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
이 자리에서 이 정보에 집착해서는 곤란했다.
그가 굳이 모건 스탠리 쪽 인사와 안면을 튼 것도 그 정보에 자연스럽게 접근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래 기술 지분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원하는 태국 바트화 관련 정보를 한 번 확인해 본 후에 바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제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미래 기술 지분을 적절한 가격에 넘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태국 바트화에 대해서 왜 저렇게 관심을 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 * *
모건 스탠리 내에 기업 인수합병 건은 연간 150건이 넘는다. 작년 실적 기준으로 보면, 1,500억 달러 규모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미래 기술 지분 투자는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다.
‘아니구나. 10%에 1,000억 규모라면, 무시할 수준은 아니야.’
다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에플 주가다.
최근 스티븐이 CES 기존 연설 중에 차세대 모델 소개를 한다는 뜬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최민혁 실장의 스폰녀인 송도연이 무대를 꾸린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차라리 최민혁 실장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후회했다. 몰랐다면 에플 투자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지 않았을 테니까.
줄리안 패닝 부장은 자신이 따로 조사한 내용을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 ‘이거 완전 개새끼 아냐’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KM 전자 지분 투자를 다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보면 뜸하지 않습니까. 에플 지분 평가 차익으로 계속 주가는 오르기는 하지만 더 오를 여력은 없습니다. 솔직히 스티븐이 뭔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확실히 좀 그런가?”
“다른 것을 떠나서 최민혁 실장 이 인간의 프로필을 한번 보세요. 한국 언론사 기사에 나온 최민혁 실장 관련 요약본입니다!”
그녀는 한국에 있는 어지간한 언론사 기사들을 다 조사해서 정리했다.
물론 최민혁 실장과 송도연 스캔들에 대한 기사였다.
그 내용 중에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기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KM 전자 마케팅 팀의 최준형 과장이 뒤에서 스캔들을 부추겼다.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뒤끝이 무서워서 망설이던 언론사들도 뒤늦게 이 전쟁에 합류한 것이었다.
KM 전자 스스로 스캔들을 키우는 마당에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언론이 나올 수가 없었다.
실상 이 배후에는 최문경 부회장과 오성 전자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이 서로 톱니바퀴처럼 최민혁 실장 스캔들을 키운 것이었다.
이 노이즈마케팅의 효과는 대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한창 뜰 때는 무시했던 이들조차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관심을 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공중파 뉴스에서도 최민혁 실장이 스폰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럴 것 같다 정도의 뉘앙스였다.
이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의 나이는 삼십 대 초반으로 껑충 뛰었다.
물론 이것도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 같다는 식이다.
모든 매체가 최민혁 실장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라고 계속해서 선동 방송을 했다.
실제 최민혁 실장의 나이를 아는 KM 전자 임직원들조차 ‘최민혁 실장 나이가 이렇게 많나?’라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마치 독일 괴벨스의 정치공작처럼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이 소식은 외국 언론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최민혁 실장이 에플 대주주이기도 했으니, 해외 언론에서도 주시한 것이었다.
이런 사태를 두고 최민혁 실장을 믿을 수 있을까.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결국 최민혁 실장 관련주에 관한 재조사를 지시했다.
“다시 원점에서 조사해 봐. 만약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지분을 매각하는 방향도 검토해 봐’란 말까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유는 뭔가 찜찜해서였다.
최민혁 실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설마 최민혁 실장이 의도적으로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번 일에는 최문경 부회장이 오랜만에 작정하고 나섰다.
그는 이번 사태를 키우기 위해서 비용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분노한 줄리안 패닝 부장 생각은 달랐다.
“솔직히 퀄컴 CDMA도 걱정이 좀 돼요. 과연 이게 상업적으로 성공할지 확신할 수 없어요. TDMA 로비가 만약 성공한다면, 퀄컴도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에 대해 의심했다. 그가 아는 미국 정부 쪽 라인이나 미국 상원의 주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태도를 봐서는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더 큰 이유가 있다.
“에플 신제품이 MP3란 이야기가 있던데, 과연 판매 수량이 어느 정도나 될까?”
줄리아 패닝 부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물론 판매량이 어느 정도는 나올 겁니다. 하지만 과연 기대한 수량 이상을 판매할지는 불확실합니다. 스티븐이 나선 만큼 어느 정도는 이익을 볼 테지만 결국은 고만고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에플 지분의 가치 평가액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보통 주가는 상승 모멘텀이 있을 때 오른다. 다만 시장이 기대한 것보다 큰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차익 매물이 나오게 마련이다.
에플 주가는 그런 면에서 단기에 너무 많이 올랐고, 이번에 차세대 제품이 나온다고 해서 시장 기대치에 큰 충격을 주기는 어려워 보였다.
CES 전시회 이후에 에플 주가는 조정 국면을 거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게 보편적인 투자 관점이었다.
최민혁 역시 이런 흐름을 뒤집기 위해서 지금까지 작업한 것이니까.
최민혁의 노력을 알지 못하는 이로서는 에플 주가는 조정 국면을 거쳐서 4~5달러로 떨어질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게 사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송도연 스캔들을 이용한 의도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스탠리 로버트 이사에게 쇼크를 줄 계획이다.
그걸 잘 모르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졌다.
‘하긴 KM 전자 주식 일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 나왔으니.’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번 스캔들 기사 때문에 그나마 가진 희망도 접었다.
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IP 시티폰은 어때?”
IP 시티폰에 대한 투자는 모건 스탠리에서도 보수적으로 나갔다. 다만 최근 샐러먼 브러더스 측의 제안 때문에 뒤늦게 검토 중이었다.
“중국 시장 상황을 검토해서 확인 중입니다.”
“일단 그거부터 보고 난 후에 결론을 내리지.”
“…알겠습니다.”
* * *
이머징 마켓 이야기는 한국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대형 투자자 역시 이머징 마켓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WTO 체제 이후 개방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이머징 마켓의 구성원인 개발도상국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었다.
모건 스탠리는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규제 완화와 관세 인하 정책을 살폈다. 이들은 필요하다면 미국 정부에 압박도 했다.
백악관 주인공 중에 모건 스탠리 쪽에서 밀어준 이들도 있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쪽 채널을 통해서 압박했다.
투자는 대성공이었다.
당장 인도 투자도 대박을 쳤다.
덕분에 모건 스탠리는 인도 관련 인력을 계속해서 늘렸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리스크 때문에 다른 투자사에 비해서 뒤늦게 출발했지만 성과는 상당히 좋았다.
골드만 삭스를 비롯한 다른 투자자가 삽질한 리스크를 슬쩍 피해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중국인민 건설 은행과 합작으로 차이나 인터내셔널 캐피털(CICC)를 설립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이 투자에 직접 개입해서 몇 가지 투자 항목을 정했다.
그중에 최근 추가된 항목이 있는데, 다름 아닌 IP 시티폰이었다.
원래부터 IP 시티폰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의 킬리언 시몬스 이사가 이 아이템을 넌지시 제안했다.
이유는 중국 진출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다.
샐로먼 브러더스 혼자 중국에 들어갔다간 중국 공산당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
미국 정부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에 부정적인 탓에 그 경우 자칫하면 손도 못 써보고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들은 결국 잔머리를 굴려서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선택했다.
모건 스탠리가 중국 시장을 그저 구경만 하는 상황이다 보니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IP 시티폰 투자 결정에 앞서서 최민혁 실장을 다시 재확인했다. 그가 IP 시티폰을 세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를 열어서 우선 IP 시티폰의 원오너인 최민혁 실장을 걸고넘어졌다.
“역시 한국 대기업에는 당할 수가 없었겠지?”
줄리안 패닝 부장이 나섰다.
“KM 그룹, 오성 전자를 비롯한 알 만한 기업이 힘을 합쳤다고 합니다. 최민혁 실장도 이들의 압박을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IP 시티폰의 세세한 내막까지 외부에서는 알 수는 없기에 나온 판단이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정보를 비비 꼬아놔서 당사자가 아니고는 알 길이 없다.
모건 스탠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또한 이들은 굳이 IP 시티폰의 기술적인 면까지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 IP 시티폰의 주인이 누구인지만 알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
“IP 시티폰 시장이 생각보다 큽니다.”
그녀가 차트로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세계 지도였다.
그녀는 곧바로 이머징 마켓의 주인공인 중국, 인도, 일본,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하나씩 가리켰다.
이들 시장과 앞으로 IP 시티폰이 뻗어 나갈 수 있는 미래 시장을 말이다.
“과거 우리는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잘 적용한 탓입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무려 30년간 장기 집권을 한 정치인이다. 그는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따로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모건 스탠리는 바로 이 회사와 손을 잡고 장기 계획을 밀어붙였다.
“특히 50개 국영 기업의 민영화 사업을 노린 것이 컸습니다.”
그 과정에서 험난한 일들이 있었지만, 결과는 실로 달콤했다.
결국 합작 펀드사까지 설립했으니까.
“하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문제가 많았어. 당장 인프라 자체가 개판이잖아. 관료의 부정부패도 문제야. 특히 지역마다 사업 기준이 모호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쓴 돈이 만만치 않아.”
쉽게 말해서 각 지역마다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다.
이들에게 손을 쓰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써야 했다.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중국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특히 중국 공산당의 부정부패는 심각하다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래도 샐러먼 브러더스가 이미 어느 정도 투자를 해놓았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리스크는 더 줄어들 겁니다.”
“흠.”
스탠리 로버트 이사 역시 IP 시티폰의 가능성을 높이 봤다.
그러지 않았다면 샐로먼 브러더스가 무리수를 둬가면서 최민혁 실장에게서 IP 시티폰 원천기술을 강탈하지 않았을 테니까.
‘겉으로는 인수합병이라고 하지만 그걸 믿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
이것만 봐서는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그놈의 여자 문제만 아니었다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고삐리 성매수 사건 때문에 색안경을 낀 채로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니, IP 시티폰처럼 미래 가치가 높은 아이템을 강탈당한 거라고 생각이 흘러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샐로먼 브러더스처럼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해. 잘만 하면 미래 기술 지분을 헐값에 인수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는 최민혁 실장이 꺼냈던 태국 바트화 투자 관련 이야기를 다시 상기했다.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뭔가 대충대충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정보는 꼭 원하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 자리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골드만 삭스의 레온 쿠퍼맨에게 연락해 봐.”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