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
최민혁은 임권수 부장이 오두방정을 떤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특히 오성 전자 기획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을 보자 피식 웃고 말았다.
‘뭐, 사실 좀 늦은 감이 있지. 이제 와서 어쩔 건데, 하, 어이가 없지.’
움직이려면 벌써 몇 달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때는 그나마 가능성이 눈곱만큼은 있었으니까.
지금에 와서 손을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괜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할 필요는 있어서 오상현 과장을 호출했다.
“냅스트 관련해서 괜한 이야기를 주변에 하지는 않았겠죠?”
냅스트 소송 사태를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오상현 과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다만 최병연 소장님이 제가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따로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쓸데없이 입을 놀려서 문제를 만들지 마세요.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괜한 구설수는 사양이니까.”
최민혁이 걱정하는 것은 명성 따위가 아니다. 냅스트 소송을 일으켜서 미국 메이저 음반 업체의 뒤통수를 쳤다는 소문이 날까 염려했다.
미국 메이저 음반 업체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상현 과장은 이번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솔직히 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일을 했다는 것이 밝혀져도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물론이죠. 하지만 냅스트 소송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굳이 이런 일로 다른 사람 입에 제 이름이 오르내리게 할 수는 없어요. 귀찮아요.”
냅스트가 얼마나 혁신적인데, 귀찮다니.
비록 MP3 불법 공유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렇게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얼마든지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최민혁 실장으로서는 다를 수가 있었다.
‘하긴 실장님 명성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니까.’
솔직히 최민혁의 명성은 기업가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최민혁의 이름은 엔지니어 업계에서는 이미 혁신을 뜻하는 아이콘이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혹시나 싶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지적했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냅스트 때문에 미국 메이저 음반 업체가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는지. 그들이 진실을 알면 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겠습니까?”
“아, 네.”
오상현 과장도 이 부분만큼은 순순히 인정하고 말았다.
“좋네요.”
최민혁은 그제야 만족했다. 그는 냅스트 원저작권자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 * *
최민혁은 최병연 소장을 조용히 불러 냅스트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달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최병연 소장은 눈치가 빨라서인지 별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정작 조성돈 팀장이 기획 팀 내의 조사를 통해서 이 문제를 보고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왜 그런 표정입니까?”
“냅스트를 개발한 익명의 엔지니어에 관한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설마 그 배후가 저라고 생각하세요? 당시 전 그 일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냅스트 소스 개발이 그렇게 단순히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조성돈 팀장은 의아하기는 했지만, 딱히 더 묻지는 않았다.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일을 보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최민혁 역시 이 주제를 돌리기 위해서 슬쩍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차라리 IP 시티폰 쪽에 관한 이야기를 장승일 실장에게 해보세요. 제가 IP 시티폰 대안 기술 연구를 진행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부회장님을 자극할 생각이시군요.”
“아, 잘되었네요. 이왕이면 그 냅스트 소스도 제가 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IP 시티폰을 넣어 보세요.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아, 뜨거워’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정도 소문이라면 나쁠 것도 없어요. 어차피 그런 음모론은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도 나온 이야기이니까.”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이 진실을 말하는 건지, 거짓을 말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될지는 좀 걱정이었다.
‘설마 IP 시티폰이 망할까?’
* * *
한국 경제에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성 건설 도산 이후 불안은 시간이 갈수록 가라앉았다.
이게 가능한 것은 실제로 한국 기업이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년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라서 끊임없이 증가하니, 불안에 대한 우려가 가라앉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덕분에 정작 MP3 산업에 대해서 더 신경을 썼다.
그 역시 오성 전자 기획 팀이 날뛰는데, 이 정보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 정말 최민혁 그놈이 IP 시티폰 대안 기술을 검토 중이란 말이야?!”
권재홍 비서실장도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 역시 MP3 산업의 갑작스러운 부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 새로운 신사업은 나쁘지 않았다.
만약 최민혁 실장만 아니었다면 MP3 계열사 구성을 제안했을 테니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냅스트 소스를 공개한 이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번에는 진짜 화들짝 놀랐다. 그 역시 냅스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냅스트 소송은 국내 대기업에서 지켜볼 정도로 첨예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 그게 정말이야?”
“아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해서 말입니다.”
장승일 실장이 대놓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조성돈 팀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최민혁 실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KM 그룹 기획 조정실은 덕분에 이 이슈를 가지고 의견 대립을 했다.
더욱이 장승일 실장은 이 정보를 굳이 감출 생각이 없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이고, 조성돈 팀장이 넌지시 정보를 흘려달라는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서실에서 이 정보를 금방 알아챈 것이었다.
결국 IP 시티폰 사업을 이전처럼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김현탁 사장에게 연락해서 당장 약속을 잡아!”
* * *
최문경 부회장이 움직인 덕분에 KD 통신은 이전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다시 자신들을 노린다는 말에 정부에 대한 로비에 착수했다.
20만 원 단말기에 대한 생산 역시 속도를 올렸다.
손해를 감수하라고도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결국 시범 서비스 일정이 대폭 당겨졌다.
KD 통신이 총대를 메자 다른 시티폰 사업자 역시 힘을 합쳤다.
여기에 한국 통신은 저렴한 통신료라는 강점 덕분에 정치권의 도움을 받았다.
IP 시티폰 사업은 점점 속도를 올려서 결국 1년 앞서서 서비스가 진행되었다.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티폰 통화료는 시내에서 사용 시에 10초당 고작 8원에 불과해서 다른 통신 서비스 요금보다 비교우위에 있었다.
이 결과는 최문경 부회장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KD 통신 대주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제야 IP 시티폰의 성공을 확신한 것이었다.
따라서 샐로먼 브러더스의 움직임 역시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최민혁은 샐로먼 브러더스가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만족했다.
‘중국 역시 들어갔군.’
이제는 갑자기 이 사업을 이들이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오성 전자 기획실이나 장승일 실장의 움직임보다는 이 점에 더 주목했다.
“뭐라고요? 냅스트 소송에 제가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한다고요?”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냅스트 개발과 소송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더욱이 냅스트 개발과 관련해서는 그냥 되면 말고, 아니면 패스하는 식으로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믿는다는 것이 황당하기만 했다.
“정말 냅스트 소스를 제가 풀었다고 사람들이 믿는다는 말입니까?”
“…네.”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 실장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최민혁 실장이 냅스트 소스를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민혁도 내심 솔직히 당황했다. 설마 하는 식으로 막 던진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이걸 믿는 것이 황당하기만 했다.
조성돈 팀장은 역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들 실장님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일만 터지면 최 실장님 탓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이거 유명한 것도 골치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스티븐을 통해서 미국 메이저 음반 업체에 이야기를 해둬야겠어. 헛소문이라고. 설마 그 작자들이 증거도 없는 사실을 믿지는 않겠지.’
최민혁은 평소와는 달리 털털하게 웃었다. 좀 과장된 모습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과도한 최민혁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저, 정말 최 실장님이 냅스트 소스를 개발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냅스트 소송도 의도적으로 부추겼다는 말이잖아? 설마… 아니겠지.’
그가 생각해도 좀 너무 나갔다고 판단했다.
냅스트도 문제지만 냅스트 소송이 MP3 산업 성장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예측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아니겠죠? 솔직히 최 실장님이 냅스트를 개발했다면, 그 소스를 그런 식으로 그냥 공개할 분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계열사 하나를 만들어서 따로 관리하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하하하.”
최민혁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는 솔직히 진실이 밝혀져도 상관이 없었다. 소스만 흘렸다고 하면 되니까. 애초에 냅스트 소송은 자신과 무관했다.
‘굳이 선각자라는 이야기까지 들은 필요는 없지.’
“…그런데 왜 오성 전자 기획실이 갑자기 그런 허황된 문제를 조사한 겁니까?”
“아무래도 콜린스 사업부 인수와 최근 말이 나오기 시작한 MP3 산업에 대한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국내 MP3 업체가 외국 시장 개척을 서두르면서 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MP3 수출 분위기가 나쁘지 않나 보군요.”
“네. KMP-01은 아무래도 비싼 가격과 단일한 디자인으로 시장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가 추가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시장을 다른 회사가 파고들면서 일이 생겼습니다.”
“오성 전자가 MP3 출시에 앞서서 고민이 많은 것 같군요.”
“네. 아무래도 MP3 시장이 일반, 고급, 최고급 사양으로 나누어지는데, 포지션을 어떻게 둬야 할지 고민이 많은 눈치입니다. 특히 배터리 문제는 빼놓기 어려우니까요.”
최민혁도 기승전 배터리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 그래요.”
“KMP-01의 고질적인 문제는 사용 시간입니다. 사이즈 때문에 근본적으로 배터리 용량을 키우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KMB-01 덕분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성 전자도 이제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뛰어다닌다는 말이네요.”
“네."
“분위기가 좋네요. 오성 전자는 이제 배터리 쪽을 파고들면서 콜린스 사업부 인수를 적극 타진할 테니까요. 오성 전자에게서 눈을 떼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성 건설 도산 문제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서 연쇄 도산 우려는 살짝 수그러든 상황입니다. 이건 어떻게 접근할까요?”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한국 기업 연쇄 도산은 정해진 운명입니다. 우성 건설은 일종의 프롤로그죠. 그 점을 잊지 마세요. 바뀌는 것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확고한 태도에서 위기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겪지 않았다면 반박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X 리포트를 만든 입안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고서에 불과했다. 설마 X 리포트의 예언대로 일이 진행된다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경제 위기 여파가 어느 정도이기에 저런 말씀을 하는 걸까?’
* * *
권태성 기획실장은 그제야 진지한 얼굴로 다시 배터리 문제를 살폈다. MP3 상황을 봐서는 배터리 특허 라이센스를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오성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인 오성 전관은 이미 이 배터리 사업과 관련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 역시 LC 화학을 통해서 뒤늦게 차세대 배터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다만 최근에 와서 오성 전관은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결국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 이 사실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