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
[…혹시 누구랑 만나는지 알 수가 없을까요?]
최민혁은 안재운 전무의 태도에 황당해서 어이가 없었다. 그는 안재운 전무가 자신의 말을 의심한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자신이 상대한 이들치고 멀쩡한 이들이 없으니까.
지금 봐서는 안재운 전무가 권태성 실장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은 것 같았다.
최민혁은 미국에서 굳이 그럴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뭐, 그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습니다.]
[섭섭합니다.]
‘얘가 왜 이래? 위성 사업으로 재미를 단단히 봐서 그런가.’
솔직히 그로서는 웃기는 일이다.
위성 사업부를 매각한 것은 애초에 돈 때문에 한 것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콜린스 사업 매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위성 사업 매각을 통해서 신뢰를 깔아둔 것이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다.
안재운 전무는 오성 황태자답게 떠받들어 주는 사람이 많았다.
유별나게 특별 대우 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안재운 전무와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아, 이렇게 하죠. 이번에 미국 텍사스에 D램 공장 건설 착공식 행사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 자리에서 보면 어떨까요?]
[…지금 제가 뉴욕인데, 굳이 텍사스에서 만날 필요가 있습니까?]
최민혁은 안재운 전무의 태도를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제 일정이 빡빡해서 어쩔 수가 없네요. 정 안 되면, 한국에 가서 보는 걸로 하죠.]
안재운 전무는 최민혁 실장이 튕기자 혀를 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쉬운 것은 그였다. 최민혁 실장 덕분에 얻은 것이 많아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면 전 텍사스에 미리 가 있겠습니다.]
[…네.]
최민혁은 안재운 전무가 생각보다 몸이 달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잘만 하면 안재운 전무를 이용해서 재미를 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재운 전무 소개로 텍사스 인사를 만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는 모건 스탠리 쪽 인사를 만나서 앞으로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했다. 안재운 전무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앞날을 위해서 적당히 줄 것은 주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다.
‘하지만 날로 먹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번에는 적당히 곤란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아, 물론 내가 설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 되겠지만.’
* * *
“흠.”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간단한 소개와 더불어서 동행한 송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고2 여고생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스캔들의 그 여자애까지 이 자리에 같이 데리고 오다니.’
송도연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면서 스탠리 로버트 이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월가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를 보자 크게 당황했다.
이런 자리는 그녀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최민혁은 그런 송도연을 내세워서 나름 멋지게 소개했다.
“도연이는 에플 이벤트의 주인공입니다. 그 자리에서 멋진 노래를 부를 당사자죠!”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스티븐이 진행하는 이벤트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다. 이번 CES에서 에플 차기작 소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쇼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제품이라고 생각하니까.
“…설마 이 가수가 에플 이벤트 무대의 주인공이란 말입니까?”
“네, 도연이가 겉으로 봐서는 앳되어 보이지만 실력은 최고입니다.”
“글쎄요.”
‘고2가 실력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당신이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습니까?’라고 차마 묻지는 못했다.
그로서는 최민혁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자연스럽게 문제가 된 것은 역시 그가 투자한 최민혁 관련주다.
최민혁 실장의 정신이 딴 데 가 있는데, 과연 앞으로 잘될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이걸로 최민혁 실장을 타박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의외인 점은 최민혁 실장이 모건 스탠리 본사에 들어와서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뿐이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결국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송도연이 ‘헤헤’ 귀엽게 웃는 모습을 보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도저히 최민혁 실장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렵게 마련한 자리. 자신이 속한 기업 인수합병 조직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 조직은 타임워너의 터너방송 인수부터 시작해서 스위스 제약 업체 산도스와 시바 가이기 인수합병까지 진행했습니다.”
터너 방송 인수는 대략 80억 달러 규모였고, 산도스는 무려 270억 달러에 달한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간 록히드와 마틴 합병은 79억 달러 수준이다.
그는 인수합병 부분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이건 현물거래에도 막대한 투자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에플, 퀄컴과 같은 종목에도 관심을 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투자 적기가 좋지가 않았다.
머뭇거리다가 에플 주식 매입에 실패한 DL 그룹과는 달리 대략 4달러 선에서 들어갔다.
그래도 늦게나마 들어가서 재미를 보긴 봤다.
200% 가까이 수익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스탠리 로버트 이사 역시 에플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들어갈 타이밍을 놓친 경우였다. 뒤늦게 에플 주식 매입에 들어가면서 손실을 본 것은 아니지만, 크게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더욱이 오늘 미팅의 주제인 벨코어사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꽤 관심을 두는 종목 중의 하나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벨코어사의 차세대 배터리 특허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금만 댄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전문가에게 연결까지 시켜줬다.
덕분에 문제가 있어도 그럭저럭 잘 해결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최민혁 실장이 막판에 가서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그로서는 일본 업체만 대응하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셈이다.
IPS-LCD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경우였다.
하지만 스탠리 로버트 이사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최민혁 실장을 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대면하고 나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런 그의 눈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송도연.
그녀는 나름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수천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하는 스탠리 이사 눈에 그런 게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인상만 팍팍 썼다.
송도연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잘하는 짓이다.’
최민혁은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 송도연의 행동에 혀를 찼다. 그는 크게 낙담한 스탠리 이사를 보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사실 스탠리 이사가 한국인 최민혁 실장을 조사해도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스탠리 로버트 이사의 표정이 복잡한 것을 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미래 기술 지분에 관심이 있습니까?”
“벨코어사 지분 투자 때문에 손해를 꽤 봤는데, 관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시큰둥한 어조였다.
관심을 둔다고 하면 지분 매각 대금을 올려서 부를 테니, 적절한 표정 관리를 한 것이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을 상대로 온갖 음모를 다 꾸민 사람답게 상대가 가소롭기만 했다. 국내에서 지지고 볶고 했던 게 스탠리 이사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묘한 눈으로 스탠리 로버트 이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시 아태 차관보가 소개해 줄 사람이 모건 스탠리와 같은 헤지펀드 매니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 정부와 관련이 있다면 모건 스탠리나 골드만 삭스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스탠리 이사는 전문적인 도박사와는 다른 것 같아.’
주로 인수합병 전문가였다.
스탠리 이사가 원하는 것은 역시나 미래 기술 지분이었다.
반면 최민혁 실장이 원한 정보는 벨코어사가 아니라 태국 바트화를 이용해서 음모를 꾸미는 진짜 헤지펀드 쪽이었다.
‘그래서 벨코어사가 관련이 있는 미래 기술 지분은 꽤 훌륭한 미끼지. 스탠리 이사라면, 그 작자들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미래 기술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미국 쪽 헤지펀드와의 관계다.
이들과 어느 정도 소통 채널을 만들어둔다면 앞으로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갈 협박도 할 수 있지.’
실제로 바트화가지고 삽질할 필요가 없다.
‘나 들어간다!’라는 뉘앙스만으로도 헤지펀드를 크게 흔들 수 있었다.
그런 이점을 고려할 때 미래 기술을 통해서 원천기술에 대해서 공유해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따라서 지금은 미래 기술 지분을 가지고 협상할 필요가 있다.
“오성 전자 쪽에서 미래 기술 5% 지분을 500억에 사들였습니다. 혹시 그쪽에서는 어느 정도 가격을 고려 중입니까?”
“…5% 지분에 500억이라.”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송도연 스캔들 때문에 최민혁 실장에게 실망했지만, 미래 기술 문제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같이 자리한 실무진들을 통해서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역시 오성 전자를 잘 안다. 한국 대기업 중에서 최고다. 그런 회사가 미래 기술 지분을 인수했다니.
‘그럴 만하지. 차세대 배터리 쪽은 관련된 계열사가 많을 테니까.’
오성 그룹으로서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래 기술 지분 인수는 나쁜 거래가 아니었다. 다만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가격이었다.
사실 500억은 좀 과했다.
그런데 이 가격을 꼭 부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모건 스탠리라면 이 지분을 이용해서 그 이상의 수익을 볼 수가 있다.
미래 기술 지분은 쓸데가 많다. 이 차세대 배터리 원천 기술을 가진 곳이니까. 그가 당장 투자 리스트에 들어간 기업 중에는 모바일 기업도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지분의 값을 확인했다.
“…하면 미래 기술 10% 지분은 한화로 1,000억이란 말입니까?”
최민혁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미래 기술 지분 매각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상대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렸다.
“우리 둘 사이에 공감대가 있다면 그 가격에 협상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설마 KM 전자에 투자를 원한다는 말입니까?”
“아, KM 전자는 따로 외부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겁니다. 이미 밝혔지만 정보입니다. 혹시 모건 스탠리 쪽에서 태국 쪽에도 투자합니까?”
“…태국 쪽은 잘 모르겠습니다.”
스탠리 로버트 이사도 머뭇거렸다.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건 스탠리 역시 투자 은행이다. 태국 쪽에 투자할 수도 있다.
‘가만, 태국 바트화 관련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한 것 같은데…….’
다만 그 이야기는 술자리에서만 간단히 오갔다.
그 얘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골드만 삭스의 레온 쿠퍼맨 이사였다.
그는 전형적인 헤지펀드 매니저였다.
자신과는 영역이 달라서 접점은 없지만, 안면은 있었다.
솔직히 태국 바트화 쪽은 그다지 관심이 없기에 그냥 흘려들었다.
최민혁은 스탠리 이사의 표정을 보고서야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탠리 로버트 이사가 태국 바트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쯤이면 태국 바트화에 대한 사전 작업을 했을 텐데, 흘러나오는 정보가 있을 거야. 심지어 글로벌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이 주 종목인데, 모를 수가 없잖아.’
그가 아는 태국 금융 위기에 대한 배후로 꼽히는 세력 중의 하나가 모건 스탠리와 같은 헤지펀드였다.
“…모건 스탠리 내에는 많은 파트가 있습니다. 제 쪽은 기업 인수합병 쪽이니 현물 부분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하면 달러, 바트화 같은 투자 쪽은 다른 쪽에서 진행한다는 말이군요.”
스탠리 로버트 이사는 미래 기술 지분 협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모건 스탠리 내부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쪽과 손을 잡아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경우는 담당 부서가 아니면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최민혁은 굳이 더 자세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태국 바트화를 이용해서 금융 위기로 몰고 가는 일인데, 많은 이가 그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