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0.
필리핀 정부 고위 관료가 나와서 증설 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유다.
그들은 물론 최용욱 회장과 만나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최용욱 회장은 덕분에 다시 젊은 시절을 찾은 것 같았다.
그가 이렇게 필리핀 정부 고위 관료에게 환대를 받은 적이 흔치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문경이 그놈은 어디에 있는 거야?”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이 자리에 못 온다고 알렸습니다.”
최영란 본부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이 자기 결과를 시기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다른 곳에 가서는 자신의 실적이라고 떠들고 다니니.’
더 황당한 것은 언론이다.
이번 일은 그녀가 한 일인데, 그런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오로지 최문경 부회장 인터뷰 기사만 실었다.
최영란 본부장은 내심 이를 갈았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정말 자신의 진짜 아버지인지 의심했다. 혹시 자신은 막장 재벌 드라마에 나오는 조연처럼 다른 친부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어금니 뽀드득 갈아붙이는 손녀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힐끗 동행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놈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어? 오늘 자리에는 반드시 나오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니까!”
그도 힐끗 최영란 본부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회장님이 언론사와 가지는 연결 고리는 생각보다 탄탄합니다. 하루 이틀 유지된 관계가 아니라서 쉽게 끊지도 못합니다.”
“돈이라도 처발랐다는 소리야?”
“…그게 다가 아닙니다.”
“왜, 마약이라도 같이 하는 관계여서 그래?”
“…….”
장승일 실장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단순히 여자나 마약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같이 알음알음 알아왔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KM 산업의 반도체 생산 능력은 점점 강화되었고,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질 일이다.
특히 비메모리 라인도 중견기업 몇 곳의 설비를 사들였다.
이제 KM 산업은 탄탄대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그게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서 고까운 것이다.
심지어 손자 최민혁이 나서서 영업 오더를 따와서 최영란 본부장에게 몰아준 것에 분노했다.
결국 이 사태의 본질에는 손자 최민혁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 민혁이 그놈이 미국에 갔다고 했지? 언제 돌아오는 거야?”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봤다. 그도 지금 일보다는 요즘 언론에서 줄기차게 떠드는 스캔들을 떠올렸다.
“혹시 송도연 스캔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말도 안 되잖아. 민혁이 그놈 나이가 몇인데, 사십 대 초반이라니!”
“그 스캔들이 좀 과하기는 했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손자 최민혁은 다 좋은데, 너무 물이 맑다는 것이 문제였다. 적당히 비리도 저지르고, 뇌물도 좀 주고 해야 하는데, 절대 그러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제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이라면, 벌벌 떤다는 이야기가 나오겠나.
“그만큼 민혁이 녀석에게 반감이 심하다는 것이겠지. 특히 한국 재벌은 다 싫어할 거야. 언론사도 다르지 않을 거고.”
“하긴 최 실장님의 KM 전자는 한국 재벌과는 DNA 자체가 다르니,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더 황당한 것은 그걸 알면서도 민혁이 그놈을 공격하는 이들도 있다는 거야.”
“믿고 싶은 것만을 보는 이들일 겁니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민혁이 그놈이 왜 이 사태를 내버려 두는지 말이야. 적당히 일부러 좀 져줘도 되잖아. 왜 반발하는 놈들을 죄다 밟아서 으깨려고 하는 거야!”
“…….”
장승일 실장도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해 철혈의 경영인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 머뭇거렸다. 그 역시 뒤늦게 확인한 몇 가지 정보가 떠오른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그것 놓치지 않았다.
“장 실장,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사실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보통 스캔들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적어도 이 주일은 넘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스캔들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이유가 누군가 군불을 때서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설마 문경이 그놈 짓이야?”
“단순히 부회장님 때문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KM 전자 내에서도 이 사태에 손을 쓴 이가 있다고 합니다.”
최용욱 회장은 발끈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설마 훈열이 그놈 외에 아직도 KM 전자 내에서도 민혁이 그놈 뒤통수를 치는 이가 있다는 소리야?!”
“…그래서 신중하게 확인하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최민혁 실장님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만, 그 이야기는 지금 민혁이 그놈이 이 사태를 키웠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는데?!”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최민혁은 이전과는 달리 미국에 가서 바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초호화 아파트까지 사들여서 국내 언론도 관심을 뒀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의 안색이 변하자 즉시 소리쳤다.
“무반응보다는 차라리 안티가 낫기 때문일 겁니다.”
“뭐? 가만, 혹시 노이즈마케팅이란 소리야? 아니, 그런 계획이라면 한국에 있어야지. 갑자기 미국으로는 왜 간 거야?”
“에플 제품 출시가 먼저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 국내 일이 에플 출시와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란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
최용욱 회장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에플의 주가가 폭등한 것 때문에 재미를 단단히 봤다. 그러니 에플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도 손자 최민혁의 꿍꿍이가 뭔지 이제야 안 것이었다.
‘설마 에플 노이즈마케팅 때문에 이 쇼를 벌이는 거라고? 아니, 그게 가능해?’
“끙, 다 좋아. 하지만 그 부작용도 무시하기 힘들 텐데? 그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말이야.”
“지금까지 그 부분 때문에 기획 조정실에서 따로 검토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이미지조차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쇼킹한 이벤트가 있으면 됩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뭔데?”
“그건… 모릅니다.”
장승일 실장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번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아무리 유별나도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확실해?”
“그래서 제가 아직 회장님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허허, 내가 나이가 너무 들었나? 세대 차이가 나서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장승일 실장의 고심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그는 한창 축제 분위기인 필리핀 공장에 와서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도 결국 짜증이 나서 소리치고 말았다.
“도대체 민혁 그놈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
장승일 실장은 물론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조용히 최용욱 회장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최영란 본부장 역시 혀를 내둘렀다. 그녀 역시 최민혁이 미국에 갔다는 정보를 듣기는 했지만 목적 자체는 몰랐기 때문이다.
‘설마 부회장이 이곳에 오지 않은 것도 민혁이 때문이었어?’
* * *
사실 송도연 일은 엄밀히 말해서 최문경 부회장을 과녁으로 한 것이었다.
다만 이게 직접적인 일이 아니라 빙빙 몇 단계를 돌아간다.
그러니 제삼자가 봤을 때는 도저히 최민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최문경 부회장이 필리핀 공장 증설식에 가지 않은 것은 장녀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그는 도저히 장녀인 최영란이 자신보다 더 나은 성과를 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최민혁 스캔들에 장작불을 붙였다.
일주일 간격으로 한국 언론사 관계자들을 다 만나서 로비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덕분에 최민혁 실장의 악명은 쉽게 꺼지지 않는 불길이 되었다.
‘이거지, 이거야!’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지금껏 쌓인 최민혁에 대한 증오심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정말 통쾌해서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좀 생각을 달리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일로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완벽한 인간인지 잘 알았다.
그런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어설픈 짓을 저지른다라.
‘말이 안 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민혁 실장과 KM 전자 기획실 동향을 철저하게 살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KM 그룹 특허 팀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정보는 흥신소 네 곳을 동원해서 우연히 안 정보였다.
더 자세히 캐고 싶었지만 KM 전자 내부 보안 등급이 국정원 수준까지 올라가서 그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기에 최문경 부회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그 자신의 얼굴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직 확인 중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KM 전자 특허 팀이 긴밀하게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도 깜짝 놀랐다.
“KM 전자 특허 팀? 아니, 그놈들이 왜 움직여? 민혁이 그놈은 지금 미국에 가 있잖아?!!”
“사실 그게 문제입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수차례나 뒤통수를 맞았다. 그가 바보가 아닌데, 이전처럼 똑같이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KM 전자 기획 팀을 비롯한 특허 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내부 정보 관리 등급을 올려서 내부 정보를 철저하게 체크했다.
실상 특허 팀의 동선을 안 것은 이들이 갑자기 야근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 느닷없이 새벽 3시에 퇴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건물 창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래서 흥신소에서 이 정보를 안 것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버럭 소리쳤다.
“야, 권 실장, 그러면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 당장 가서 뭐 하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혀를 찼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보고를 안 했을 뿐인데, 마치 자신이 잘못했다는 시선을 받아서다.
‘이 일도 힘들어.’
* * *
권재홍 비서실장의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이전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최민혁이 굳이 새로운 검색엔진 회사 설립 정보를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금 300억으로 구골을 설립했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게 각각 지분 5%를 줬다. 전자에게는 최고 경영자를, 후자에게는 사장 자리를 맡겼다.
두 사람이 몇몇 지인을 데려온 것 역시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다음에 구골 설립과 차세대 검색엔진 정보를 노골적으로 흘린 곳은 다름 아닌 클라이너 퍼킨스와 세퀴아 캐피털이다.
두 회사는 이미 야후로 재미를 단단히 봤고, 이미 다른 몇몇 IT 기업에도 침을 발라놓았다.
따라서 이들은 검색엔진이 꽤 괜찮은 아이템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이들도 야후의 미래에 대해서 돈을 걸면서도 그 아성이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야후 검색엔진 자체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다.
물론 야후가 스스로 더 나은 검색엔진을 고안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구골이란 회사가 갑자기 생겨났는데, 그 회사가 가진 원천기술이 바로 야후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술이라는 것을 안 것이었다.
두 투자 회사는 그길로 당장 구골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골 엔진의 초기 시제품을 봤다.
아직은 바로 상업화하기 힘들지만, 그 결과만으로도 가능성을 봤다.
야후 검색엔진의 취약점을 어느 정도 극복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