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설마 오성 그룹이 자기 첫사랑까지 이용해서 공격할지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역시 미국에 와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여자도 소위 예쁘다는 미인을 자주 봤다.
고작 서아은의 미인계에 놀아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건 몰라.’
“실망이다.”
서아은은 강준석 팀장의 눈빛이 바뀌자 잔뜩 굳었지만, 오히려 겉으로는 크게 반발했다.
“무,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난 오빠가 미국에 와 있다는 소리 듣고 기뻐서 이렇게 이 자리에 뛰어왔어. 그런 날 이상한 여자 취급하는 거야? 이건 정말 아니잖아!!!”
하지만 강준석 팀장은 우유부단하던 대학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KM 전자에 들어온 이후에 최민혁 실장에 의해 무진장 구르면서 과거의 그 모습을 탈피했다.
“구골에 대해서 정보를 얻으려고 이 자리에 온 것 맞지?”
서아은은 차가운 강준석 팀장의 말에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강준석 팀장은 그제야 정신을 완전히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깐 눈치를 보는 서아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제야 볼 수가 있었다.
서아은의 진짜 모습을.
대학 시절에는 첫사랑에 집착해서 겉만 봤는데, 지금은 내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서아은이 그렇게 추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확실히 자신의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최민혁 실장을 만난 이후에 밑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했다.
솔직히 아쉬움만 남았다.
역시 많은 이들이 하는 말처럼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둬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 하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너에게 미련이 아직 남아서 미국행을 택한 건 맞는 거 같다. 미국에 있으면, 한 번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싶었어. 만나서 잘되면 좋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만남이 이런 것 인 줄은 몰랐다.”
“오, 오빠.”
“서로 추해지기 전에 딱 여기까지만 하자. 만나서 반가웠고, 나머지는 추억으로 기억하자. 나, 이만 간다.”
그는 때마침 걸려온 최민혁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구골 이후에 검토해야 할 관련 회사 자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연락한 것이다.
[최 실장님, 알겠습니다. 바로 검토해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네?]
최민혁은 좀 뜬금없는 이야기에 영문을 몰랐지만, 곧 전화를 끊었다.
강준석 팀장은 뒤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서아은에게 의도적으로 자신이 끌고 온 F50 페라리를 보여주듯 몰고는 휑하니 사라지고 말았다.
“…….”
서아은 대리는 모멸감에 입술을 깨물고는 방방 뛰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스스로 잘 안 것이었다.
‘강준석 저 새끼가!’
하지만 그녀는 뒤늦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조금 전에 한 전화 통화 중에 ‘최 실장’의 이름이 나왔다. 강준석이 실제로 억만장자로 소문이 자자한 최민혁 실장의 측근이라는 이야기다.
그건 그가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저 정도면 딱 자신이 그리는 이상형이었다.
믿을 만한 것은 덤이고 말이다.
그녀가 대학 시절에 굳이 강준석을 관리한 이유도 바로 신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놓친 물고기가 너무도 커 보였다.
‘하, 너무 서둘렀나.’
* * *
미인계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최민혁도 뒤늦게 공식 루트를 통해서 강준석 팀장이 오성 그룹의 미인계에 넘어갈 뻔했다는 보고를 듣고는 웃고 말았다.
‘설마 첫사랑을 보낼 줄이야.’
오성 그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회사로 유명하긴 했다.
웬일로 이제까지 조용하나 싶었는데, 지금부터는 아닌 것 같았다.
특히 미래 기술의 차세대 배터리, 구골의 검색엔진을 보고 나서는 오성 그룹도 눈이 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최민혁은 문득 보복해야 할까 고민했다. 미인계에는 역시 미인계가 좋으니까. 그런데 오성 그룹 인력 중에는 닥히 빼 올 만한 이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실력이 괜찮은 이는 많지만, 자신이 신뢰할 만한 이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차라리 제대로 검증된 강준석 팀장 같은 사람 한 명이 낫지. 괜히 무리수를 두다가 뒤통수 맞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나아.’
그는 한편으로 권태성 실장이 이제까지 이런 행보를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오성 그룹 내부에 무슨 변화라도 있나? 하긴 안 회장도 이제는 뒷짐 지고 구경만 하지 않겠지. 할아버지를 아무리 물고 늘어져도 얻는 것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렇다고 날 직접 만나기에는 어려울 거고.’
차라리 안재운 전무가 오히려 자신과 격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안재운 전무가 굳이 미국까지 와서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최민혁은 한편으로 역시 강준석 팀장이라고 생각했다. 전생 1회 차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과 지금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니까. 그게 나쁜 모습이든, 아니면 좋은 모습이든.’
그는 굳이 오성 그룹을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사태를 부추긴 것도 나잖아. 목표는 모건 스탠리이긴 하지만 걔들보다는 아무래도 오성 그룹이 날 오랜 기간 지켜봤으니, 더 빠른 반응을 보인 거지.’
더욱이 앞으로 오성 그룹은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이전처럼 소극적일 수는 없다.
걸려 있는 판돈이 조 단위이니까.
다양한 공작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약점을 노려올 것이다.
오성 그룹이 굳이 구골 법인에 관해서 관심을 드러낸 것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구골의 강점은 역시나 야후 검색엔진의 취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회사 지분 80%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 자신이라는 거다.
브린과 페이지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지분 10% 중에서 단 1%도 팔지 않으려고 했다.
지분 10%를 매입한 세쿼아 캐피탈은 더 논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가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지분을 이 가격에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벤처 캐피탈은 미친 듯이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
최민혁도 자신이 원한 그림대로 일이 풀려가는 것을 깨달았다.
‘세쿼아 캐피탈에 떡밥을 던져놓은 게 열심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지. 오성 그룹이 저렇게 달려드는 것을 봐서는 일을 잘한다는 뜻이고.’
최민혁이 세쿼아 캐피탈에 넘긴 지분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 누가 되어도 서로 협상만 잘되면 지분 매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오성 그룹도 아마 이 미끼를 물 것이다.
‘보복은 그때 가서 해도 되니까.’
지금은 모건 스탠리 쪽에 집중하여 계속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모건 스탠리 쪽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구골 약발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아니면 헤지펀드 얘들이 겁먹은 걸까?’
둘 다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예 자신이 미친 척하고, 에플 주식 가지고 장난질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과연 태국 바트화 작업이 성공할까.
‘다 실패하겠군.’
태국 바트화 사태는 처음에는 플랜대로 잘 흘러가지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말은 헤지펀드도 아직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연결 고리도 없는 최민혁 실장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최민혁 자신이라도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계속 자극을 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속마음을 잘 모른 채 그저 굳은 얼굴을 보자 오성 그룹의 미인계를 슬그머니 이야기했다.
“오성이 개인 생활 정보를 이용해서 이렇게 집요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자칫 우리가 알면 최악의 상황이 생긴다는 것도 감수하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마음을 굳히고는 피식 웃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마 제가 안 회장 입장이라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겁니다. 문제가 되면 협상에서 이익을 더 주면 되니까. 2조 매각 대금을 내놓나, 2조 2천억을 내놓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구골 검색엔진이 그렇게 미래 가치가 높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건 조 팀장님이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저도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첫사랑까지 동원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 추억을 흙탕물로 만드는 잔악한 짓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최 실장님의 첫사랑을 이용해서 미인계를 쓴다고, 만약 당한 입장이라면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흠.”
뭐, 최민혁 자기 입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자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또 아니었다.
최민혁은 문득 자기 첫사랑을 떠올렸다. 다름 아닌 이지수 박사였다.
‘아니, 지금쯤이면 박사 학위를 땄으려나? 지금쯤이면 연구하는 아이템이 아마 AI던가?’
인공지능 분야는 결코 쉬운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이지수 박사가 똑똑하다고 해도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이지수 박사는 이 관문을 극복하기 위해서 틈틈이 인공지능과 관련이 있는 많은 분야를 파헤쳤다. 거기에는 모바일을 비롯한 칩 설계를 망라한 분야도 포함된다.
그녀가 최민혁 실장에게 가르친 모든 것은 박사 학위 과정에서 얻은 지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었다.
강준석 팀장의 첫사랑 이야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리 이지수 박사의 얼굴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문득 지금 자신의 인생 2회 차가 1회 차와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마트폰만 해도 벌써 10년 가까이 당겼으니까. 가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고민하고서야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걸 인식했다.
MP3 산업은 이미 인생 1회 차와는 너무 달라져서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졌다.
‘모바일 메신저가 당장 문제가 되는구나. 아니, 그 분야는 아직 시간이 있어. 하지만 인터넷 메신저는 이야기가 좀 달라.’
조성돈 팀장은 갑자기 최민혁 실장이 침묵하자 눈치만 봤다.
“저기 실장님, 제 말은 최 실장님 첫사랑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잠깐만요.”
그는 손을 들어서 조성돈 팀장의 입을 막았다. 저 얘기보단 당장 급하게 처리할 일이 문제였다. 보통은 원 개발자에게 일을 맡겼겠지만, 모바일 서비스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정확히는 개발하기는 해야 해. 그래야 스마트폰 시장이 제대로 펼쳐질 테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타이밍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건 스탠리나 아니면 그와 손잡고 있는 헤지펀드의 똥줄이 타게 하여야 하니까.
‘다만 메신저의 가치를 이들이 알까? 아니구나. 알게 만들면 되지. 다만 이건 구골 검색엔진과는 달라. 굳이 구체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이지수는 파트너로 나쁜 대상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 이영민의 유언을 따랐다고 하지만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뭐, 이보다는 최민혁 자신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다만 미래가 바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참았는데, 이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미래 변화는 이제 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참, 장 실장님은 언제 도착합니까?”
“오늘 오후에 도착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요? 이곳 텍사스행 비행기라고 했죠?”
“네.”
“잘되었네요. 그러면 캘리포니아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내일쯤이면 볼 수 있겠군요. 우리 역시 오늘 비행기로 캘리포니아로 갑시다.”
“…바로 말입니까?”
“네, 그리고 강준석 팀장에게 전화해서 이 두 사람 상황을 한번 알아보고, 약속을 좀 잡아보라 하세요. ‘메신저 서비스’ 관련 아이템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서 보낼 테니, 그것으로 두 사람과 이야기하면 될 겁니다. 아마 강준석 팀장 명성도 있고 하니,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안재운 전무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정신없으니, 그냥 바쁘다고 하세요. 저 진짜 피곤합니다. 에플 이벤트 일정이 그렇게 넉넉한 편도 아닙니다. 도연이를 먼저 보내서 연습시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네.”
그는 안재운 전무를 완전히 내팽개친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 그저 웃고 말았다.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