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
다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애들조차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있었다.
바로 정미선이었다.
그녀도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나타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주변 눈치를 봤다.
가족들이 좋게 대우한다고 하지만 지난 앙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다행히 그녀를 감히 터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사용인들은 마치 최용욱 회장을 대하는 것처럼 정미선 앞에서 전전긍긍했다.
알게 모르게 최민혁의 이야기가 돌면서 다들 정미선 눈치를 본 것이다.
특히 최동영 상무 와이프인 조희정의 태도는 황당할 정도였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정미선을 섬겼다.
“어머 동서, 피부 정말 좋다.”
연예인인 정미선이 피부 관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하지만 조희정은 마치 정미선의 비서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살갑게 대했다.
“나도 앞으로 동서에게 피부 관리는 배워야 할 것 같아.”
게다가 단순히 피부 관리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몸매 관리는 또 어떻게 하는 거야?”
정미선도 이제는 마음 편하게 웃었다.
“식이요법 하고, 운동을 꾸준히 합니다.”
최민혁 역시 뒤늦게 정미선이 먼저 따로 출발했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큰집에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헛웃음만 지었다.
자신이 봐도 아부가 선을 넘었다.
그가 아는 조희정은 결코 저런 인물이 아니었다.
합리적이면서 냉정한 인물이니까.
사용인을 괴롭히는 재벌가 며느리와는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조희정은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기세였다. 심지어 그녀는 정미선이 제사 음식 준비하는 것까지 막았다.
“동서, 그런 일은 직접 하지 마. 여기 사람도 많은데, 굳이 그런 일까지 할 필요가 없잖아.”
“그래도 그냥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이 불편할 거야.”
실제로 사용인 팀장이 나섰다.
“사모님,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오히려 저희가 불평합니다.”
제사 준비를 할 일손은 많았다.
제사상 차리는 것을 정미선이 직접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다만 정미선이 이렇게 오버하는 것은 과거 직접 제사 음식에 손을 보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런 점이 그녀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 터였다.
이게 얼핏 봐서는 별일 아닌 것 같아도 정미선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자신이 제사상 차리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지시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분명 실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과거 최병문이 살아 있을 때는 이런 일로 정미선은 왕따가 되었다.
뭐, 잘못이 없어도 잘못이 있다고 욕을 먹은 것이었다.
정미선을 괴롭힌 이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희정이었다.
그런데 조희정은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태도를 확 바꾸었다.
보다 못한 김여정이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두 사람이 서로 사귀는 거야?!”
“어? 아닙니다. 가족끼리 서로 도와야죠.”
김여정은 마치 군기 반장처럼 일갈했다.
“그런 사람이 과거에는 왜 막내를 잡아먹지 못해서 그렇게 날뛴 거야? 설마 벌써 지난 일을 잊었다고 말을 할 거야? 셋째 자네가 가장 심했어!!”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에이, 또 이런다. 내가 필요하다면 증거로 사진까지 보여줄 수 있는데?”
김여정은 정말로 수첩을 꺼내서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정미선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조심스럽게 나섰다.
“형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이가 없네. 막내 동서는 그렇게 당하고도 지난 일을 다 잊었어?”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저는 제사상 차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욕을 먹을 만했습니다.”
뭐, 그런 점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연예인 생활만 하던 정미선이 이런 부분에서는 취약했으니까.
다만 그게 꼭 욕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바로 이런 점을 가지고 정미선을 계속 갈구고, 괴롭혔다.
특히 제사만이 아니라 명절 때는 반드시 늘 하는 행사였다.
김여정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참, 사람 좋다.”
“아, 아닙니다.”
“왜? 자네까지 날 무시하는 건가? 우리 그이가 아직도 감옥에 있다고?!”
정미선은 크게 당황했다. 그녀도 최훈열 전무가 아직 감옥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졸지에 생과부가 된 김여정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상황이 다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다만 김여정이 오히려 더 설치기 시작했다.
* * *
최민혁도 김이경의 태도를 보고선 다른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때문에 굳이 일찍 가서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는 굳이 제사에 가야 하나 고민까지 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이 독한 행동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최민혁 일가에게 아무런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선친 최병문이 좋은 예다.
그가 미국에서 투자 명목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줬다.
심지어 최민혁에게도 KM 전자 기획실장 자리까지 줬다.
비록 좋은 의도는 아니라고 해도 기회 자체를 박탈하지는 않았다.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 셈이다.
실제로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뭐, 할아버지가 가진 자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그 자금이 최문경 부회장 손에 들어가는 것은 막아야 했다.
최민혁은 여기에 정미선까지 관련이 있어서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미선이 먼저 큰집에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는 혹시라도 정미선이 해코지를 당할 것을 염려했다.
아니나 다를까 큰집에서 벌어지는 일은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둘째 큰어머니인 김여정이 노골적으로 정미선을 갈구기 시작했다.
최민혁은 그 광경을 보자 바로 달려가서 김여정을 공격했다.
“둘째 큰어머니는 왜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을 하는 겁니까?”
김여정은 순간 흠칫했다. 그녀도 김용만 전무에게서 들은 부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최민혁에게 쌓인 증오가 너무 컸다.
“어, 민혁이가 많이 컸구나. 이제 날 우습게 보는 거야?!”
핏대까지 올라간 김여정.
평소라면 첫째 며느리 김이경이 그 모습을 보고 중재를 했겠지만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곧바로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김이경을 따라서 같이 들어온 최문경 부회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미묘한 집안 분위기를 보고도 아예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난 집 구경이나 했다.
‘역시 제수씨야. 가만, 민혁이 저놈이 어떻게 나올까?’
솔직히 궁금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지금은 조카 최민혁의 미래 기술 소식을 듣고도 분노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때문에 지금과 같이 제삿날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복수는 되니까.
더욱이 KM 전자를 노린 최훈열 전무의 악행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최민혁이 그걸 몰랐다면 더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당시 최민혁은 별로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최민혁이 갑질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 역시 최문경 부회장에게 있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 광경을 꼭 봐야 하는데…….’
그의 예상대로 최민혁 역시 김여정의 갑질을 보자 지난 일을 떠올렸다. 이전에는 참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둘째 큰아버지는 회사에 큰 피해를 준 배임과 횡령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법에 따라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야, 최민혁. 그게 어떻게 배임이야? 다 회사를 위해서 한 일이잖아. 상황에 따라서 경영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그게 범. 죄. 란 겁니다.”
“흥, 민혁이 네놈은 안 그럴 줄 아냐? 두고 봐. 네놈도 배임 냄새가 나면 내가 바로 검찰에 가서 고소할 테니까!”
그런데 김여정의 경고가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최민혁 역시 최근 KM 전자 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배임이란 게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인데, 해석에 따라서 정상적인 경영 활동조차 조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 기술이 그런 것 때문에 귀찮아서 내 자금으로 인수한 거지만.’
그런데 문제는 차세대 배터리 특허 소유주는 바로 KM 전자란 점이다.
이 원천특허를 미래 기술에 넘기는 것도 이제는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즉, 이것도 정당한 가격을 받아야 했다.
실상 미래 기술의 지분 일부를 매각하려는 것도 이 자금과 관련이 있다.
최문경 부회장이 차가운 눈으로 최민혁을 힐끗 째려보는 것도 다 이런 부분을 참작하고 있어서다.
다만 지금까지 최민혁이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 김여정은 물론 이런 것보다는 최훈열 전무를 걸고넘어졌다.
“그리고 그이는 네 둘째 큰아버지야. 너, 말 그따위로 할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김여정의 모습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김용만 전무에게 들은 이야기 따위는 까맣게 잊은 지가 오래다.
최민혁에게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미선이 다급하게 최민혁을 말렸다.
“미, 민혁아, 네가 좀 참…….”
하지만 최민혁이라고 해서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 정미선이 말리는 데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지금에 와서 최민혁이 그럴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할 말이 많네요. 과거 KM 전자를 먹으려고 DL 그룹까지 이용해서 수작을 부렸더군요. 도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해 처먹은 겁니까? 둘째 큰어머니가 감방에 안 간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아세요!!”
지난 이야기가 나오자 김여정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았다.
“야, 최민혁!!!”
“어른이라고 다 같은 어른은 아닙니다. 제발 창피한 줄 좀 아세요!”
최훈열 전무 구속 사건은 쉬쉬하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최민혁이 걸고넘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최문경 부회장은 팝콘 각으로 이 광경을 보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역시 KM 전자를 이용해서 꽤 비자금을 챙겼기 때문이다.
뒤늦게 다시 거실에 나타난 첫째 김이경 여사도 크게 당황했다. 그녀도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튈 줄은 몰랐다.
물론 김여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이 나온 김에 지금까지 가슴에 쌓인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야, 최민혁, 내가 누구인 줄 알아? 너의 둘째 큰어머니야, 어디 버릇없이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
목소리가 두 옥타브를 거쳐서 삼 옥타브까지 올라가자 첫째 며느리 김이경 여사는 반쯤 포기했고, 셋째 며느리 조희정은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원하던 것을 더 말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최민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 분이 제가 큰집에 있을 때 그렇게 괴롭혔습니까?!”
“아니, 내가 언제 널 괴롭혔다고 그래? 생사람 잡지 좀 마!”
“사용인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수작 부린 것은 알고 있습니다. 뭐, 녹취록을 보여 드릴까요?”
실제로 최민혁은 사용인이 사주를 받아 자신을 괴롭힌 걸 자백하는 테이프까지 준비해 뒀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가정적인 최용욱 회장 때문에 쓸모가 있을 거라 판단해 따로 준비한 것이었다.
다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여정이 자꾸 어른 행세를 하자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무,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뒤늦게 다른 가족들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그도 집안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까지는 몰랐다. 아니, 듣기는 했지만 무시했다.
다만 그가 또 놀란 점은 녹취 테이프다.
‘아니, 그게 몇 년 전 이야기인데, 그걸 언제 준비해 둔 거야?’
도대체 조카 최민혁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과거 사용인들 중에는 KM 그룹 며느리 텃새에 갈려 나간 사람이 꽤 있다.
그리고 훗날 그들 중에 한 운전기사가 녹취록을 폭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