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
최민혁은 물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왜 KD-LCD와 미래 기술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실상 이게 모두 미래 기술에 침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 기술 지분은 다른 IP 시티폰처럼 매각할 생각이 없었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은 위성 기술과도 또 달랐다.
‘아니, 짐작은 가지만 정말 돈 앞에서는 창피고 뭐고 없구나.’
물론 다 그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래서 차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사실 이 부분은 그도 플랜을 꼼꼼하게 정하지는 않았다.
KM 그룹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힐끗 이 KM 그룹과 연결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의 차가운 시선에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일단 이것만으로 만족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저렇게 자신 앞에서 저자세인 것도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는 이 사태의 시작점인 둘째 큰어머니인 김여정을 힐끗 쳐다보았다.
표독스러운 눈빛.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그는 그래서 일단 이들이 과거에 했던 주장에 집중했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당시 KD-LCD 사업은 양 그룹에서 원해서 진행된 겁니다. 전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리스크가 있다면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최용욱 회장도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았다. 그리고 최민혁 능력은 이제 다들 안다.
“민혁아,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KD-LCD 때문에 손실을 본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미래 기술은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 원천기술 수준이 아니라 이미 시제품까지 나온 것으로 들었다.”
“글쎄요.”
“…지금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너도 양보하는 부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른 기업에 파는 것보다는 가족에 우선 순위를 줄 수가 있잖아. 물론 그냥 공짜로 지분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가족 입장은 생각해야지.”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설마 최용욱 회장이 가족 간의 분란을 틈타서 자신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할지는 몰랐다. 그는 뒤늦게야 쓰게 웃고 말았다.
‘뭐, 차라리 이게 나은 건가?’
어차피 이쪽에 욕심을 낼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걸 이용해서 최문경 부회장을 공격하면 된다.
그러면서 얻을 것을 얻으면 되는 일이다.
그게 KM 산업 지분이든, 아니면 다른 KM 그룹 지분이든 말이다.
그는 느긋했다.
“글쎄요. 그 부분은 아직 결정이 난 상황이 없어서요. 할아버님도 잘 아시겠지만, KM 전자 주주를 생각해야 합니다. 회사에 반하는 정책을 내놓았다가 저도 타격을 받습니다. 둘째 큰어머니는 글쎄 검찰에다가 배임으로 고소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힐끗 김여정을 쳐다보았다. 김여정은 움찔 몸을 떨면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녀는 설마 자신이 한 말을 최민혁이 최용욱 회장에게 밀고할지는 몰랐다.
그는 손자 최민혁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았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하나만 묻자. 이미 차세대 배터리 시제품이 나온 것은 사실이야?”
최민혁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슬그머니 말을 돌리고 말았다.
“…확인해 봐야 합니다.”
“…정말이야?”
“원천특허와 시제품 양산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일이 뜻대로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세상 타령하는 손자 말에 허탈해서 한동안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도 솔직히 켕기는 것이 있었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에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 말이다.
손자 최민혁이 먼저 나섰다면 부담이 안 될 수도 있다.
이번 제사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런데 먼저 나서는 것은 그도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 허탈했다.
그는 뒤늦게야 자신이 손자 최민혁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진짜 믿기지 않아. 언제 이렇게 큰 것일까?’
사실 최민혁에 대해 KM 그룹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럴 뿐이다.
이미 아는 이들은 다들 최민혁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걸 안 최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저도 배터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 배터리 사업 원천특허에 네가 관여했다고 들었다만?”
최민혁은 이미 염두엔 둔 너저분한 핑계를 하나씩 내놓았다.
“그건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특허 팀에서 기존 특허를 취합한 겁니다. 외부 대학 연구소와 손을 잡고 같이 진행한 성과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도 장승일 실장에게서 어느 정도 보고를 들었다. 그 내용 중에 저런 부분이 있기는 했다.
임기석 부장이 주도하는 KM 전자 특허 팀 명성은 이제 세계적이었다.
그들이 비록 최민혁 실장의 도움을 얻었다고 해도 결과를 낸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장승일 실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임기석 부장이 무슨 재주로 맨땅에서 차세대 배터리 특허를 고안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표정을 보자 쾌재를 부른 채 임기석 부장의 능력을 칭찬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우리 임 부장님 능력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분이 알아서 다 한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KM 전자는 기반 공장이 있는 LC 화학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배터리 쪽은 처음인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최민혁의 표정을 봐서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째 장 실장이 이 녀석 일이라면 부담스러워하더라 했어. 다 이유가 있었구먼. 나한테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오죽할까.’
최용욱 회장의 입장에서는 손자 최민혁의 성장을 좋아해야 할 일이다. 모름지기 경영자라면 최민혁이 가장 이상적인 타입이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슴이 편치만은 않았다.
“…민혁아,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을 예견한 사람이 너야. 그러니 너라면 힘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으냐?”
“KM 그룹이 힘들다는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지금 사내 현금만 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돈이 넘쳐나서 우성 건설에 눈독을 들인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건 경영진 내부 검토가 필요합니다!”
“민혁아, 너는 다른 사람보다 안목이 좋잖아.”
최민혁은 여전히 오리발을 내밀었다.
“제가 신이 아닌 이상 미래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최민혁은 슬그머니 말을 돌리면서 또 ‘대주주’ 타령을 늘어놓았다.
“다시 말하지만, 배터리 기술을 소유한 것은 KM 전자입니다. 저로서는 다른 대주주들의 이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미래 기술과 관련된 부분은 회사 내부적으로 검토를 거쳐야 합니다.”
김여정이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나섰다.
“아버님, 저거 보세요. 뭔가 수작이 있어요. 그러니 저런 식으로 말을…….”
최용욱 회장이 참다 못해서 김여정에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둘째야, 넌 제발 좀 닥쳐!!”
“아, 아버님…….”
최민혁이 마치 보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김여정의 말투를 흉내 냈다.
“저거 보세요. 제가 보기에 둘째 큰어머니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 할아버지를 부추길 이유가 없습니다!”
“……!”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도와주려는 것을 제지한 채 정색했다.
“가만, 며늘아기야, 너 말이 좀 이상하구나. 설마 김 회장에게 따로 지시를 받은 거냐?”
김여정은 크로스카운터에 크게 당황했다.
“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조용히 있어!”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KM 전자에 이어서 또 다른 꼼수를 부리는 김여정 태도에 치를 떨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김여정을 더 벼랑 끝으로 몰 수는 없었다.
김여정 역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눈동자를 굴리면서 눈치만 봤다.
최민혁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았다.
‘하긴 바보가 아니면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를 챌 때가 되었지.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인제 와서 노선을 변경하기는 어렵지.’
그는 결국 최용욱 회장에게 차선책을 내놓았다.
“제가 사내 내부 검토 결과가 나오면, 경영진 조율을 거쳐서 할아버지를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이 안건은 그 자리에서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김여정과 최민혁의 얼굴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 상황에 끼어들려는 첫째 최문경 부회장를 차갑게 쳐다봐서 침묵시켰다.
그도 뒤늦게 KM 전자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래. 알겠다.”
“가족인데,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해보겠습니다.”
“…….”
최용욱 회장은 ‘가족’이란 말에 더 대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내심 최민혁의 행동에 솔직히 감탄하고 말았던 것이다.
* * *
서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들 최용욱 회장의 눈치만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김여정 역시 자신이 한 실수 때문에 더 나대지 않았다.
제사는 보통 가족끼리 모여서 서로 지난 앙금을 푸는 자리다.
그럼에도 오히려 안 좋은 감정이 더 증폭되었으니.
제사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좋지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자신이 말을 해도 다들 아예 한 귀로 흘리자 그저 혀를 찼다.
그는 최민혁이 나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배를 째라 식으로 나왔다.
덕분에 주의를 끈 것은 정미선이었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조차 정미선에게는 지극정성이었다.
최영란 본부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정미선의 장녀라도 되는 것처럼 옆에 착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그럼으로써 김이경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것은 덤이다.
다 최민혁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얼핏 봐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엔 최용욱 회장이 늘 주장하던 따스한 가족애가 담겨 있었다.
다만 다른 한쪽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정미선을 죽여 버리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최용욱 회장조차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가족 분위기가 개판이 된 것에 책임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끼지는 않았다.
자신이 관여하면 그건 그것대로 갈등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러니.
정미선은 익숙하지 않은 제사 분위기가 바늘방석 같아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에게 이건 이것대로 마음이 편치가 않은 일이었다.
다들 최민혁과 관련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한다고 제사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갈등이 폭발해서 최용욱 회장과 조카 최민혁이 격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혀를 찼다. 그는 잘만 김여정을 이용했다면 최민혁과 최용욱 회장 사이를 더 벌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쉽네.’
최민혁은 그 광경에 그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래 기술.
돈 문제.
탐욕 덕분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 KD-LCD 사업 자체가 김여정의 주장처럼 자신이 깔아놓은 대형 핵지뢰였기 때문이다.
‘가만 보니, KD-LCD 상황이 예측한 것보다 더 긴박하게 돌아가나 보네.’
* * *
이번 KM 가문 제사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모든 가족은 다들 김여정 탓을 하기는 했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래 기술을 통해서 챙길 것을 챙기고 싶은 사람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정미선은 달랐다.
그녀는 미래 기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다.
이런 차 내부 분위기에도 차량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는 경제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로는, 우성 그룹 계열사 간의 빚보증을 제외해도 부채가 무려 1조 2천억을 넘는다. 자기자본 대비 무려 600%에 가까운 부채다. 채무 보증을 200% 내외 기준을 넘어선 비율이다. 우성 그룹 도산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성 건설 도산과 관련해서 정부가 손 놓아버린 이유에 대한 뉴스였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최민혁은 새삼 IMF 징후가 서서히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미래 기술의 가치가 생각보다 더 높다는 것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