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57화 (657/1,021)

#657.

권태성 기획실장은 조인용 비서실장에게 특별한 법인 카드까지 받은 후에 조심스럽게 서재를 나섰다. 그로서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서재를 나선 후에, 안건민 회장의 저택 문을 나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구골 때문이구나.’

이번 구골 문제는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오성 황태자 안재운 전무가 입만 열면 하는 소리가 오성 그룹의 미래 청사진은 IT 기업이라고 떠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재운 전무의 이야기는 늘 입만 나불거리는 걸로 끝났다.

실제로 실리콘 밸리 쪽에 기웃거려서 나온 결과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좀 달랐다. 그는 안재운 전무가 그리는 꿈을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시작이 바로 검색엔진 구골 설립이었다.

‘하, 회장님도 혼란스럽기는 하겠어.’

그는 곧 KM 전자 출신인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로 나오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비행기 예약은 수행원을 고려해서 모두 다섯 석이었다.

‘능력이 좀 답답한 친구들이지만 그래도 KM 전자 출신이니 어쩔 수가 없지. 가는 동안 구골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봐야겠어.’

* * *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은 갑작스러운 지시를 받고는 부랴부랴 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영문을 잘 알 수가 없었다.

권태성 실장은 결코 무리수를 둘 사람이 아니었다.

“권 실장님, 갑자기 웬 해외 출장입니까?”

그는 쓰게 웃었다.

“윗선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만 알아.”

“윗선이라면 정확히 어디를…….”

“최고 윗선.”

“설마…….”

“그래. 이제는 실적 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어. 뭐 당분간의 이야기겠지만, 앞으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해.”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신중하던 권태성 실장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안건민 회장이 밀어주는데, 굳이 꼰대처럼 놀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이제 자신의 손발이 되어서 움직일 것이다.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제는 날아가는 비행기에 올라 탔다.

중간에 내리는 순간에 죽는다.

그렇다면 목적지인 공항까지 미친 듯이 내달려야 했다.

그는 구골 설립과 안재운 전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특히 미국 내에서 최민혁 실장이 이미 사전 정지 작업으로 깔아놓은 부분에 대해서다.

“……!”

임권수 부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조기 승진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욱이 KM 그룹에 있을 때부터 잔술수를 많이 굴렸다. 그리고 그도 오성 그룹이 실리콘 밸리에 투자해서 실패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결국 이번 일은 강준석 팀장이란 그 친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군요.”

“그건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 친구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내막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비즈니스 좌석에 앉은 임권수 부장은 그제야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자기 위치 때문에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제가 확인한 바로 실리콘 밸리 쪽에도 이미 오성 그룹 사람이 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긴 한데, 큰 의미가 없어.”

“맞습니다. 지금 친구들이라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준석 팀장, 그 친구와 관련이 있는 이라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권태성 실장은 좌석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으려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계속해 봐.”

“저도 최근에 최민혁 실장이 손을 쓴 이들을 조사했습니다. 강준석 팀장도 그런 친구 중의 하나인데, 그 친구는 대학 시절에도 별다른 능력이 없어서 무시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혹시 몰라서 후배인 박진한이란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LC 전자에 합격한 박진한이 강준석 팀장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간과하기 힘든 내용도 있었다.

“여자 친구?”

“전 여자 친구입니다. 그것도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까지 통과한 미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전략 기획실에서 한 브리핑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하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임권수 부장은 그제야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KM 그룹 본사에 있을 때부터 이런 사소한 것을 잘 이용해서 생존했다.

“소위 말하는 어장 관리녀입니다.”

“…설마 강준석 그 친구가 양다리에 당한 건가?”

그도 쓰게 웃고 말았다. 박진한이란 친구는 강준석 팀장이 너무 잘나가는 것을 미친 듯이 질투했다. 때문에 그의 과거 일을 꼬치꼬치 다 털어놓았다.

어장 관리녀는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박진한은 강준석 팀장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피력한 것이었다.

물론 임권수 부장이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네. 서아은이란 친구인데, 보통 여자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가만, 그래서. 본론이 뭐냐? 설마 미인계를 쓰자는 건가?”

“굳이 우리가 그렇게 지시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서아은이란 친구가 야심이 만만치 않은 친구라서 적당히 지시만 내리면 알아서 할 겁니다. 필요하면 본인의 몸이라도 굴릴지 모르죠. 어차피 어장 관리남을 이용하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고, 전 연인이니 그렇게 힘든 방식도 아닙니다.”

권태성 실장은 임권수 부장의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런 고전적인 방법을 고안할지는 몰랐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

“1년 만에 대리를 단 친구입니다. 보통 여자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굳이 미국행을 선택한 이유도 승진하기에는 국내보다는 미국이 좋다고 판단한 겁니다.”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준석 팀장이 굳이 미국에 가 있는 것도 설마 싶었다.

“강준석 그 친구가 설마 첫사랑을 아직도 잊지 않은 건가?”

임권수 부장도 강준석 속내까지 몰랐다.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강준석 그 친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실리콘 밸리에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전 전략 기획실 그 친구보다 서아은이란 친구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장 미국에 전화해 봐!”

그는 자신이 제안하기는 했지만, 권태성 실장의 빠른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쪽은 담당이 저희 쪽이 아닌데…….”

“전략 기획실에 지금 내가 전화하지.”

권태성 실장은 바로 전략 기획실에 전화를 걸었다.

임권수 부장도 그의 태도 변화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한편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흐름을 잘만 탄다면 승진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좋았어!’

* * *

서아은은 오성 그룹의 실리콘 밸리 지사에서 일하는 중에 갑자기 뜬금없는 지시를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서류 일만 하면서 별다른 지시를 받지 못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바로 강준석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경악했다.

내심 미국 실리콘 밸리를 노린다면 오성 그룹 내에서도 빠르게 승진할 것이라 예상해서 이곳에 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윗선에서 대학 시절에 잠깐 사귄 강준석의 이름이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 노골적인 지시의 의미를 알았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전 연인. 설사 같이 잔다고 해서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곧 만약을 대비해서 한국에 전화를 걸어 강준석 팀장의 전화번호를 얻고는 즉시 전화했다. 그리고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알았어.]

강준석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됐어.’

* * *

실리콘 밸리의 땅값이 비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도심 한복판은 더했다.

다만 비싼 만큼 그럴듯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많았다.

서아은은 강준석에 대한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굳이 나이도 많고, 무능한 강준석을 어장 관리 목록에 넣은 것은 다른 남자와는 달리 신뢰가 가서다.

그녀가 관리하는 다른 남자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강준석은 참 독특한 캐릭터였다.

‘군대 갔다 온 이후에 취직을 못 해서 고생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설마 KM 전자에 입사한 거야? 아니, 취업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언제 미국에 온 거래?’

이런저런 과거 일이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강준석의 모습은 이전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보자 호랑이 앞에 고양이처럼 눈치만 봤다.

‘쯧쯧.’

서아은은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최근 강준석에 대한 자료철을 확인하고는 내심 깜짝 놀라서 긴장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빠는 언제 미국에 온 거야?”

“조금 됐어.”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질문인데, 설마 나를 쫓아서 미국에 온 것은 아니겠지?”

강준석 팀장은 평소와는 달리 깜짝 놀랐다.

“맞구나.”

그녀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물론 그녀 자신이 강준석 팀장에게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미국까지 쫓아올 정도인지는 몰랐다.

다만 이건 사실과는 좀 달랐다.

강준석 팀장이 서아은을 잊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미국을 목표로 할 정도로 집착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미국에 가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미국에 가서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은 그 정도였다.

첫사랑의 순정은 강한 생명력이 있었다.

서아은은 덕분에 편하게 대학 시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아졌다. 강준석 팀장은 마약에 취한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 다른 선배에게 듣기로 준석 오빠가 벌써 팀장을 달았다면서?”

“아, 운이 좋았어.”

“세상에 운이 어딨어. 오빠가 그만큼 노력한 거잖아. 나도 학교 다닐 때 오빠는 믿음직해서 좋았어. 아마 KM 전자도 그렇게 판단한 거야. 그래서 궁금한데, 어떻게 된 건지 좀 자세히 말해주면 안 될까?”

강준석은 움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회사 영업 비밀로 엮여 있어서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는 곤란했다.

“오빠, 정말 실망이다. 나도 우연히 오빠 소식 듣고 기뻐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미안하다. 하지만 회사 일은 말하기 좀 곤란해.”

“하지만 박진한 선배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오빠가 미국에 와서 한 일을 말이야. 오빠가 구골 투자에도 관여했다는 소리가 있었어.”

강준석은 ‘박진한’ 이야기를 듣자 눈살부터 찌푸렸다.

“응? 그럴 리가 없어. 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딱 한마디 나온 구골 이야기.

그 말이 터닝 포인트였다.

강준석의 표정이 첫사랑 연인을 앞에 둔 남자에서 다시 직장인으로 바뀌었다.

더욱이 그는 서아은이 과거 자신에게 한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 때문에 냉정하지 못했지만 구골 이야기에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구골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은 거야?”

그녀도 날카로운 강준석 팀장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오빠, 지금 나 추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이상하잖아. 갑자기 나에게 연락해서 뜬금없이 구골 이야기라니.”

“아, 몰라,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해. 그냥 회사 내에서 우리 대학 출신을 만나서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야!!”

“어, 그래. 알았다.”

서아은은 자신이 익숙한 강짜 버티기로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녀는 내심 깜짝 놀랐다. 자신이 알던 쑥맥 강준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강준석의 태도는 이미 아주 달라진 지가 오래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도 한 가지 사실을 알자 깜짝 놀랐다.

“너 오성 그룹에 들어갔어?”

“어, 운이 좋았어.”

사실 그녀가 오성 그룹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을 통과한 것 덕분이다.

미인계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뭐, 꼭 성 접대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도 쓸 곳은 많았다.

더욱이 서아은 본인도 일반적인 다른 여자와는 달리 욕심이 많았다.

강준석 팀장은 그제야 서아은을 똑바로 볼 수가 있었다. 그도 최근 오성 그룹 인사 팀에게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저 기분이 좋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설마 과거 첫사랑인 서아은을 이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 그가 더 배신감을 느낀 것은 서아은이 작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구골 지분 일부를 인센티브로 넘긴 것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긴 한두 푼이 걸려 있는 일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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