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
‘그런데 좀 이상하군. 비용 절감 때문이라는 건 알겠는데, 굳이 최 실장님의 자기 평판이 깎일지도 모르는 리스크까지 부담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잖아. 그만큼 중요한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다.
최민혁 실장은 지금도 잘나간다. 앞으로도 계속 잘나간다. 그리고 이후로도 잘나갈 수밖에 없다. MP3 특허 로열티가 최근 입금되었기 때문이다.
그 금액만 무려 1,300억이 넘었다.
KM 전자란 회사는 적어도 30년 안에는 망할 리가 없었다.
그런 회사의 수장인 최민혁 실장이 굳이 무리수를 둬야 할까.
‘결국 지금 벌어들이는 이익이 하찮을 정도로 뭔가 더 큰 게 있다는 거지.’
최준형 과장의 추리는 마냥 끝을 모르고 뻗어 가는 대신 과거를 되돌아봤다.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MP3 원천특허를 얻기 위해서 움직인 것을 기억해 냈다.
이미 MP3 원천특허 이슈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MP3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면 상황이 좀 다를 것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심모원려를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이를 힐끗 쳐다본 최주호 부장은 경악한 마케팅 팀원들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랐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람, 최준형 과장만은 달랐다.
“최 과장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은데, 한번 이야기를 해봐.”
최준형 과장은 자기 밥그릇을 남과 나눌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 저도 똑같습니다.”
최주호 부장이 결국 최준형 과장을 타박했다.
“그러지 좀 마. 혼자 다 먹으려다가 결국 배탈이 날 테니까.”
“그거야…….”
최준형 과장은 귀신같은 최주호 부장의 행동에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최주호 부장은 능력이 그렇게 특출난 편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장난 아니었다.
최훈열 전무 집권기에도 잘 살아남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사이에 그 흔한 뇌물수수 같은 비리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의 생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최주호 부장은 진지했다.
“최 과장, 회사 생활 오래 하고 싶지? 그러면 동료를 적으로 만들지 마. 조직은 혼자 굴러가는 것이 아냐. 동료들의 도움이 필요해.”
“흠.”
F50 페라리 때문에 말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아내조차 처음에는 ‘미친 놈’이라고 욕설까지 퍼부었을 정도이니까.
최 부장은 다른 마케팅 팀원을 대신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최 실장님이 노리는 것이 있는 것 같아. 나도 솔직히 궁금해. 내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최민혁 실장님이 이런 일까지 굳이 벌일 필요가 있나 하는 거야.”
마케팅 팀의 분위기가 그제야 바뀌었다.
확실히 이번 일은 무리수였다.
굳이 최민혁 실장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최준형 과장은 눈치를 봤다. 그는 갈등하다가 결국 욕심을 버리고 말았다.
“송도연이란 가수가 부르는 노랫말 말인데요. 일반적인 노래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슈가 될 만한 음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쉽게 말해서 단순한 노래라면 대중이 그냥 듣고 휙 넘깁니다. 그런데 미국이 들썩일 정도라면 상황이 좀 다르죠. 더욱이 이번 음원은 영어 아닙니까. 그렇다면 빌보드를 노린다는 이야기죠.”
다만 그도 송도연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오를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상식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특히 미국 음악계를 흔들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듣는 마케팅 팀들조차 의아한 눈으로 최준형 과장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침묵.
다들 머릿속으로 최민혁 실장과 이번 일을 정리하기 바빴다.
하지만 눈치 빠른 최주호 부장도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단단히 훈련을 받았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자네는 송도연의 음원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기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
“…….”
최준형 과장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설마 그렇게까지 될까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최민혁 실장님이 미국까지 가서 작업할 리가 없으니까.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까지 이용하려고 할 이유가 없잖아.’
최주호 부장은 말하면서도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황당한 실적들을 떠올렸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보인 능력이라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중얼거렸다. 다만 최준형 과장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고서야 조성돈 팀장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했다.
[김 대리, 저게 가능할까?]
[글쎄요. 빌보드 차트 순위권 입성이라니.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게 되겠습니까?]
[하긴 인종차별이 가장 기본적인 문제일 테니.]
일단 동양인을 미국 사회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다음은 역시 음악적인 재능이다.
이제 고등학생인 여자가 과연 기라성 같은 미국 가수와 경쟁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역시 최민혁 실장님이 하는 일이라서 말입니다. 이게 마냥 허황된 이야기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역시 최민혁 실장 이름이 나오고서야 기획 팀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들 상식으로 최민혁 실장은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재벌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종족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마케팅 팀원들은 서로 지방방송만 하면서 상황을 파악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씩 깨달았다.
최준형 과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최주호 부장을 쳐다보았다.
최주호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방향 자체는 팀원들이 이해한 것 같았지만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사실 정작 자신조차 최민혁 실장의 의도에 의구심을 가졌으니까.
“최 과장.”
“넵.”
“할 수 있겠어?”
“이미 최민혁 실장님에게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따라야죠. 되고, 안 되고는 차후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최주호 부장은 혀를 찬 채 힐끗 마케팅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 생각은?”
“…….”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상상의 날개를 편 것은 좋았는데, 그게 가능하다고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 밀어붙이는 일은 MP3 특허를 사들일 때부터 준비한 일로, 그들의 인식을 아득히 벗어난 일이었다.
그 누가 냅스트 소스까지 퍼뜨려서 음모를 꾸미겠는가.
애초에 이거 하나만 놓고 봐도 그들은 최민혁 실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준형 과장은 이들과는 확실히 생각 자체가 달랐다.
“휴우, 어쩔 수가 없어. 이봐, 최 과장, 일단 한번 기획안을 올려봐. 다만 이번 일은 다른 팀원도 같이 붙어서 진행해. 디테일 면에서 차이가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마케팅 팀원들의 분위기에서도 질투나 시기심은 보이지 않았다.
최준형 과장의 태도 때문에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최준형 과장은 그제야 만족했다.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성과보다는 이번 일 자체가 그에게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거 진짜 재미있겠어. 가만, 시작은 역시 비서실부터 파봐야겠지? 우리 부회장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 * *
권재홍 비서실장은 곧 비서실 인원을 동원해서 최문경 부회장이 한 지시를 하나씩 철저하게 살폈다. 이번에는 빠진 것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시작은 물론 송도연부터였다.
그는 물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마침 송도연의 친구 이미경의 소속사인 서울 프로덕션은 한 가지 문제 때문에 홍역을 앓았다.
서울 프로덕션 소속사 가수 노래가 일본 노래인 오마츠 닌자를 표절했다는 입방아에 올랐다.
서울 프로덕션은 이 일 때문에 난리가 났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바로 서울 프로덕션의 실무자인 강덕수 실장을 만났다.
강덕수 실장의 도움을 얻어서 이미경이 처해 있는 상황을 확인했다.
그 자리에 호출당한 이미경은 강덕수 실장 때문에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다 했다. 그녀는 여전히 조건 만남에 관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분명히 조건 만남 맞아요!”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미경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는 이미경을 내보낸 후에 강덕수 실장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덕수 실장 얼굴은 흔히 말하는 드라마의 악역과 비슷했다.
그는 눈빛부터가 조폭 냄새를 풍겼다. 다만 그렇다고 대놓고 조폭처럼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말을 안 듣는 가수에게만 손을 쓸 뿐이다.
다만 그는 KM 그룹이 어떤 회사인지, 권재홍 비서실장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았다.
안 그래도 표절 시비 때문에 기획사가 휘청하는 시점에서 도움을 청하기 딱 좋았다.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권재홍 비서실장은 상대가 연예인 접대 로비에 대한 간접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눈살부터 찌푸렸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최민혁 실장과 송도연 연습생과의 관계입니다. 둘 사이가 깊은 관계가 아니라면 미국까지 같이 갈 이유가 없습니다.”
강덕수 실장은 의미심장하게 웃고 말았다. 상대가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 바닥에는 늘 있는 일이니까.
“그 내막을 파헤쳐 달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셈입니다. 만약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앞으로 우리 최 부회장님이 서울 프로덕션을 밀어줄 겁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강덕수 실장도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가 최민혁 실장인데, 이게 좀 걱정스럽습니다.”
강덕수 실장 역시 최민혁 실장을 모를 수가 없었다. 요즘 TV에서도 뜨겁게 주목받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니까.
특히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 실장 사이의 대립 관계는 찌라시에서도 많이 나온다.
지하철 판매장에 흘러 다니는 황색 언론에서도 두 사람을 첨예하게 언급할 정도였다.
두 사람의 갈등은 막장 드라마처럼 말이 나오고 했다.
만약 최문경 부회장의 제안을 받는다면, 최민혁 실장과 척을 져야 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실상 이미경 때문에 최민혁 실장을 조사한 후에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과 관련된 뜬소문은 상상을 초월한 자금 이야기도 있지만 얼마 전에 국세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음모론까지 다양했기 때문이다.
‘돈이 문제야. 그것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고 있다는 거지.’
그 돈이면 자신을 매장하게 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교활하게 눈알을 굴리는 강덕수 실장의 태도에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그렇게 길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미국에 가 있어서 큰 리스크는 없을 겁니다.”
“당분간은 한국에 안 온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권재홍 기획실장은 기획사라면 흔히 하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고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송도연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을 원했다.
최민혁 실장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송도연의 이미지가 박살이 나면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강덕수 실장을 믿지 않았다. 결국 그가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MP3 음원과 기획사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것으로 압니다. MP3 음원이 팽창하면 당장 중소 기획사는 다 망하고 말 겁니다. 그쪽 기획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강덕수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조사하면서 MP3 산업에 대해서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사실 그 여파를 당장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앨범 판매 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 표절 이슈가 터지기 전에 그쪽 가수 앨범 판매량이 백만 장이 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만약 MP3 음원이 일상화되면 누가 앨범을 비싼 돈 주고 사려고 하겠습니까? 이건 제 부탁이 아니라도 그쪽에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번이 당신에게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알겠습니다.”
강덕수 실장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도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최민혁 실장이 지금 진행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을 들여다보고서야 자신이 이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아무래도 한번 진지하게 확인해 봐야겠어.’
권재홍 비서실장은 강덕수 실장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는 것을 보고는 만족했다. 그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아쉽기만 했다.
‘진작 이런 방법을 썼어야 했어.’
사실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은 이해관계 당사자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그들을 꼬드겼다면 일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