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
[김 이사님이 잘 아시겠지만, 차세대 배터리 개발 목표로 잡힌 일정은 5년 후의 일입니다. 지금 당장은 여력이 안 됩니다. 정 안 되면 일본 소니나 도시바 측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일본 업체의 반응도 과거와는 달랐다.
IPS-LCD로 뒤통수를 맞은 후에 한국 업체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제는 배터리 시장이 LCD와는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LCD 원천기술은 당시 일본이 한국보다 앞서 나갔다.
그런데 차세대 배터리 쪽은 달랐다.
이미 한국이 일본 업체를 앞선 것이었다.
사실 오성 그룹도 이미 시제품이 있다면 그나마 다른 답을 찾았을 것이다.
베끼면 되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차세대 배터리 특허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리튬폴리머 특허까지 말이다.
때문에 오성 그룹 윗선에서 부랴부랴 미래 기술에 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안을 찾으려고 했다.
이 차세대 배터리는 분명 대안이 있을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이 신이 아닌 이상 특허를 공장에서 제품 양산하듯이 찍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은 진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마구잡이로 특허를 출원했다.
그 특허 중에는 쓰레기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문제는 무시하기 힘든 핵심 특허도 같이 있다는 것이다.
오성 그룹 특허 팀이 이 특허를 분석하다가 제풀에 지칠 정도였다.
그래서 오성 그룹은 결국 특허 팀의 업무와는 별개로 다른 쪽으로도 파보았다.
그 과정에서 LC 화학이 먼저 손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다.
최민혁 실장이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배터리 분야까지 원천기술을 넓힐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갔다.
최민혁 실장이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결국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은 일방적으로 권태성 기획실장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겼다.
[권 실장, 당신이 일을 제대로 했다면 사전에 대비했을 거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룹 차원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것 아닙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일까 싶은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
권태성 기획실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룹 차원에서 업무 분장도 되지 않은 차세대 배터리로 계속해서 압박을 받으니, 기가 막혔다.
그는 또 최민혁 실장과 만나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과 만나서 이야기해도 허위거나 과장된 정보가 태반이다. 차라리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래도 뭔가 하기는 해야 해서 차선책을 선택했다.
바로 미래 기술 배종구 사장을 노린 것이다.
“배 사장은 뭐래?”
임권수 부장은 저기압인 권태성 실장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아니, 자기 소유 지분인데, 그걸 왜 자기 혼자 결정을 못 해!”
“최민혁 실장 때문에 고민하는 눈치입니다.”
“알아서 설득을 못 한 거야?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한 거야?”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배종구 사장이 지분을 내놓도록 설득하는 것이 자네 일이야.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결정해서 한 일이라면 최 실장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야.”
“배 사장의 태도가 워낙에 완고해서 쉽지 않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답답한 임권수 부장의 태도에 화가 났다. 그는 이대로 계속 소극적으로 나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 임 부장, 내가 KM 그룹 출신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잖아. 지금 회사 꼴이 어떤지 몰라?!”
“…압니다.”
“아니, 자네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지방 투신사는 수신액이 작아. 그래서 지금과 같은 불황에 더 큰 충격을 받아.”
“…혹시 구조조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잘 아는구먼. 이거 그룹 차원에서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야.”
“이, 이미 작년에 대규모 그룹 구조조정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 이동통신 사업의 세계 시장에 변화가 있으니까.”
세계 모바일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이 시장을 선점한 모토롤라, 노키아, 에릭슨이 서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치열한 가격 경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수익은 대폭 줄어들었다.
이들 모바일 업체의 주가는 작년 말에 추락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투매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런데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봤다.
“그래서 차세대 배터리가 문제가 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심각하겠군요.”
“아니, 그런 정도가 아냐. 오죽하면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도 괜히 최민혁 실장과의 트러블을 염려해서 눈치만 보겠나? 걔들이 자존심이 없어서 그러고 있겠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세계 핸드폰 시장의 격변은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도 큰 충격을 줬다.
임권수 부장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직 그 시장 규모가…….”
“아니, 달라. 당장 일본과 미국 모바일 시장만 해도 아날로그 제품이 대세야.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 폰으로 바뀌는 시점이야.”
“…CDMA가 문제군요.”
“그래. 원래는 유럽 표준인 TDMA가 주류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이미 CDMA 관련 시스템이 어느 정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할 곳도 ETRI잖아!”
“하면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일은 모두 의도된 것이나 마찬가지겠군요.”
그랬다.
오성 그룹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하나의 큰 그림에 따라서 일을 밀어붙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이 KD 통신 지분을 좀 더 늘려가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오성 그룹이 이제까지 조용히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
임권수 부장 역시 최근 CDMA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정치 난투극을 모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나선 덕분에 안정화 단계는 쉽게 넘어갔는데, 정작 그다음 단계에서 진흙탕 싸움 중이다.
그래서 그게 답답해 보였는데.
“…설마 전략 기획실에서 손을 쓴 겁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부분은 잘 모르는 일이야. 다만 중요한 것은 그룹 차원에서 선제 구조조정을 계획 중이란 거지.”
“…알겠습니다.”
“자네가 배종구 사장을 다시 만나서 잘 이야기해 봐. 필요하다면 백지 수표를 내밀어.”
“…네.”
* * *
배종구 사장은 최근 KMB-01 시제품을 출시한 후에 덩실덩실 춤을 췄다.
회사 생활이 이렇게 기분 좋을지는 몰랐다.
그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워낙에 회사 분위기가 뜨거워서 배터리 시장과 관련된 부분을 한 번 살펴는 봤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가 바로 셀룰러 폰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 팔려 나간 폰의 숫자는 대략 8천만 대 물량.
그런데 5년 안에 추가로 판매 가능한 숫자는 무려 4억 대 물량이다.
지금 이 폰에 적용되는 배터리는 여러 가지 한계가 존재하는 재래식 배터리다.
자신이 이번에 시제품으로 내놓은 리튬이온배터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몇 개를 팔 수 있을까?’
배터리 1억 개만 팔아 치워도 무려 5천억 매출이다.
심지어 이게 다가 아니다.
해를 더해 갈수록 핸드폰 판매 수량은 더 늘어날 테니 말이다.
윤종수 전무 역시 이런 점을 잘 알았다.
“당장 미국, 독일, 일본 주요 시장의 보급률이 낮은 상태임에도 이 정도 판매량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인구 대비 통신 보급률이 높은 유럽 역시 무시하기 힘든 시장입니다. 그쪽은 물론 TDMA 방식을 쓰긴 하는데, 배터리는 그 방식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결국 디지털 통신 표준이야 어쨌든 배터리는 별개의 문제였다.
전자 부품 연구소에서 이직한 허종식 팀장은 내심 ‘대박’을 남발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원천기술만 연구했을 뿐이다. 정작 차세대 배터리 시장이 어떤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저 미래 기술 오너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보고 잽싸게 회사를 옮겼다.
그런데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그는 아직도 지금 상황이 잘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론 호사다마라.
비서가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임권수 부장이 다시 회사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 혼자 오지 않았는데, 그들 중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도 있었다.
바로 오성 전자의 기획실장 권태성이었다. 마른 체격, 차가운 눈빛, 검은 정장을 한 권태성 실장은 군계일학처럼 눈에 띄었다.
수행하는 양복 소대 역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줘서 상대를 주눅 들게 하였다.
“아, 마,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크게 당황한 배종구 사장은 말을 더듬었다. 권태성 실장이 직접 자신을 찾아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오성 전자의 기획실장 본인이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그가 보통 다루는 프로젝트 규모가 수백억 단위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게 좀…….”
배종구 사장은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권태성 기획실장의 위치를 잘 안다. 소위 말하는 오성 전자의 두뇌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어지간한 중견기업은 그에게 찍히면 그날로 끝장이었다.
오성 전자와 거래 자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최민혁 실장과는 별개다.
미래 기술의 경영권을 쥔 사람은 바로 배종구 사장 자신이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물론 최민혁 실장을 염려해서 배종구 사장을 협박하거나 압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부드럽게 말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사장님이 가진 지분 20% 중의 일부입니다. 원하는 금액을 말씀하시면 그 금액에 맞춰 드리겠습니다. 주당 5만 원, 아니면 7만 원도 가능합니다. 필요하다면 10만 원까지 내겠습니다.”
남발되는 금액 제안.
하지만 현실적으로 배종구 사장은 그 제안을 들어주기 어려웠다.
“자, 잠깐만요.”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에는 한번 멋지게 갑질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권태성 실장과 대립하면, 결국 최민혁 실장에게 더 많은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오성 그룹에 지분을 넘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배종구 사장은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을 떠올렸다. 그때는 막 퍼준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올 시다였다.
물론 미래 기술 가치가 상승한 것은 최민혁 실장 덕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의 압박은 집요하면서도 느긋했다.
협박은 없었다.
오히려 친한 친구처럼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오성 그룹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이다.
배종구 사장도 마냥 이 제안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3%, 아니, 5%는 넘길 수 있습니다.”
“좋네요. 주당 10만 원이면 되겠습니까?”
그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그건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자기 분수를 아는 배종구 사장의 태도에 만족했다.
“서로 무리 없는 거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 오성 전자, 아니, 오성 그룹 차원에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설마 커피 한잔은 내주시겠죠?”
“무, 물론입니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최민혁 실장과 한 번 만나서 경험해 본 압박감을 다시 경험했기 때문이다.
* * *
배종구 사장은 권태성 실장과 협상을 끝낸 후에 쪼르르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이런,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이 가진 20% 지분 처분 권한은 사장님에게 있어요. 그걸 오성 전자에게 넘기든, 말든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하, 하지만…….]
[으음, 잘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미래 기술은 상장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지분을 홀로 다 소유해서는 곤란해요. 그건 사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분 가지고 이익을 얻는 건데, 제삼자가 뭐라고 하기 힘듭니다.]
[아.]
배종구 사장은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최민혁 실장은 지분 20%를 남긴 시점에서 그 부분은 손을 뗐다.
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왜 최민혁 실장이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성을 찾자 주식회사 상장 조건에 지분 요건에 제한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따라서 배종구 사장이 지분 일부를 오성 전자에 설사 넘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 지분을 얼마든지 인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