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
“아무래도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특히 이번 일에 집중한 것으로 압니다.”
정부의 국제화 시대 선언이 어떻게 보면 해외 투자 시대를 연 것이다.
HY 전자 역시 미국에 무려 3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LC 반도체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히타치와 손을 잡고, 말레이시아 쪽에 투자를 대폭 늘리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들은 오성 전자와는 달리 주로 합작 회사 형태를 지향했다.
“리스트를 줄인다는 목적이기는 하지만 안전빵이네요.”
“특히 LC 그룹 쪽은 다른 기업과의 전략적인 제휴가 일반적입니다. 아무래도 비용도 절감할 수가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대운은 어때요?”
“대운은 여러 곳과 손을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AT&T가 하나이고, 톰슨 멀티미디어 역시 빼놓기 어렵습니다.”
“아, 그 톰슨요?”
“네. 저희 쪽에 MP3 음원을 넘긴 그 톰슨 멀티미디어 맞습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톰슨 멀티미디어를 잊을 리가 없었다. 특히 MP3 특허 협상 때문에 만났던 티에리 브르통 이사를 비롯한 톰슨 이사진과 실무진들을 말이다.
‘지금쯤이면 MP3 음원의 가치를 알 때가 되었을 거야. 아마 배가 많이 아프겠지.’
그 자신이 MP3 산업을 무려 7년 가까이 앞당겼다.
MP3 특허료 수익이 어느 정도인지 안다면 꽤 쇼킹할 것이다.
더욱이 그는 대운 전자의 톰슨 멀티미디어 인수가 실패하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이 인수합병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몇 년 후에 톰슨 멀티미디어가 새롭게 부활한다는 점이다.
‘은행 돈으로 문어발식 장사를 한 것이 문제지. 대운의 판단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란 말이겠지.’
선택과 집중.
쉬운 것 같아도 선택을 잘못하면 패가망신한다.
어쩌면 대운 그룹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무리수를 뒀을 것이다.
최민혁은 대운 그룹의 몰락 과정을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쪽은 어때요?”
“최 회장님은 일단 필리핀 공장을 계속 확장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용욱 회장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이미 기존에 검토한 계획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최민혁 실장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그 역시 손자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는 정석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또한 최민혁이 원하던 것이었다.
“오, 그래요?”
“네. 아무래도 자금이 넘친다고 하지만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서 관망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다만 필리핀 공장은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합니다. 수익이 보장된 곳이니까요.”
실제로 선택과 집중을 택한 KM 그룹이 투자를 대폭 늘린 계열사는 역시 KM 산업이다.
이런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KM 산업의 매출은 계속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KM 전자 계열사의 러브 콜을 받은 덕분에 매출은 더 늘어났다.
여기에 최영란 본부장이 비메모리 사업 쪽을 멋지게 론칭시킨 덕분에 미래 성장 엔진까지 만들었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의 영향으로 KM 산업에 대한 평가는 꽤 좋았다.
부채 비율을 대폭 줄인 것 역시 빼놓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KM 산업이 반도체 장치 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갖은 실책에도 KM 산업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KM 산업이 잘나가면서 이 수혜를 받았던 셈이다.
물론 이건 최문경 부회장이 물밑에서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 쪽에 손을 써서 이 KM 산업의 성장은 자신 덕분이라고 몰아갔다.
최영란 본부장을 끌어들인 것 역시 자신이 고심한 결과였다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도 이 점에 대해서는 감탄했다.
“대단한 양반이네요.”
조성돈 팀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최 부회장이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면 실적 때문에 의기양양해서 우리 쪽을 살펴볼 여유가 넘쳐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이번 오성 전자 일도 시작은 권재홍 비서실장 때문이니까요.”
정확히는 권재홍 비서실장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번 일의 큰 그림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최민혁 자신이었으니까.
최민혁은 그 과정에서 온갖 꼼수(?)를 다 썼기에 굳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송도연을 띄우기 위한 노이즈마케팅 계획도 착착 진행 중이었다.
그는 차라리 최문경 부회장이나 오성 전자가 분발하기를 바랐다.
그는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정세를 다시 한번 천천히 살폈다.
주변 일이 다 동떨어진 것 같아도 면밀하게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도 이번에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바로 한국 저작권협회 쪽이었다. 언제 한번 손을 써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긴 했으니, 차라리 잘된 셈이다.
“한국 저작권협회 쪽은 신경을 써서 살펴보세요. 그들도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다른 차선책을 찾겠죠. 이번 일도 그런 선상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박상기 차장에게 따로 지시해 놓겠습니다.”
“아뇨. 단순히 지시하는 것만으로는 곤란합니다. 그들을 최대한 이용하여야 합니다. 이번 타이밍은 놓치기 아깝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악착같이 달려들도록 해야 해요. 그러려면 미끼를 빼먹으면 안 됩니다.”
“…오성 전자의 행보와 같이 그들의 행보도 면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요. 다만 굳이 이제는 서두를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지켜보다가 과실만 먹으면 됩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음원 서비스 하나만 놓고 보면 안 됩니다. 콜린스 사업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권이 다 결합해서 생기는 일이니까요. 마케팅 쪽에도 그런 점을 분명히 주지를 시키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송도연’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골치가 아파서 이마를 잡았다. 그는 이번 일이 결코 가볍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최 실장님이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로서는 MP3 산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는 것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MP3 산업의 족쇄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저작권 문제였기 때문이다.
* * *
KM 전자 마케팅 팀은 정신없이 이번 일을 정리하기 바빴다.
최준형 과장 역시 굳이 정보를 숨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최근 기획 팀과 같이 공조하면서 얻은 정보를 원점에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번 일은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오광수 한국 음원 협회장의 태도부터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 일은 냅스트 소송은 물론, 에플의 차세대 제품과도 연결된다.
오성 전자가 굳이 이 일에 집착하는 것은 이미 시행착오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준형 과장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대로 추론만 해서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여러 대상을 선정해서 고민하다가 마침 KM 그룹에 있다가 오성 전자로 이직한 임권수 부장에게 연락해서 만났다.
이 자리에는 황광수 차장도 같이 나왔다.
세 사람은 갈빗집에 들어가서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KM 그룹 생활이 어쩌고, 최문경 부회장 욕도 좀 하고 말이다.
거기에 최민혁 실장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직장 생활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들은 그저 평범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물론 최준형 과장은 이번 일로 다시 한번 인센티브를 노렸고, 임권수 부장은 이번 성과를 토대로 오성 전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것 같아도 내심 그들의 속내는 저마다 피 말리는 기분이었다.
임권수 부장은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만큼은 태도를 달리했다.
“솔직히 전 최 실장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 몰랐습니다.”
늘 계산적인 황광수 차장 역시 최민혁 실장 이야기에는 빠지지 않았다.
“솔직히 불가사의한 일이지 말입니다.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 이름만 나와도 설설 길 정도이니까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술을 좀 먹어서 그런지 황광수 차장의 목소리가 꽤 높았다.
최준형 과장은 그제야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시작은 최문경 부회장 쪽에서 시작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성 전자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이 일에 달라붙는 겁니까?”
임권수 부장이 타박했다.
“콜린스 사업부 인수 때문 아닙니까?!”
“그 문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계속 나왔던 이야기인데요. 별다른 것이 있습니까?”
“뭐, 미래 기술 지분 이야기도 빼놓기 어렵네요. 우리 오성 전자에서 핸드폰 사업 투자를 얼마나 늘렸는지 안다면 그런 이야기를 못 할 겁니다.”
“하지만 단말기 배터리는 일본 업체서 이미 수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지금 수량이 얼마 되지 않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다릅니다. 세계적 업체 간의 경쟁이 악화하는 순간에 핸드폰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글로벌 핸드폰 업체 간의 갈등은 불과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지금 봐서는 제 살 깎기 경쟁은 길어야 2년 안팎이다.
그 이후는 모바일 산업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 사업에 관심이 있는 대기업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수익은 크게 수천억 이상도 차이가 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들이 핸드폰 표준을 가지고 계속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것이다.
최민혁 실장이 이미 다 해놓은 CDMA 사업권도 붕 떠버린 이유다.
최준형 과장은 두 사람이 푸념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보자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하긴 오성 전자가 바보는 아니지. 최민혁 실장님의 행보를 두고만 봤을 수는 없지.’
이제야 이번 일이 왜 이런 식으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있었다.
오성 전자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자 그것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 것뿐이다.
그 과정에서 주목을 받은 것이 바로 송도연이었고 말이다.
‘다만 이들도 최민혁 실장님이 그리는 큰 그림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 하긴, 그건 외부에서 내부 정보를 캐내는 게 아니고서야 알기 어렵겠지.’
이들이 이 자리에 나온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KM 전자가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최준형 과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잘 알기에 굳이 정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힌트를 줬다.
“최 실장님이 굳이 연습생까지 데리고 미국으로 간 것은 그만큼 그 일이 미래 기술 지분이나 콜린스 사업부 매각보다 중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킨 채 최준형의 입만 주시했다.
하지만 최준형은 이번 일의 초점을 ‘송도연’에게 계속 맞추었다.
“저희 마케팅 팀도 기획 팀이 관리하는 송도연 씨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좀 더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이 문제만 잘 끝나면 다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겁니다.”
황광수 차장은 입을 다문 임권수 부장을 대신해서 자잘한 질문을 계속했다. 하지만 최준형 과장은 오성 전자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만 하면서 말을 피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평행선만 그리다 보니 서로 얻는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도대체 최준형이 왜 자신들을 만나자고 한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짜증 나네.’
최준형 과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는 오성 전자가 얼마나 달아올라 있는지 이번에 확실히 안 것이었다. 이거라면 앞으로 있을 콜린스 사업부 매각에도 제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잘만 하면 크게 한 것 할 수 있을 것 같아.’
* * *
임권수 부장은 권태성 실장에게 KM 전자의 사정을 보고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 역시 이미 안재운 전무가 미국에 있는 최민혁 실장과 곧 만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최준형 과장 말을 마냥 무시하기는 곤란했다.
“일단 지금은 서울 프로덕션 쪽 인사를 만나서 그쪽에 힘을 쏟아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이 문제로 자칫 최민혁 실장과 대립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꼭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그냥 광고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추문이 터져도 나쁘지는 않았다.
협상 과정에서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임권수 부장이 강덕수 실장을 직접 찾아왔다.
“오성 전자 기획3팀 임권수 부장입니다.”
“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