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21화 (621/1,021)

#621.

다만 그 역시 침울한 정미선의 표정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

“그래도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저 때문에 제대로 가족에게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부정적인 이미지만 생겼잖아요.”

“난 처음부터 그런 기대는 안 했어.”

하지만 정미선은 정말 괜찮았다. 그녀는 단순히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죠?”

“난 바보가 아니야. 으음, 그렇다고 서운한 감정이 없지는 않아. 다만 현실적으로 무리한 일이잖아. 너희 아버지가 있을 때는 그러지 못했어.”

그녀는 자신을 근심하는 아들 최민혁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나 솔직히 기뻤다.”

“네?”

최민혁도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정미선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녀가 실제 진심으로 한 말이다.

“네 아버지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이도 나름대로 온 힘을 다했어. 하지만 그이 능력으로는 한계가 명확히 있었지.”

특히 연예인을 며느리로 맞은 부분이 문제였다.

당시 KM 그룹은 정략결혼을 통해서 기반을 다질 생각이었다.

바로 최훈열 전무가 DL 그룹과 혼맥을 맺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정미선 때문에 이 계획은 다 날아가 버렸다.

최병문 상무는 이 점을 스스로 알았기에 자기 몸을 갈아가면서까지 죽어라고 회사를 위해서 뛰었다.

실제로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에 와서야 인정을 받았으니까.

최용욱 회장조차 그래서 그 보상으로 최민혁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결국 정미선은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독박을 쓴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힘이 안 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많이 힘드셨죠?”

“조, 조금.”

조금일 리가 없다. 정미선은 그 일로 말미암은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변질하여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니까.

최민혁은 혀를 찼다.

“제가 신경을 더 썼어야 했는데…….”

정미선은 바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결코 아들이 자기 일에 관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진심이었다.

“아, 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우리 아들이 고마워서 하는 말이야. 나 솔직히 기뻤다. 너희 아버지가 있을 때도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았어. 아버님께서 네 말에 끔뻑 죽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신기했다. 솔직히 통쾌했어.”

“표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너, 지금 시아버님 앞에서 웃고 있으란 말이야? 만약 그랬다면 진짜 집안이 난리가 났을 거야.”

“집안일이라면…….”

최민혁은 그제야 자신이 만든 집안 분위기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 상황에서 웃고 있는 건 딱히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죄송해요. 저도 감정이 복받쳐서 큰 소리 친 것뿐입니다.”

그런데 정미선은 그때 과거와는 달리 내심 좀 통쾌했다. 그녀는 솔직히 최민혁의 행동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아냐, 난 정말 네 행동이 통쾌했다. 특히 내가 놀란 것은 아버님이야. 그분이 너에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더라.”

그런데 최병문 상무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모습도 정미선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 성격상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일은 달랐다.

최민혁이 그 모든 일에 대한 앙금을 깔끔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정미선은 양손으로 최민혁 손을 꼭 잡은 채 해맑게 웃었다.

“이 엄마는 듬직한 아들 때문에 정말 기뻤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이 엄마 때문에 물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라도 당당했으면 해!”

“그래요?”

“그래. 솔직히 나도 사람이다. 우리 부회장님을 좋아할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을 그냥 ‘부회장’이라고 지칭하는 정미선의 말을 통해서 그녀도 그동안 응어리진 감정이 많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정미선 역시 최문경 부회장에게 제대로 보복하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다만 그녀 성격상 그걸 대놓고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최문경 부회장 능력을 고려할 때 아들 최민혁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었다.

‘괜한 걱정을 했어.’

다만 그도 아쉬운 점을 느꼈다.

뭐 악어의 눈물에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최소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 제사 자리에서 보여준 최씨 가문의 모습은 전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최영란 본부장만 빼고 말이다.

‘역시 내가 넘긴 지뢰 때문일까? 하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지. 기회가 생기면 필사적으로 신사업을 물고 늘여져야 하고.’

* * *

사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KD-LCD 상황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쉬쉬하는 것은 KD-LCD가 가진 VM-LCD란 원천기술 때문이다.

아마 별다른 외풍이 없었다면 별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일이다.

문제는 그 외풍이 단순한 바람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바람이 서서히 덩치를 키워서 폭풍우로 변하면서 무시하기 어려웠다.

최민혁도 제사 전에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제사 후에 김여정의 반응이 이상해 기획 팀에 다시 관련 안건을 지시한 후에 상황이 예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DL 그룹이 타격을 받을 만하지.’

자신이 몇 번에 걸쳐서 한 작업.

그 일이 쌓여서 자금이 넘쳐나던 DL 그룹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특히 일본에서 무리하게 단기 자금을 끌어 쓴 대가가 컸다.

일본 자금이 서서히 DL 그룹 내부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서히 본게임을 시작해야겠어. 세심한 작업이 필요해. 시작으로 역시 미래 기술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편이고.’

조성돈 팀장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당장 DL 그룹이 크게 흔들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 일본 자금 상황도 무리 없이 진행될 겁니다. 다만 그게 아닌 경우에는 문제가 됩니다.”

“KD-LCD가 타격받는다든지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외풍이 심하게 몰아치면 DL 그룹의 자금 사정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요?”

“…네.”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계획이 얼마나 큰지 잘 알았다. 시간도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드디어 자신이 뿌린 씨앗이 계획대로 자라나는 것에 쾌감마저 느꼈다.

최문경 부회장을 별개로 하더라도 조 단위의 현금을 굴리는 DL 그룹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보고하면서도 힐끗 최민혁 얼굴을 쳐다보았다.

DL 그룹 자금 사정이 안 좋다는 징후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만 그 대부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기류에 변화가 생긴 것은 다름 아닌 KD 통신 때문이다.

김상구 회장은 KD 통신에 무리수를 뒀는데, 특히 IP 시티폰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기업도 같이 판단했다.

그 대단한 샐로먼 브러더스가 직접 투자를 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역시 좋은 답이 나왔다.

그런데 이런 기류에 변화가 생긴 것은 동아시아가 아닌 한국 내부의 변화 때문이었다.

우성 건설 도산으로 말미암은 자금 경색이 DL 그룹에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니 DL 그룹 계열사 중에서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KD-LCD가 먼저 휘청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씩 웃었다. 그는 제삿날 본 최문경 부회장과 김여정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특히 김여정은 DL 그룹 내에서 뭔가 따로 지시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좋네요. 그러면 미래 기술 협상을 이용해서 DL 그룹이나 우리 부회장님을 흔들 대안을 한번 연구해 보세요. 일테면, 권태성 실장을 끌어들이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LC 전자나 베일런스가 지금처럼 눈치만 보지는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좀 이상한 지시였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과의 대립이 이제는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구 한 사람이 죽어야 결론이 나겠지.’

* * *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 실장의 대립은 이제 KM 그룹 내에서 모르는 임직원은 없었다.

실제로 KM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 대폭 쏠려 나갔다.

이것 역시 엄밀히 말해서 최민혁이 의도한 바대로 된 것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칙에 따라서 퇴출 기업을 정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 라인의 부패가 심했던 것뿐이었다.

오히려 중도 노선을 걸은 계열사는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결국 KM 그룹 내에 빌붙어서 기생하는 많은 세력이 정리되었다.

그러니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KM 전자 임직원들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기획 팀 박광민 사원은 평소처럼 우성 건설 부도 기사를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승진 씨도 걱정 많이 되지. 우성 건설이 부도난 것처럼 우리 KM 전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우리 KM 전자가 망할 리는 없을 테니까.”

최승진은 이번에 기획 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네? 네!”

“왜 그렇게 긴장해요? 신입 사원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행동해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승진은 박광민 사원의 눈치를 봤다.

안산 공장에 있던 임직원들이 서서히 각 부서로 배치되고 있었다.

이 많은 부서 중에 역시 가장 핫한 곳은 기획 팀이었다.

기획실장이 바로 KM 전자 오너인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승진은 박광민 사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박광민 사원은 그 모습이 꽤 좋았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난 정영일 사원과는 아주 다른 신입의 모습에 만족했다.

하지만 또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도 있었다.

바로 배종대 과장이었다.

“광민 씨, 벌써 신입 길들이기 하는 거야?”

“아닙니다.”

“에이, 처음부터 다 봤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박광민을 도와준 이는 다름 아닌 정성근 대리였다.

“배 과장님이 절 그렇게 괴롭히시면서 할 말은 아닙니다.”

“야, 우리 정 대리, 이제 막 나가네. 말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건 반대 아냐. 난 우리 정 대리님 등쌀에 아주 죽겠어.”

실제로 지난 KM 전자 계열사 기술 미팅 이후에 정성근 대리는 몇 가지 색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벨린 소프트를 비롯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계열사를 관리하기 위한 차트였다.

그리고 이 방식은 꽤 효율이 높았다.

설사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느 정도 프로젝트 현황 관리가 가능했다.

배종대 과장은 오히려 정성근 대리가 만든 이 방식의 취약점을 보완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정성근 대리는 툴툴거리면서도 자신을 잘 도와주는 배종대 과장에게 불만은 없었다.

“배 과장님은 그 태도가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차장 진급을 했을 겁니다.”

“괜찮아. 난 과장이 좋아. 빨리 진급하면, 빨리 은퇴 당해야 하잖아.”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겁니다.”

“우리 정 대리가 있잖아. 그러니 난 괜찮아.”

“정말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뭐가 어때서?”

배종대 과장은 실제로 진급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살아남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니 평소에도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정성근 대리는 또 그런 배종대 과장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매사 까칠하기는 해도 뒤통수를 치거나 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광민 사원 역시 가족 같은 기획 팀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그는 팔꿈치로 최승진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두 사람을 간단히 소개했다.

두 사람 다 나쁜 사람이 아니란 점을 피력했다.

거기에 임웅 대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도 하나씩 소개해주었다.

다들 신입 사원을 열렬히 환영했다.

박광민 사원은 KM 전자의 강점에 대해서 장광 연설을 늘어놓았다.

“지금 도산한 우성 건설은 재계 27위잖아요. 우성 건설 경영진이 아파트 붐을 이용해서 사업을 키워 나간 것까지는 좋았죠. 하지만 사생활 문제로 말이 많았어요.”

정성근 대리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리수를 둬서 타이어, 유통, 백화점에 손을 쓴 것이 실책이었죠. 힘든 상황을 아예 대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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