. 다만 인공지능 아바타가 나오는 메신저 세상이라면 꽤 멋지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진행하는 연구를 매듭짓기에도 좋잖아. 다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없으니, 차라리 우리가 만들어서 응용해도 되잖아. 그리고 이건 지수 네가 제안한 계획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렇지.”
이지수 박사도 순순히 인정했다. 다만 이 일을 진행하려면 지금 인력으로는 부족했다. 자금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이런저런 리스크 때문에 고민만 하다가 결국 접어버렸다.
언제까지 순수 연구에 자금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기업의 투자 제안도 있었지만, 그 제안을 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금만 대고, 과실만 빼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 힌트를 줬다.
“헬렌, 네 생각은 어때? 최민혁 실장이 굳이 POWWOW, ICQ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회사를 인수하란 뜻인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 걔들이 가지고 있는 특허가 나중에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까.”
이지수 박사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런데 만약 두 회사를 인수한 후에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참조한다면 꽤 그럴듯한 미래가 펼쳐질 것 같았다.
그녀도 솔직히 이 메신저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잘 보면, 이것 역시 뭔가 노림수가 있다.
‘그게 가치가 있다는 뜻일까?’
자기 연구를 잠시 멈추어둬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지금도 시간 낭비만 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회의에 참석한 연구원 중에 반론을 제시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이 연구 방향을 좀 바꾸고 싶었지만 차마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작년부터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손을 들어준다면 지금 연구를 정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한 가지를 결론 내렸다.
“성급하게 지금 결정할 수는 없잖아. 최소한 이번 주까지는 다들 한번 생각을 해봐. 자신의 미래가 걸린 결정이니까. 지도교수님에게는 내가 말해둘 테니까.”
“…알았어.”
다른 연구원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헬렌이나 이지수 박사가 마음을 바꿀까 오히려 그것을 더 염려했다.
* * *
최민혁은 이지수 박사에게서 바로 연락이 없자 느긋하게 기다렸다.
송도연 문제는 어차피 예행연습 초반 단계라 자신이 나설 이유가 없다.
어느 정도 일이 성숙했을 때 나서면 되니까.
그래서 시간을 넉넉히 두고 미국에 온 것이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장승일 실장 일행을 지켜봤다.
이들은 벨린 소프트와 구골 본사를 방문했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미 일이 끝난 구골에는 관심이 없었다.
야후의 나스닥 상장 분위기만 봐도 구골 검색기의 미래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아직 개발 단계라서 정신이 없지만, 결과도 오래지 않아 나올 것이다. 구골에 입사한 인재 숫자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메신저 프로그램의 미래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냥 메신저 관련 정보를 흘린 게 아니다.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 이미 있으니까. 이야기를 조사해 보면, 아마 별 재미를 못 느낄 거야.’
그랬다.
최민혁 자신이 자기 노하우를 풀었다고 말했지만 정작 이 채팅 서비스 분야의 현재는 정말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만 조사해 보면 알 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용욱 회장이 이 틀을 깰 것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흥미롭군. 이건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
* * *
장승일 실장은 더 있어봐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곧 기획 조정실 인원을 모두 불러 모아서 메신저 서비스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인재를 불러 모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일단 급한 대로 최용욱 회장에게 보고했다.
“…장 실장, 결국 민혁이 그 녀석이 꾸미는 일을 모르겠다는 뜻이잖아?”
“죄송합니다.”
최용욱 회장도 화가 났다. 그는 손자 최민혁이 왜 자신에게도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의 태도를 봐서는 최민혁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최민혁이 뭘 그리는지, 그게 알고 싶었다.
“아, 그런 소리는 하지 좀 마!”
“죄…….”
장승일 실장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최민혁이 야속하기만 했다. 최민혁은 충분히 말해줄 수 있는 여건하에서도 말을 빙빙 돌렸다.
‘차라리 말하지나 말든지.’
이전에 입을 꾹 다물 때는 최민혁 실장을 잘 이해 못 했다.
그런데 막상 내용 일부를 듣고서야 최민혁 실장이 말을 하든, 하지 않든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이번 일만큼은 그저 두고만 보지 않았다.
“그룹 내의 차장급 이상 실무진을 모두 불러 모아서 회의를 개최해!”
“…알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도 요즘 야후 나스닥 상장 예정 소식을 듣고는 인터넷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물론 조카 최민혁이 구골을 설립했다는 소식 때문에 무리수를 둔 셈이었다.
다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인터넷을 조사하자 이 아이템의 미래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인터넷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는 말이 많았다.
그런 차에 장승일 실장이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와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를 주관한 이는 놀랍게도 최용욱 회장이었다.
최문경 회장은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노골적인 회의라면 최민혁 그놈의 꼼수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이 주도한 회의의 주제는 뜬금없는 인터넷 채팅이었다.
인터넷 삐삐라고 해야 할까.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
옆에 같이 자리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침묵했다. 그는 사전에 자료를 받아서 확인했는데, 회의의 주제가 고작 1:1 채팅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은 PC 통신에 가면 가끔 올라온다.
재미 삼아서 이를 사용하는 이는 있는데, 아는 이는 많지가 않았다.
서로 기호가 맞는 이들끼리 사용하는 정도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앞자리에 앉은 최용욱 회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채 이 인터넷 메신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안에 그 가치를 아는 이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동호회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방방송.
[아, 이야기 말하는 건가?]
이야기 프로그램은 80년 말에 나온 프로그램으로 지금도 DOS하에서는 독보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소위 말하는 PC 통신을 해본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딱 그뿐이다.
이야기 프로그램으로 큰 수익이 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대상이 에플 대주주이자 KM 전자 오너인 최민혁 실장이 손을 대기에는 너무 덩치가 작았다.
이야기 관련 내용이 나오자 회의는 점점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PC 통신 이야기가 나온 후에 왜 이 프로그램을 지금 KM 그룹 회의에서 아예 단 하나의 소재로 집중적으로 토로하는지 아무도 영문을 몰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당황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장 실장, 저놈은 왜 저래?”
권재홍 비서실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PC 통신 프로그램인 이야기를 써 본 이라면 채팅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 유료화 이후에 매출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사실 2년 전에 유료화된 이야기는 처음과는 달리 상황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각종 기능이 추가되면서 너무 덩치가 무거워진 것이 컸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윈도우95가 출시된 이후에 이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스에서 윈도우 환경으로 넘어가는 시류를 잘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이야기의 우여곡절 문제는 곧 채팅 프로그램의 미래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이번 미팅에 참여한 실무진은 시간이 갈수록 장승일 실장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런 회의를 해야 하나 의아할 뿐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찼다.
‘저 인간이 대체 왜 저래? 내가 겁박했다고 정신이 나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