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4.
“네, KM 전자가 생산을 맡기는 했지만, LC 전자 측에서도 일부 협상을 진행 중입니다.”
KM 전자의 생산 능력으로는 에플의 아이컴 개발 물량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 정보를 안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은 골머리를 앓았다.
사실 콜린스 사업부를 그냥 인수하면 간단히 다 해결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콜린스 사업부에 대한 최민혁 실장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본인 입으로 매각한다고 가짜 수표만 남발하면서 정작 계약 자체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
본인 입으로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언론 인터뷰까지 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시민조차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혀를 내둘렀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은 하는 거야?]
[보는 내가 다 짜증이 난다.]
[언제까지 매각을 질질 끄는 거지. 아무리 몸값을 키울 목적이라고 해도 너무한 것 아냐.]
[역시 뻥카였어. 아무래도 오성 전자를 길들이기 위해서 수작을 부린 거야.]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가끔 뉴스 인터뷰에서 ‘우리 KM 전자는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다!’라고 그럴듯한 이야기만 남발했다.
정작 그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했으면, 최소한 담당자는 만나야 하지 않나.
최민혁 실장은 그러지도 않았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이야기였다.
제삼자가 봤을 때는 최민혁 실장 저놈의 행동에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일이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 나온 이야기다.
다만 최민혁 실장도 양심은 있어서인지 최근 기자 인터뷰에서 정작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주야장천 주장하면서도 대주주의 반대라는 핑계를 내세웠다.
“자칫하면 회사에 손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거 배임 혐의로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기자도 어이가 없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배임 혐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방식입니다. 전 무리가 될 행동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면 주주를 설득하면 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주주들 반응이 애매합니다.”
실제로 대주주 중에 많은 이들이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반대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콜린스 사업부는 KM 전자에게 최소한 3~4년은 꾸준한 수익을 보장하고, 앞으로 7~8년 역시 회사에 손해를 끼칠 사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치 있는 알짜 사업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포기한다.
대주주가 찬성할 이유가 없다.
그나마 워낙에 실적이 많은 최민혁 실장이기에 미친놈이라고 욕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
최민혁 실장이 꾸준히 콜린스 사업부는 KM 전자의 미래 비전과 맞지 않다는 점을 피력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먹혔다.
지금은 과연 콜린스 사업부가 KM 전자에 적합할까란 이슈가 나오는 중이었다.
만약 오성 전자가 콜린스 사업부를 얻는다면 그 가치가 3~4배로 증폭하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하는 것이 오히려 KM 전자에게 있어 이익이다.
그리고 오성 전자 전략 기획실에서는 얼씨구나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꾸준히 KM 전자 주주를 만나서 이 부분을 설득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 같은 경영의 신이 콜린스 사업을 매각해야 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피력했다.
지금에 와서는 KM 전자 주주들 역시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의 김진석 이사가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최민혁 실장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에게 무슨 주장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겁니다. KM 전자 주주에 대한 설득 작업이 마무리 단계이니까.”
권태성 실장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 역시 KM 전자 주주들을 꾸준히 만났다. 심지어 외국인 대주주와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래요.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 역시 진땀을 뺐으니까. 지금까지 KM 전자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것도 이 작업 때문이었습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권태성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진석 이사 말을 듣고서야 전략 기획실이 지금까지 놀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말이 많이 나왔으니까.’
다만 그는 솔직히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이 전략이 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저는 전략 기획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지원만 하고 싶습니다.”
김진석 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콜린스 인수 합병의 최전선 사령관이 권태성 기획실장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김 이사님이야말로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습니까? 전략 기획실은 왜 모호한 태도만 취합니까. 대체 KM 주주 회유에 관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겁니까.”
“그만큼 보안이 중요한 일입니다. 더욱이 KM 전자에 대한 최민혁 실장의 장악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도 윗선에서 결정이 난 일을 진행하는 것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권태성 실장은 김진석 이사의 말을 아예 믿지 않았다. 이번 일도 잘 보면, 전략 기획실 전체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들이 앞세운 이는 김진석 이사.
만약 잘되면 오케이다.
그런데 일이 잘못되면 김진석 이사 책임이다.
권태성 실장 자신은 덤이고 말이다.
더 이상한 점은 기존 김진석 이사의 업무는 인수합병과는 관련이 없었다.
‘씨발 새끼들.’
권태성 실장은 뿔테 안경을 쓴 김진석 이사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김진석 이사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직장인 타입으로 능력도 좋았다.
다만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인맥.
오성 그룹 일가와는 전혀 무관한 점이 그의 약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너무 소심하다는 점이다.
사실 김진석 이사의 이런 성향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것이다.
이미 본인 직무 영역을 뛰어넘어서 하는 일도 그렇다.
이게 잘못되면 결국 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갈 일이다.
하지만 김진석 이사는 이런 권태성 실장의 내심을 몰랐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권태성 실장님의 책임 아니겠습니까?”
“…….”
권태성 기획실장은 내심 이 멍청한 인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가 아무리 설득해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전략 기획실 포지션이 어떤지, 오성 그룹 윗선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심지어 최민혁 실장이 왜 상황을 이렇게 비비 꼬아서 비빔밥으로 만들어놓았는지 등등 말이다.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어.’
그런데 이런 차에 갑자기 튀어나온 차세대 배터리.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일을 진행하면서 대놓고 선물 상자를 터뜨린 적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초합금 강철 고슴도치였다. 건드리면 결국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전략 기획실에서는 초합금 강철 고슴도치를 직접 건드리기보다는 김진석 이사를 내세운 것도 그런 이유다.
거기에 권태성 실장이라는 용병까지 이용해서 과실만 빼먹으려고 한 것이다.
결국 자칫하면 두 사람 다 토사구팽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는 결코 그런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리에서 더 나아가서 부사장, 사장, 심지어 부회장까지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콜린스 사업부 인수 문제를 지금처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결과를 내야 했다.
‘이 멍청한 인간 때문에 골치네.’
* * *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의 계획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과실만 빼먹으면 된다.
김진석 이사가 일을 잘하면 그에게 보상을 해주면 된다.
권태성 실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과연 계획대로 될까.
그게 뜻대로 되었다면 지금까지 오성 그룹이 KM 전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호구 짓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즉, 결과가 그렇게 좋게 끝날 리가 없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보면 절대로 손해를 볼 짓은 하지 않았다.
콜린스 사업부에 가치가 있다면 그만한 자금을 원한 것이 분명했다.
조 단위의 자금을 말이다.
사내 정치 논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권태성 기획실장은 덕분에 최민혁 기획실장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조사했다.
최민혁 실장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든 행적을 다 조사했다.
이렇게까지 골몰하는 데는 그의 성향 탓도 있었다.
실상 최민혁 실장 스토커가 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결국 그 이유를 짐작해 냈다.
‘가만, 지금 KM 전자에서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하고 나면 매출이 격감하잖아.’
물론 현금 2조 가까운 돈이 생긴다고 하지만 그게 꼭 KM 전자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과연 KM 전자 대주주는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볼까.
부정적이라고 봐야 한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KM 전자 주주들에게 몇 달에 걸쳐서 꾸준하게 손을 쓴 이유였다.
자금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자금을, 납품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납품을, 오성 이름이 필요한 이들에게 오성 이름을,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갈 협박장을 줬다.
KM 전자 주주 처지에서는 오성 그룹의 이 뜨거운 선심 공세를 거절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KM 전자의 콜린스 사업부를 둘러싸고 아주 복잡한 역학 관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권태성 실장은 결국 인내심을 가진 채 이 일을 차분하게 주시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모든 연결 고리를 조사했다.
사실 우성 건설 도산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미래 기술과 관련해서 최민혁 실장과 협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내수 위기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문제는 도산이 우성 건설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견 건설업체인 청암 건설이 도산했고, 연남 건설 역시 파산을 피하지 못했다.
금호 건설이나 라인 건설과 같은 건실한 업체 역시 자금 압박에 휘청했다.
이제는 건설 업종의 어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은행이 신규 대출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저축은행은 고율의 금리를 업체에 강요했다.
화들짝 놀란 권태성 기획실장은 전략 기획실의 김진석 이사에게 요청해서 이 상황에 대해 파악하라고 독촉했다.
“이 위기가 이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단기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장기적으로 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의 김진석 이사는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솔직히 신이 아닌 이상 미래를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한창 무섭게 성장하는 한국 경제를 고려할 때 위기 상황으로 가는 것을 예측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저 침묵할 따름이다.
이 과정에서 ‘X 리포트’가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은 정말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오성 그룹이 물밑에서 KM 전자 주주를 상대로 설득하면서 최민혁 실장을 불구경하듯이 지켜본 이유였다.
겉으로 조용히 침묵한 권태성 기획실장은 지금 상황이 짜증스럽기만 했다.
‘사람 미치게 하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손가락만 빨 수는 없었다. 그는 오성 전자 기획실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서 오성 그룹 계열사 쪽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뭔가 있어. 전략 기획실에서도 모르는 다른 사실이 있어. 최민혁 실장이 지금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이것 때문일 거야.’
* * *
권태성 기획실장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아무리 기획실 인원을 총동원해도 사건의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저축은행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뒤에서 조금씩 손을 댄 덕분에 위기 상황은 그럭저럭 풀려갔다.
우성 그룹 연쇄 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금 시장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하청업체 부도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채권단의 빠른 행보가 영향을 준 것이다.
그건 총통화 증가율에서도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