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
레온 쿠퍼맨은 전형적인 골드만 삭스맨으로 투자 조사부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그 역시 조직 내에서 탁월한 성과로 조기 승진을 거듭했고, 벌써 이사 자리를 달았다.
그가 벌어들인 수억 달러의 수익을 고려하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레온 쿠퍼맨에 대한 골드만 삭스 내의 평가는 갈렸다.
그는 겉으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거나 질책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말없이 결과로 말하는 사람이다.
다만 이런 모습과는 달리 남의 실적을 조용히 가로채기도 한다.
물론 대체적으로 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가 파티에서 한 이야기 역시 투자자를 모을 목적으로 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그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를 만나자마자 바로 부인했다.
“태국 바트화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똑똑한 인물이다. 그는 이전 파티에서 대충 나온 이야기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설마 저에게도 감출 겁니까? 태국 바트화를 타깃으로 뭔가 한다는 이야기가 이미 월가에 파다합니다. 정말 모른다고 할 겁니까?!”
“전 정말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쪽은 요즘 이머징 마켓 투자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걸로 아는데, 갑자기 왜 태국 바트화 이야기입니까?”
그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레온 쿠퍼맨은 표정과는 달리 내심 화들짝 놀랐다.
태국 바트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단순히 흘러가는 투자 이야기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크게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알아듣는 이들은 태국 바트화 플랜에 투자를 한 주인공들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웃으면서 레온 쿠퍼맨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한편으로 스탠리 로버트 이사에게도 넌지시 제안을 하긴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바트화 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넘기고 말았다.
뒤늦게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린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상대가 부인하자 곰곰이 고민하다가 슬쩍 한번 찔러봤다.
“태국 바트화 플랜에 대해서 아는 친구가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레온 쿠퍼맨 이사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기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솔직히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다른 헤지펀드 매니저들과는 반응이 달라서 망설인 것이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박 이후에 동아시아 쪽에 투자를 대폭 늘려가고 있으니까.
“…모건 스탠리 윗선에서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해줬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모건 스탠리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레온 쿠퍼맨은 왜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태국 바트화 이야기를 모르는지 알았다. 그 작업 관련자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뢰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직은 시간이 제법 있어서 그에게도 비밀로 한 것이다.
태국이란 한 나라를 상대로 하는 플랜이다. 자칫하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보가 새어 나가면 실패할 확률은 더 높아진다.
혹시라도 이 정보를 안 이가 태국 정부에게 정보를 흘린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비록 제가 정보를 일부 흘리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런 추측을 하기 힘들 텐데, 도대체 누구에게 들은 겁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그제야 안색을 굳힌 채 잠깐 고민하다가 굳이 숨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
“최민혁 실장? 설마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말하는 겁니까? 에플의 대주주인 그 최민혁 실장이 맞습니까?”
그는 레온 쿠퍼맨 이사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자 혀를 내둘렀다.
“네. 물론 최민혁 실장도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가만, 그러면 최민혁 실장이 그쪽을 통해서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나 보군요.”
레온 쿠퍼맨 이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계획은 한국과 관련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본 정부가 영향을 받으면, 한국에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어. 설마 한국까지 같이 포함해서 작업하려고 할까?’
지금 정해진 태국 바트화 공격 플랜에서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국 바트화가 흔들리면 타격을 받는 세력이 있다.
동남아 쪽 국가가 영향을 받게 되면, 결국 그 불길은 일본으로 옮겨 가게 돼 있다.
그런데 계획대로 일본에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
이게 아직은 확정이 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딱히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국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걔들이 구경만 할까?’
돈에는 적도, 아군도 없다.
그저 돈일 뿐이다.
그들이 돈이 될 만한 먹잇감이 있는데, 그냥 넘어갈까 싶다.
결국 한국 경제 상황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 경제는 딱 먹기 좋도록 요리된 사냥감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으니.
그 상대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레온 쿠퍼맨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자산 내역을 하나씩 떠올렸다.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당장 에플 주가를 떠올렸다.
‘골치네.’
작년의 에플과 지금의 에플은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단순히 주가 때문이 아니라 미래 가치 때문이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나오자 얼어붙은 레온 쿠퍼맨 이사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릅니다. 혹시 제가 알면 안 되는 내용입니까?”
레온 쿠퍼맨 이사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는 내막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마 평시였다면 이 정도로 자리를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문제였다.
에플의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
지금 에플 지분 40%를 가진 실소유주였다.
에플 지분 매입 가격은 대략 15억 달러 규모였다.
지금 에플 주가는 8달러 선에서 거래가 되고 있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 가치는 무려 120억 달러였다.
에플 주식의 가치만 따져서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이 주식을 시장에 그냥 패대기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주식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적어도 80억 달러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소유한 주식은 에플만 있는 게 아니다.
퀄컴, ARN을 비롯한 핵심 기술 주식을 다 소유하고 있다.
그 주식을 가지고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을 예상해 본다면 200억 달러도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 KM 전자 주식 가치는 배제하고 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에플 주가도 단기에 오른 결과란 점이다.
대체 앞으로 에플 주가는 어디까지 오르게 될까?
사실 이 문제는 골드만 삭스 내에서도 따로 팀을 신설해서 주시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레온 쿠퍼맨 이사는 그제야 머리가 아파서 덮어버렸던 상자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적이 된다면 사상 최악이 적이 탄생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지금만큼은 절대로 적으로 둬서는 안 된다.
때문에 그냥 최민혁 실장이 관심을 뒀다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혹시 최민혁 실장이 태국 바트화에 대해서 아는 게 뭔가 있습니까?”
“흠.”
미국 정부 정책 이야기가 나와도 그저 웃기만 하는 사람이 레온 쿠퍼맨 이사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나오자 크게 당황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그제야 이 일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역시 이번 스캔들로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보기는 했지만, 그가 가진 자산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니, 세상 물정 모르는 미친놈이라서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자세한 것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제가 봐서는 태국 바트화와 관련된 헤지펀드를 찾는 것 같았으니까요.”
“…혹시 저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갑자기 표정 관리를 하는 레온 쿠퍼맨 이사의 행동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니, 지금 제가 아는 것도 전혀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말고가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최민혁 실장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저도 스탠리 이사를 전적으로 돕겠습니다.”
“고작 그게 답니까?”
“아, 물론 그게 다는 아니죠.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특히 태국과 관련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면 제가 원하는 것은 들어주시는 겁니까?”
레온 쿠퍼맨 이사는 그제야 정색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가서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이건 윗선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아마 스탠리 이사님이라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골드만 삭스 윗선 말입니까?”
레온 쿠퍼맨 이사는 피식 웃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건 스탠리와 그 외에 몇몇 헤지펀드가 합심하여 이번 일을 계획했습니다.”
“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워낙에 예민한 일이라서 윗선의 소수 몇 사람만 알고 있는 건입니다. 아마 작업 들어가기 전에 스탠리 이사님에게는 알리겠죠. 지금까지 이머징 마켓에 투자한 것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이제 안색을 완전히 굳히고 있었다. 그도 처음 최민혁 실장에게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레온 쿠퍼맨 이사를 만나고 나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회사에서 나에게도 비밀로 했다는 말인가? 그럼 최민혁 실장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것이 보안 때문인 건가? 일단 윗선에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네.’
* * *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레온 쿠퍼맨 이사를 만난 후에 다시 모건 스탠리로 복귀해서 윗선에 슬쩍 이 사안에 대해서 문의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뿐이다.
그로서는 황당했다.
자신이 마치 사내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모건 스탠리 내에서도 태국의 바트화에 대해서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는 결국 이 사안에 대해서 확실히 지시를 받기 전에는 최민혁 실장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입장에서는 솔직히 황당했다. 그는 텍사스주에 도착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탠리 로버트 이사로부터 반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걸까?’
그 와중에 안재운 전무는 계속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텍사스 공장 증설 자리에 앞서서 잠깐 술 한잔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함이다.
그는 조용히 전화를 끊은 후 전원마저 꺼버렸다.
비록 이 주일 정도 시간이지만 아직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텍사스 공장 현장은 안 가도 상관이 없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모건 스탠리 쪽의 반응이니까.
가능하면 이번 기회에 태국 바트화 작업과 관련된 세력 쪽과 소통하고 싶었다.
최민혁은 이들이 생각보다는 보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돈이 있다고 해서 그 판에 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뭔가 깊은 유대 관계가 필요해 보이는데, 문제는 그 자신은 그런 채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시 아태 차관보에 부탁한 건데, 이 방법도 소용이 없다니. 좋아,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그들의 탐욕을 부추기면 된다.
에플 관련 사안은 이미 챙길 것이 별로 없다.
차세대 배터리가 그나마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약발이 약한 것 같았다.
‘모건 스탠리나 그자들이 탐욕을 보일 거라면, 역시 IT 쪽은 빼놓을 수가 없겠지.’
최민혁은 일단 조성돈 팀장에게서 최근 올라온 보고안은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중에 특히 미국과 관련된 보고 위주로 말이다.
그도 처음에는 괜찮은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러다 마침 괜찮은 아이템이 보였다.
‘가만, 강 팀장이 설마 이 친구들에게도 투자한 건가? 역시 밀어준 보람이 있어. 약간씩 조언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성과라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을 바로 호출했다.
“오늘 비행기로 캘리포니아로 갈 테니, 강 팀장에게 이 친구들을 호출해서 약속을 잡으라고 전해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