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
헬렌은 힐끗 최민혁 실장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강력한 카리스마에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의 평판을 보면, 나름 괜찮은 제안이다.
한데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들까.
“…이 박사님과 같이 지도교수님에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존 프로젝트 정리부터 시작해서 정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요.”
“좋네요. 혹시 손실이 크면 제가 그것까지 보상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헬렌과 헤어지기 전에 염두에 둔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혹시 ICQ라고 들어봤습니까?”
그녀는 깜짝 놀랐다.
“네. 아, 그런데 최 실장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세요? 거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하하하, 그런가요?”
웃기만 하는 최민혁 실장.
하지만 헬렌의 반응은 당연하다.
아직 ICQ가 서비스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인생 1회 차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에나 가능하지. 아이디어 자체는 어렵지 않았고, 구현도 불과 6개월 정도 걸렸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역시 펀딩이다.
아직은 인터넷 채팅에 대한 개념이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 최초 채팅 프로그램인 POWWOW조차 이제 사용자가 고작 6만 명 내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헬렌이 ICQ에 대해서 아는 이유는 이지수 박사가 인공지능을 적용할 응용프로그램으로 이 ICQ를 검토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구현된 ICQ는 아직 아이디어 단계라서 적용이 쉽지 않았다.
이지수 박사는 과거 이 ICQ 응용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했다. 그녀에게는 꽤 괜찮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인생 1회 차에서 그 사실을 들었던 최민혁 실장은 다행히 그 기억을 잊지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그녀의 조언은 결코 간단한 의미가 아니었다.
“POWWOW는 많은 면에서 메신저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ICQ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아, ICQ 정보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군요. 아시다시피 구골 투자 이후에 이쪽저쪽에서 투자 요청이 제법 들어옵니다. 그 정보 중의 하나가 바로 ICQ입니다.”
“아, 안 그래도 ICQ 사업을 고민하는 골드핑그가 투자자를 찾던데, 최민혁 실장님에게도 요청했나 보군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러 곳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 그 골드핑그란 친구는 저에 대해서 모를 겁니다.”
“…그렇구나.”
헬렌은 그저 묵묵히 수긍했다. 최민혁의 변명에 딱히 딴지를 걸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ICQ나 POWWOW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세요. 혹시 이들이 가진 특허가 중요할지 모르니까요. 필요하다면 이들을 인수할 수도 있습니다.”
“…네.”
헬렌은 전혀 생각도 못 한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민혁은 덕분에 헬렌과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눈 후에 헤어졌다. 이번 일은 이지수 박사가 자기 프로젝트를 접고 다른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굳이 무리하게 압박할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 시기라면 그녀도 이미 갈등하고 있을 테니까.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야. 굳이 달달한 제안을 해서 의혹을 살 필요는 없지.’
헬렌은 최민혁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해 보고 싶었지만, 곧 자리를 떠났다.
* * *
실리콘 밸리의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자본도 자본이지만 방향성 자체가 중요했다.
거기에 평판은 빼놓기 어렵다.
때문에 우수한 인재와 적절하게 손을 잡기는 쉽지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최민혁 실장이 헬렌을 상대로 보여준 협상 모습은 모범 답안에 가까웠다.
외모가 아닌 비즈니스만으로 관계 설정을 잘한 것도 무시하기 어렵다.
“어떻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최민혁의 의도를 알지만 정작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최민혁의 말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문화적인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헬렌 같은 여자가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반한 것은 신기했다.
외견상 그렇다는 이야기다.
헬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최민혁을 상대할때의 태도는 누가 봐도 달랐다.
더욱이 이 자리는 두 번째 만남이었으니까.
최민혁은 첫 만남과는 달리 이번에는 사업적인 분위기를 잘 유지했다.
하지만 그게 또 좋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최 실장님의 여자 후리기 스킬이 만렙이라는 것이겠지.’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
최민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의 시선에 담겨 있는 존경의 의미를 읽고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를 않겠어. ICQ란 말을 꺼내도 잘 모르네. 하긴 지금 이 시기에 POWWOW나 ICQ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사용자가 고작 6만 명 남짓 인데, 그걸로 써먹을 곳도 없다.
특히 ICQ는 이제 막 프로그래밍 단계로 정해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골드핑그는 나름 자기 신념대로 열심히 이 일에 매달렸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지쳤다. 그는 솔직히 실리콘밸리 오피스텔에서 동료와 같이 죽어라 코딩만 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거기에 펀딩 때문에 이리저리 투자자를 만나러 다녀도 좋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래밍도 문제지만 설사 그 일이 끝나도 미래가 불투명했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는 장승일 실장 일행은 다들 입을 쿡 다물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뭘 계획하는지, 심지어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당장 ICQ만 해도 2년 후에는 무려 5억 달러에 매각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다.
최민혁은 힌트를 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반응에 그저 웃기만 했다.
‘장 실장은 좀 다를 거로 생각했는데,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 아니면 문제가 어려운 건가?’
그는 숟가락을 떠서 장 실장 입에 직접 떠먹여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이번 일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 헬렌이란 분과는 이미 아는 사이입니까?”
최민혁은 반사적으로 쓰리썸 추억을 떠올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의 강한 부정에서 긍정의 맛을 느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이름을 아신 겁니까?”
“그거야 프로필을 봤죠.”
그는 힐끗 강준석 팀장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헬렌에 대한 인상에서 정신 차리지 못한 강준석 팀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는 주섬주섬 헬렌과 관련된 서류를 꺼냈다.
“아, 사전에 관리하던 분이라서 대충 이력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실제로 내놓은 것은 헬렌, 이지수 박사가 속한 팀의 프로필이다. 이들이 연구하는 분야는 바로 인공지능이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메신저 서비스가 얼핏 봐서는 두 사람끼리의 소통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VOIP, 음성 합성기 영역을 포함해서 서비스 영역이 넓어지면, 좀 달라집니다. 음성 인식이 자연스럽게 필요해지고, 그럼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이 요구될 겁니다.”
음성 인식 부분은 지금으로선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이다.
그저 최민혁 실장 자신이 굳이 인공지능을 결부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다.
요는 이랬다.
앞으로 나온 모바일 서비스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합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특히 시스템 자원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기법이 필요했다.
인공지능은 그다음 문제다.
“사실 유저에 대응하는 인공지능 기능을 무시하기는 어렵죠. 헬렌이 굳이 ICQ에 관심을 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최민혁은 ICQ를 빌미 삼아서 자기 주장을 피력했다.
“접속자 숫자가 증가하는 경우에는 데이터베이스를 따로 관리해야 합니다. 여기에 따른 서버 설계도 필요한 셈입니다.”
이런 부분은 어느 정도 주먹구구식으로 설계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전체 시스템 효율과 관련된 부분은 따로 기술이 필요했다.
“이 정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헬렌이나 이지수 박사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장승일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실 모바일 메신저라는 개념은 이 자리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문득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을 계속 고민해 봤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이 서비스의 미래가 정확히 어떤지 알 방법이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직접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구골의 경우를 봐서는 이 사업 미래 역시 뭔가 있을 것이다. 이전에 최민혁 실장이 늘 했던 다른 사업처럼 말이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구골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했다는 말이구나.’
“그런데 메신저 서비스와 관련된 원천기술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저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기술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필요한 인재를 알아봐야죠. 헬렌과 이지수 박사라면 제가 원한 바를 충분히 이룰 겁니다.”
“…정형화된 답은 없다는 말씀이군요.”
최민혁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장 실장님이 아는 것처럼 세상일이 다 뜻대로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나씩 풀어서 답을 찾는 거죠.”
“…네.”
장승일 실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가 최용욱 회장이나 최문경 부회장의 압박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이 이전처럼 입을 다물지 않을까 염려했다.
다행히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마치 KM 그룹을 상대로 PR을 하듯이 쉽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자신은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솔직히 이 사업이 의미가 있을까?’
당연하다.
지금 메신저 서비스 사용자는 고작 7만이 채 안 된다.
이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최용욱 회장에게 뭔가 보고를 해야 하는데, 영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뭔가 따로 특별한 기술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저 가능성이 높은 인재와 같이 손잡고 일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구골은 결과가 좀 빨리 나왔고 말이다.
‘이러면 KM 그룹 내의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것과 다른 게 뭐지?’
다른 것이 없다.
다만 그도 한 가지를 묻고 싶었다.
“참 송도연 씨는 이 자리에 없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도연이는 에플 쪽 이벤트 리허설 준비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에 미리 보냈습니다.”
“아, 그렇군요.”
“설마 장 실장님은 그 공연을 보려고 여기 오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더 궁금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순간 고민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정말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 자리는 아마도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질문하려니, 질문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문제는 그 답변이 지금 최민혁 실장이 한 대답과 다를 것 같지가 않았다.
과거보다는 한결 친절한 답변이지만 그렇게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젠장, 결국 다를 바가 없잖아!’
최민혁은 그런 장승일 실장의 심정을 짐작한 것 같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쉽게 될 일이었다면 왜 다들 고민합니까. 제가 쉽게 일을 풀어간다고 생각하면, 그 반대로 많은 번민과 고민을 한 결과입니다.”
“…네.”
‘노오력하세요’의 뜻을 빙빙 돌려서 하는 말을 들은 장승일 실장은 더 이상 질문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도 메신저 서비스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게 그렇게 의미가 있나?’
그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메신저 서비스의 원래 시작은 4년이 지난 후에 시작되니까. 모바일 서비스는 거기서 다시 4년이 더 지나 스마트폰이 나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머리 시계 속에서는 이미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 출시 시간을 언제로 해야 할지를 고민 중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스승인 이지수 박사의 역량이 어떨지 아주 궁금했다. 그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