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
최민혁은 틈날 때마다 나중에 복수하려고, 이런 자료를 모아왔다.
중간에 낀 정미선은 당황했다. 그녀 역시 지난 일을 잘 아니까. 다만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다. 굳이 그걸 빌미로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정미선을 대신해서 마구잡이로 김여정을 공격했다.
“말 나온 김에 한번 끝장을 볼까요?!”
김여정은 최민혁의 공격적인 반응에 그제야 움찔 뒤로 물러났다.
“너, 뭐, 도대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미선이 크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주시하던 조희정이 슬쩍 나서서 정미선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동서, 힘내!”
“아, 고, 고마워요.”
최동영 상무는 아내인 조희정이 나서서 정미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결국 최씨 집안은 편이 갈려서 분열되었다.
대립과 갈등이 격해지자 쌍욕이 오갔다.
김여정은 마치 독이 오른 독사 같았다.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최민혁의 반응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제까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인데, 이제는 더 못 참은 것이었다.
제사를 준비하던 사용인들은 다들 혀를 내두른 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으로 이를 바라봤다.
아니, 그들도 내심 통쾌했다.
조희정의 패악질은 최씨 가문 내에서도 꽤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리가 나니, 집 밖에 있는 사람도 소란을 알 정도가 되었다.
최용욱 회장이 거실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나왔다가 마침 그 광경을 보고는 대로했다.
“제사상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다.
최용욱 회장은 체면을 중시하는 이라서 집 안에서는 어지간해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사 준비 때문에 모인 KM 그룹 가족들은 다들 마른침을 삼킨 채 분노한 최용욱 회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아버님.”
“야, 둘째야, 너 미친 거야? 도대체 제사를 앞두고 이게 뭐 하자는 거야!!”
“하, 하지만 미, 민혁이가…….”
“…….”
최민혁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배 째라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쉬쉬하며 말을 아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최용욱 회장의 태도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김여정만 걸고넘어졌다.
“둘째 며늘아기야, 너 훈열이가 감옥에 갔다고 이러는 거야. 정말 그러지 마. 그놈이 한 짓은 열 번이라도 감옥에 가고 남을 일이야!!”
최용욱 회장 역시 쌓인 것이 많았다. 그 역시 DL 그룹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음에도 김여정에게 과거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랐다.
KM 그룹이 DL 그룹 눈치를 볼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김여정이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몰아붙인 것이었다.
“아, 아버님, 어, 어떻게 저, 저에게 이럴 수가… 흑흑흑.”
김여정은 결국 견디다 못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그녀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아군이 없었다.
심지어 사용인들조차 다들 쉬쉬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최문경 부회장이 보다 못해서 슬쩍 나섰다.
“아버지, 제수씨에게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심하긴 뭘 심해. 네놈이 지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어?!!”
“제가 잘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수씨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훈열이 재판이 벌써 2심으로 넘어갔는데, 거기에 신경도 써주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아버지가 나섰다면 형량을 최소한 5년은 줄일 수 있었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장남 최문경 부회장에게도 불만이 많았다. 다만 당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인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훈열이 그놈이 회사에 끼친 피해가 얼마인지나 알아? 내가 아무리 사법부에 힘이 있다고 해도 있는 죄를 없앨 수는 없다. 가만, 너도 훈열이 그놈에게 돈이라도 받은 거야? 그것 때문에 그래?!”
시퍼렇게 달아오른 최용욱 회장의 태도에 최문경 부회장도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그, 그건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면서 자신을 공격할지는 몰랐다.
“…….”
오히려 조용히 이를 지켜보기만 한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편파적인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할아버지는 결코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에 만족했다. 최문경 부회장 딴에 이번 일로 수작을 부리려고 하다가 긁어서 제대로 부스럼을 냈으니 말이다.
‘최상의 결과야.’
다만 그는 그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눈치를 보는 김여정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저게 진짜 악어의 눈물이야. 정말 무섭다니까.’
* * *
최용욱 회장이 나섰지만, 앙금은 여전히 남았다.
결국 KM 그룹 가족 사이에서 제사 준비하는 내내 덕담이 오가기는커녕 증오와 대립만이 남았다.
2~3살 먹은 아이들조차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면서 딸꾹질을 했다.
다들 최용욱 회장의 살벌한 태도에 크게 긴장했다.
최용욱 회장 역시 이대로 뒀다가는 후환이 남을 것을 염려해서 결국 남자들과 김여정만 따로 서재를 모두 불러 모았다.
시작은 역시 최민혁에게 원한을 가진 최문경 부회장이 끊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넌지시 이 모든 사태를 최민혁 한 사람 탓으로 돌렸다.
“이게 모두 민혁이 때문입니다. 저 녀석이 모든 풍파의 원인입니다. 저 녀석이 없을 때는 제수씨도 큰 소리 한 번 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에 김여정은 결국 너무 서러워서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님, 정말 실망입니다. 민혁이 저 녀석이 한 행동을 보세요. 얼마나 절 우습게 알면 이런 식으로 말하겠습니까? 우리 그이가 감옥에 있다고 절 괄시를 하는 겁니다. 흑흑흑.”
최용욱 회장은 자신이 그렇게 말해도 변함이 없는 두 사람의 집착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도 최민혁의 말이 좀 심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최민혁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너도 그만해라.”
“흑흑흑, 제가 어떻게 그만할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 미래 기술을 인수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잘나가면서 어떻게 웃어른에게 저렇게 모질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뜬금없는 ‘미래 기술’ 이야기에 눈살부터 찌푸렸다. 아니, 그는 이 사안을 무시하지 못했다. 장승일 실장이 최근 전략 기획실 검토를 거쳐서 나온 이 차세대 배터리 사업은 단순히 배터리를 공급받는 것으로 끝낼 수 없다고 뒤늦게 판단했다.
필요하다면 차라리 미래 기술 지분을 인수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계열사 매각을 통해서 탄환을 확보한 KM 그룹 처지에서 배터리 사업 자체가 안정적인 연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도 손자 최민혁에게 말할 기회를 노리던 셈이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가 이미 온 강물에 분탕질을 쳐 놓은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니, 내심 크게 당황했다.
결국 미래 기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거기에 미래 기술 이야기는 왜 나와!”
하지만 김여정은 이미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제 외가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KD-LCD 적자가 계속 누적되어 가고 있어요. KD-LCD도 따지고 보면, 민혁 저 녀석이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KD-LCD에는 우리 그룹 지분도 들어가 있어!”
“그러면 더 잘 아시겠네요. KD-LCD가 적자로 휘청하고 있어요. 이게 모두 민혁 저놈의 꼼수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분은 맞는 이야기였다.
최민혁조차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거야…….”
“아버님, 제가 조금 전의 일은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미래 기술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김여정의 푸념.
김여정은 뒤늦게야 김용만 전무의 부탁을 떠올렸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하소연이 아니라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기승전 최민혁 탓으로 맞추어서 말했다.
하소연이 아니라 최근 정부의 움직임까지 끄집어냈다.
“지금 정부의 신임 경제 팀은 하루 평균 40개씩 도산하는 중소기업을 구하려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KM 그룹을 보세요. 전부 다 따로 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듯한 이야기.
결코 감정에 호소한 주장은 아니었다.
김여정이 그만큼 충분히 준비한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묵묵히 김여정 이야기를 듣다가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게 또 그렇지도 않아. 선거가 다가오면서 정부가 표를 의식해서 중소기업 정책을 막 찍어내는 것도 있어. 정작 뒤에서는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은 정리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실제로 지금 정부는 말 따로 행동 따로 노는 중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중소기업 사장은 애가 탔다.
“하지만…….”
“하루에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원 숫자가 역대급이야. 정부 행동을 좋게만 볼 수는 없어.”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갑자기 중소기업 찬양가를 부른 것은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소기업만이 아니야. 전반적인 경기 하강 때문에 대기업 역시 큰 타격을 받고 있어. 30대 재벌 그룹 총수 중에 무려 4명이나 회장직을 물러났으니까.”
최용욱 회장이 한 이야기는 단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대기업의 투자 의욕 상실이 큰 문제였다.
최문경 부회장도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진중하게 들었다.
그 역시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문제에서 예외적인 기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KM 그룹이었다.
한국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에 유일하게 잘나가는 곳이 바로 KM 그룹이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 대해서 사전 정지 작업을 시기적절하게 진행한 덕분이었다.
최용욱 회장조차 이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그가 아는 지인 대부분은 자신보고 늘 이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부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자신을 도와준 기업 회장도 있어서 그들 제안을 무시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최문경 부회장이 슬쩍 나섰다. 그는 이성적으로 안 되니, 이번에는 감성에 호소해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버님, 그렇다고 제수씨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민혁이 행동이 지나친 것은 사실입니다. 아니, 저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신 가족 간의 화합을 저해한 행위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또 아니었다. KD-LCD 부분은 최민혁이 손을 쓴 것이니까.
당시만 해도 새로운 신기술로 재미를 단단히 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더욱이 30대 대기업도 휘청하는 상황이 연출되자 더 문제가 되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KM 그룹보다 DL 그룹이 KD-LCD에 더 많은 자금을 퍼부은 점을 피력했다.
“지금 주장하는 사람이 제수씨란 점을 빼보세요. 딱히 제수씨 주장이 틀린 말이 아니잖습니까. DL 그룹이 생각보다 많은 자금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KD-LCD가 적자 폭이 계속 늘어나서 상황을 가볍게 보기 힘듭니다.”
“그거야 제품 양산이 안 되어서 그렇잖아. 네놈은 LCD 사업이 어떤 사업인지 알면서도 그런 개소리를 지금 하는 거야?!”
최문경 부회장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안다. 그런 리스크를 다 고려했다. 다만 환경적인 요인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 역시 평소와는 달리 미래 기술 이야기가 나오자 걱정하던 부분을 말했다.
“저도 압니다. 그런데 요즘 사정이 너무 안 좋습니다. 우성 건설 도산 후에 건설 업계 구조조정이 가파르게 진행 중입니다. 작년 덕산 그룹과, 우원 건설이 파산했습니다. 정부가 이미 건설 업계에서 손을 뗀 셈입니다. 아버님 말씀처럼 지금 선거 앞두고 쇼만 일삼고 있습니다. 덕분에 KD-LCD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상황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대안은 아니어도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최용욱 회장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장승일 실장에게 비슷한 보고를 들었다. KM 그룹이 자금이 많다고 해서 편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국에 새로이 투자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당장 우성 건설이 좋은 경우다.
하지만 미래 기술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이 회사는 최민혁이 쌈짓돈으로 투자한 회사였다.
결국 이심전심이라고 다들 태평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