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
배종대 과장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순순히 수긍했다.
“건설 경기 침체는 위기를 맞자 그대로 무너진 거라고 봐야지. 운 좋게 시기를 잘 탄 것은 좋았지만, 위기 대처 능력은 없었어. 하지만 우리 최 실장님은 이와는 전혀 다르지. 아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서 캐쉬 카우를 만들어내니까.”
오랜만에 나온 최민혁에 대한 칭찬.
정성근 대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웬일로 최 실장님을 옹호하십니까?”
“야, 난 사실을 왜곡하지 않아. 최 실장님 선견지명이 대단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어련하시겠습니까.”
정성근 대리만 이죽거릴 뿐.
막 출근해서 자리를 잡던 기획 팀원들은 다들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건설 도산 이후에서야 최민혁 실장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전에 최민혁 실장이 뿌려놓은 씨앗이 하나둘씩 발아하기 시작했다.
박상기 차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건설만이 아니야. 덕산그룹 역시 40개가 넘는 계열사를 가지고 재벌 놀이 하다가 한 방에 간 경우이니까. 우리 KM 그룹은 오히려 그 반대잖아. 모든 계열사를 다 정리하고 오히려 10개로 줄였으니까. 이것 역시 최민혁 실장님이 주도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최승진 사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안산 공장에서 대기 군번 중에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언론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의 대다수는 제삼자 입장이다.
현장의 기획 팀 이야기와는 느낌이 달랐다.
하지만 기획 팀이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하는 지시가 워낙 생뚱맞아서 모르면 신입 사원의 경우 회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승진 사원은 확실히 최민혁 어천가를 듣자 그저 숭배 어린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되새겼다.
조성돈 팀장은 분위기가 좋아지자 구경만 하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실장님이 오성의 권태성 실장을 이용하려는 것 같아.”
박상기 차장이 혀를 내둘렀다.
“결국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다른 기업을 자극할 생각인가 보군요.”
“네. 오성만큼 노이즈마케팅용으로 이용할 만한 상대가 또 없지 않습니까. 배터리 기술 생산 시설도 탄탄한 기업이니. 아마 위기감을 느낀 업체도 지금처럼 미적거리지 못할 겁니다.”
오성 그룹.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기업이다.
그런데 KM 전자 기획 팀은 믿을 수 없게도 그 대단한 오성 그룹의 핵심 계열사 오성 전자를 마치 동네 양아치인 양 취급했다.
오성 그룹 이야기가 나오자 최승진도 기획 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성 전자는 한때 그가 가고 싶었던 최고의 기업 중의 하나였다.
사실 오성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LC 전자나 HY 전자가 그다음 순서다.
결국 다 떨어지고 KM 전자에 지원해서 붙었다.
아무래도 지방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박광민 사원이 슬그머니 옆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다.
특히 배터리 특허, 미래 기술과 관련된 복잡한 이야기를 말이다.
“…저, 정말 대단합니다. 설마 일본 소니나 오성 전자를 끌어들여서 압박하다니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럴 수밖에.
다른 신입 사원이 들었다면 누구라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KM 전자 기획 팀은 늘 그래 왔다.
지금은 과거와는 또 스케일이 달랐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가 뜬금없지 않았다.
박광민 사원은 바로 이런 점을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그렇죠? 놀랍죠. 그게 바로 우리 최민혁 실장님의 솜씨예요.”
조성돈 팀장은 힐끗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박광민 사원의 행동에 꽤 만족했다. KM 전자는 과거의 내수용 기업이 아니다. 에플과 같은 미국 기업을 계열사로 거느린 글로벌 기업이었다.
지금은 오성 전자와 협상 내용을 정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는 각자 팀원에게 분담해야 할 일을 정했다. 물론 기존 프로젝트 진행 현황도 확인했다.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중에는 MP3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다만 그는 신입 사원에게도 발언 기회를 주었다.
“승진 씨는 혹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어?”
최승진은 조성돈 팀장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그가 아무리 숙맥이라도 안산 공장에 있을 때 들은 것이 있었다. 그중에 한 가지 사실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저기 제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혹시 콜린스 사업부 매각설이 돌았는데, 그게 사실인지, 뜬소문인지 알고 싶습니다.”
배종대 과장이 바로 반박했다.
“그건 가짜 뉴스야. 최 실장님이 의도적으로 시선을 끌기 위해서 소문을 흘렸다고 봐야지.”
하지만 배종대 과장과 거의 동시에 입을 연 조성돈 팀장은 좀 달랐다.
“엉? 콜린스 사업부 매각설?”
애매한 대응.
배종대 과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그제야 조성돈 팀장을 불안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시간이 제법 지나서 이제는 루머인가 싶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만큼은 콜린스 사업부 매각이 결코 단순한 찌라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최승진은 그제야 용기를 냈다.
“그때 이후로 다들 쉬쉬하는데, 정작 콜린스 사업부 매각이 없던 일이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공장에서 한때 난리가 났습니다.”
고민에 사로잡힌 공장 노동자의 모습을 최승진은 결코 잊지 못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조성돈 팀장은 부정하기는 했지만, 박상기 차장의 눈빛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만약 오성과 협상을 진행한다면 콜린스 사업부 매각도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하기 때문이다.
‘설마 오성 그룹이 아직도 콜린스 사업부 인수에 적극적일까. 아니, 최 실장님은 여전히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염두에 뒀을까.’
그로서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다.
* * *
최승진 사원이 쏘아 올린 질문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하려면, 지금도 좀 늦은 감이 있었다.
더욱이 오성 그룹이라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다.
생각보다는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고작 4,000억 선이면 쌍용 그룹을 인수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오성 그룹, LC 그룹의 자동차 사업 인수설이 나돌았다.
더욱이 올해 증권거래법 개정이 문제였다.
외국인 역시 국내 기업을 인수합병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국 대기업 대다수는 적대적 인수합병에 취약했다.
주력 기업이나 지주 회사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지배 구조를 넓힐 수 있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콜린스 사업부 인수가 전혀 어렵지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오성 전자와의 협상에 앞서서 이 문제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최민혁의 반응이 예상과는 달랐다.
“매각하기는 해야죠. 다만 콜린스 사업부 정리하면, 내세울 것이 없어서 서두르지 못했죠.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요. 미래 기술에다가 스마트폰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하실 생각입니까? 하지만 에플 아이컴 라이센스 문제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 부분 역시 같이 매각해야죠. 이왕이면 오성 전자가 딱 좋습니다. 그쪽에서는 둘 다 인수해도 에플 납품에 문제가 없을 테니까.”
아이컴 생산 경우에는 KM 전자 쪽에서 담당하기로 결정이 났다.
다만 수요가 급증하면 LC 전자와 같은 기업에 외주를 줄 계획이었다.
이 문제는 아이컴 양산이 최종 결정이 난 다음에 진행되기로 되어 있었다.
“하긴 오성 전자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납품 문제부터 시작해서 부품 수급까지 좋겠군요.”
최민혁은 아쉬워하는 조성돈 팀장을 타박했다.
“아이컴 역시 핵심은 제조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초점이 가 있어요. 이 제품은 어디까지나 모바일 사업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이니까.”
“…그래도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아깝죠. 하지만 이미 소형 IPS-LCD 시제품을 봤지 않습니까? 대형 IPS-LCD가 곧 시장에 나오면 경쟁하기 어려울 겁니다. 뭐, 당장에 사업이 망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업 영역은 서서히 쪼그라들 겁니다.”
생산 단가, 수급과 같은 다양한 문제가 있어서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이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할 절호의 기회였다.
“다만 우리가 아니라 오성 전자라면 아이컴을 이용해 최대한 이익을 뽑아낼 겁니다.”
거기에 아이컴까지 넣는다면 오성 그룹은 그 어떤 제안도 거절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최민혁은 이미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있었다.
“LC 전자를 끌어들여서 협상 흉내만 내도 오성 그룹은 발칵 뒤집힐 겁니다. 어쩌면 자동차 사업 진출을 보류할지도 모르죠. 불확실한 자동차보다는 적어도 7년은 오성 그룹을 먹여 살릴 만한 아이템이 콜린스이니까.”
“…아쉽습니다. 이미 평면 TV 인프라는 우리가 깔아놓았는데, 그걸 다 오성 그룹에 넘기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
“대신 비싸게 팔아치워야죠. 적어도 1조 5천억 정도를 불러도 오성 그룹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1조 5천억이라.”
상상을 초월한 액수에 조성돈 팀장은 감탄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여전히 칭얼거리는 조성돈 팀장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적기인 셈이죠. 아, 이 문제를 제기한 이가 신입 사원이었다고요? 확실히 기대해도 될 만한 친구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이 왜 굳이 최승진 사원을 기획 팀에 넣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최민혁은 그 이유를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인생 1회 차에 내 수행 비서를 했던 친구니까.’
그렇다고 뭐 대단한 친구는 아니었다.
최승진은 어떻게 보면 최민혁 감시 역할이나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사실은 그는 최민혁에 대한 것을 최훈열 전무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뢰 때문이었다.
최소한 자신이 담당한 상급자를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은 최민혁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신뢰 하나만 본 거지. 하지만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아.’
“조 팀장님 마음 잘 압니다. 하지만 콜린스 사업부 매각은 지금이 적기란 점을 잘 기억해 두세요. 오성 그룹도 지금 건설 업체의 연쇄 도산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만 이 혼란이 장기로 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살살 꾀면, 콜린스 사업부 인수를 적극 고려할 겁니다. LC 전자, HY 전자, 대운 전자까지 끌어들여서 4파전으로 몰고 가면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 * *
최승진 사원은 자신이 한 질문 때문에 기획 팀이 한동안 얼어붙은 것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다른 기획 팀원들이 이 문제를 다시 떠올리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다들 분위기가 꽤 심각했다.
그건 조성돈 팀장조차 다르지 않았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가짜 뉴스로 치부하지 않았다.
‘나 사고 친 거야?’
그렇게 일주일이 정신없이 그냥 훅 지나갔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최승진 사원은 안산 공장에서 죽으라고 조립만 하다가 기획 팀에 들어간 것이 꿈만 같았다.
그도 공장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오성 전자, HY 전자에 입사하기 위해서 죽어라고 노력했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실제로 KM 전자를 그냥 포기할 생각마저 했다.
이런 그의 결심이 바뀐 것은 다름 아니 아버지의 조언 때문이다.
“이놈아, KM 전자는 나도 안다. 그 회사는 TV라면 알아주는 회사야.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야. 이제 사회생활 막 시작했는데, 뭔 놈의 오성 타령이야!”
사실 최승진 사원도 공장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버티고 또 버텼다.
결국 운 좋게 자신이 1차 지원한 KM 전자 기획 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자신은 지방대 출신으로, 별달리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획 팀에 들어가는 것이 불안했다.
막상 기획 팀에 들어가 보니, 자신이 생각한 빡빡한 직장 생활 따위는 없었다.
기획 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괜찮았다.
사수도 괜찮았다.
배종대 과장이 좀 괴팍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