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배종구 사장은 최민혁과의 만남 이후에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다.
그 역시 우성 건설 파산 소식을 듣고는 심각한 번민에 빠졌다.
건설 업체 연쇄 도산은 이미 작년부터 이야기가 나왔는데, 올해에 본격적으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설마하니 우성 건설이 파산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정부는 뭘 하는 걸까?’
그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성 건설 파산은 곧 계열사 연쇄 도산으로 이어진다.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 손 놓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래 기술 역시 우성 건설처럼 도산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소극적으로만 임하던 LC 전자 기획실의 임명진 부장이 직원 몇 사람을 데리고 미래 기술을 방문했다.
“전화로 몇 번 연락을 한 임명진 부장입니다.”
임명진 부장은 꽤 지친 얼굴이었다. 그는 한병수 실장에게 따로 지시를 받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최민혁 실장이 미래 기술 오너였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최민혁 실장이 오너로 있는 기업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이들을 안내해 온 윤종수 전무는 단단히 굳은 얼굴로 배종구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이미 사전에 통보한 것처럼 아직 내부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이라서 LC 전자 측만 특별대우를 해줄 수는 없습니다.”
“LC 화학 일과는 별개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쪽에서 소송을 건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그건 내부적으로 혼선이 있어서 생긴 일입니다. 아무래도 그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LC 그룹 차원에서 나섰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내부적인 혼선이라는 말로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니다.
LC 화학이 편법을 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허 투자를 장난으로 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최민혁은 LC 화학이 투자하는 특허를 가로챈 셈이다.
소송에 들어가면 LC 화학이 일부 승소할 수도 있다.
다만 미래 기술 역시 이제까지 LC 화학에 당한 보상을 받아야 했다.
실로 미묘한 상황이다.
꾸벅 허리는 숙이는 임명진 부장 모습에서 흔한 대기업 갑질을 찾을 수는 없었다.
배종구 사장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들은 무려 LC 화학을 대신해서 나온 이들이다. 그런데 소송전까지 불사하면서 넌지시 협박을 했던 LC 화학 직원들과는 태도가 달랐다.
“한쪽은 소송으로 협박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협상하자고 하는군요.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다시 90도 폴더 인사를 하는 임명진 부장은 진심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배종구 사장에게 있어 신기한 일이었다.
그 자신이 알던 LC 그룹은 중소기업을 노예처럼 착취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LC 화학 직원은 툭하면 전화해서 공갈 협박을 일삼았다.
물론 말을 돌려서 했지만 말이다.
최근 정부에서 중소기업 지원이다 뭐다 말을 무수히 내뱉었다.
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개발 자금 공제도 확충했다.
그런데 현실을 전혀 모르는 탁상행정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리를 잘 모르기에 나온 판단이었다.
지금의 LC 그룹이 보이는 태도가 가능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때문이다.
‘역시 최 실장님 때문일까?’
배종구 사장은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내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뭐, 이미 다 지난 일에 제가 집착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굳이 협상하려면 최민혁 실장님을 직접 찾아가셔야 할 겁니다.”
“네?”
“이미 조사를 했다면 아시겠지만, 우리 미래 기술 지분 80%를 소유한 분이 최민혁 실장님입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야기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임명진 부장도 사실 익히 아는 내용이다. 다만 그는 실무를 모두 배종구 사장이 책임졌다고 생각해서 혹시나 하여 매달린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배종구 사장은 상황을 잘 모를 것 같았기에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더이상 얘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최 실장은 이야기가 좀 다르지.’
그는 아쉬운 마음에 몇 번 더 배종구 사장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몇 가지 실무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미래 기술을 떠나고 말았다.
“정말 아쉽습니다. 전 미래 기술 주인이 배종구 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배는 떠났습니다.”
배종구 사장은 그저 임명진 부장이 혀를 내두른 채 떠나는 모습만 볼 뿐이었다.
‘기분은 정말 좋네. 이런 날이 오다니.’
갑질은 대기업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또 아니었다.
* * *
“최민혁 실장이라…….”
한병수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반복하면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임명진 부장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혹시 실수는 하지 않았겠죠? 괜히 미래 기술을 건드려서 최민혁 실장 귀에 들어가면, 간이 좁쌀만 한 그 인간이 무슨 행패를 부릴 줄 모릅니다.”
“…정중하게 처신했습니다.”
“그래요.”
한병수 실장은 임명진 부장을 믿었다. 과묵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신중할 때는 또 그렇게 신중할 수가 없었다.
“차세대 배터리 시제품 개발은 어떻게 되었다고 하던가요?”
“그걸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전에 얻은 정보만 봐서는 시제품 개발에 이미 착수한 것 같습니다.”
“최악에는 이미 시제품이 나왔다고 봐야겠군요.”
“그렇게 보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예 입을 다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으니 보안에 더 집중했을 겁니다.”
이게 문제였다.
그 자신이 들은 바로 미래 기술이 내놓은 배터리 신제품은 기술 제품 대비 무려 4~5배 이상 사용 시간이 길다고 들었다.
사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아직도 몰랐다.
지금 같아서는 헛소리라고 믿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도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과 먼저 협상해서 이 배터리를 쓴다면 LC 전자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권태성 기획실장이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또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지금 오성 전자가 이상하게 KM 전자에 저자세인 것 때문이다.
심지어 소형 LCD 공급과 관련해서는 오성 전자는 KM 그룹 계열사인 것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LC 전자 역시 찍소리도 못했다.
그게 최민혁 실장을 가능하면 직접 만나려 하지 않는 이유였다.
최 실장이 마치 LC 그룹 웃어른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 이게 무슨 일인지.”
한병수 실장은 답답해서 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했다.
방전 전압부터 시작해서 수명, 사용 횟수 모든 면에서 우월한 차세대 배터리가 나타났다.
LC 그룹 차원에서 해당 기술개발을 목표로 한 시점이 무려 5년 후인데 그 물건보다 앞선 기술이다.
이 개발을 위해서 도시바와의 협상에서 여러 가지 계획안을 짜놓았다.
투자금도 최소 2,000억, 최대 4,000억을 퍼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판이 깨져 버린 것이었다.
“도시바 측에서는 뭐래요?”
“그게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계속 미적거리기만 합니다.”
한병수 실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 쪽발이 새끼들이 또 수작을 부린다고 판단했다.
“가만, 일본 업체 측에서 이미 최민혁 실장을 만났다고 했죠?”
“그건 확실합니다.”
“정말 이상하군요. 도대체 일본 애들이 그런 정보를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알고 움직였다는 말인가요? 일본 애들이 첩자를 KM 전자 내에 박아놓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요?”
임명진 부장은 순간 머뭇거렸다. 그도 조사 과정에서 시간이 부족해서 모든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말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최문경 부회장 라인 쪽에서 일본 업체에 정보를 흘렸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네? 설마 일본 업체와 최민혁 실장 사이를 이간질할 계획이었다는 겁니까?”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업체가 배신해서 바로 최민혁 실장을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돌더군요.”
배신의 아이콘 일본 기업다운 판단이었다.
“과연 쪽발이답군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미래 기술을 파면서 관련 정보를 우연히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병수 실장은 ‘우연’이란 말을 믿지 않았다.
“우연이라, 별로 안 좋은 말이네요. 그보다는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 정보를 우리 측에 흘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어요.”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슬그머니 최문경 부회장 라인인 것처럼 정보를 흘렸다. 그것까지는 이들이 알지 못한 것이었다.
한병수 실장은 지금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더욱이 상황이 이전처럼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한국 내수 경기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무리한 투자를 진행하기도 어려웠다.
“우성 건설 도산 말인데요, 도대체 왜 정부가 그냥 손 놓고 있었답니까?”
“그게 아무래도 방만한 경영 때문에 세금으로 기업을 살렸다가 여론의 역풍에 휘말린 것을 염려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긴 우성 건설이 좀 무리하기는 했죠.”
그는 내심 탄식했다.
‘아니, 꼭 우성 건설만 비난할 수는 없어. 걔들이 좀 심할 뿐이지. 우리 LC 전자라고 다르지 않으니까.’
당장 도시바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배터리 사업도 문제였다.
계열사별로 이쪽저쪽에 무리하게 일을 벌여놓은 것이 많았다.
이제까지 그런 문제는 크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LC 그룹 차원에서 우성 건설 도산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우성 건설 도산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서 우성 건설을 살리지 않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한병수 실장은 때문에 무리한 투자를 진행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나서면 또 얼마나 돈을 뜯어낼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쪽발이를 이용하는 것 자체가 대형 미끼일 수 있어.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기를 원하는 거야. 그래야 마음대로 가격을 부를 테니까.’
고민한 끝에 다른 대안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김현탁 사장과 약속을 잡으세요.”
“…알겠습니다.”
* * *
김현탁 사장은 갑작스러운 한병수 실장과의 약속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한병수 사장과 같은 재벌 2세인 터라 알고 지내기는 하지만 속내를 주고받을 정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남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최민혁 실장 관련 이야기였다.
최민혁으로 시작해서 최민혁으로 끝나는 도돌이표 이야기다.
그도 처음에는 내심 화가 나서 한마디 하려다가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무려 3시간 가까운 술자리를 갖고서야 그가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았다.
‘미친 새끼. 그냥 쉽게 말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어렵게 말을 하는 거야? 자존심 때문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어. 민혁이 그놈하고 엮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김현탁 사장은 그렇다고 한병수 실장을 비웃지는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팠다.
특히 술자리에 나온 우성 건설 파산 이야기는 그도 쉽게 넘기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실을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김희찬 부사장 역시 평소와는 달리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KD-LCD가 문제야. 신기술이 나쁘다는 것은 아냐. 하지만 양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LCD 사업은 일종의 장치 사업이다. 투자도 많이 들 뿐 아니라 본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 아무리 LCD 전문가를 뽑아도 그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일이 외풍이 없다면 큰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