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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14화 (614/1,021)

#614.

“정상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아무리 부실한 경제라고 해도 정부가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외부 압력에 영향을 쉽게 받는 곳이 있습니다.”

“…설마 동남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그제야 방긋 웃었다.

“그렇죠. 외부 충격에 쉽게 요동을 칠 곳 중의 하나가 동남아죠. 자, 그러면 생각을 해보세요. 만약 동남아 경제가 흔들리면, 우리 한국 경제가 영향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그거야…….”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X 리포트’ 내용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역시 X 리포트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과장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성 건설이 파산하자 좀 다른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우성 건설이 X 리포트라는 영화에서 듣보잡 단역이긴 해도 분명 출연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최민혁의 말인즉, 이제 슬슬 X 리포트의 조연이 등장한다는 이야기였다.

최민혁은 차갑게 굳은 최용욱 회장 일행을 보면서 양손을 펼치고 웃었다.

“자, 대충 시나리오는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 업체를 통한 일본 자금과 베일런스 같은 업체를 통한 미국 달러와 소통할 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심지어 에플, 퀄컴, ARN과 같은 업체를 통해서도 자유롭게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다면 말이죠.”

몇 달 전에 말했다면 그저 말로서 끝날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말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KM 전자 내에는 천문학적인 달러가 쌓여가니까.

“외부 쇼크가 일어나면 단기적으로 안정적인 달러를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달러 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그럼 시류를 이용해서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는 거죠. 그것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말입니다.”

장승일 실장은 냉정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진행되려면 전제 조건으로 동남아를 흔들 정도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최민혁도 이번에는 웃기만 했다. 그는 장승일 실장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자극해서 더 많은 정보를 토해내게 만들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 실장님도 참 공짜를 좋아하시네요.”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자신의 꼼수를 알아채자 움찔 놀랐다.

“그, 그건…….”

“솔직히 그 정도 인식이라면 제 조언이 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제가 모든 미래를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니까.”

조용히 듣기만 하던 최용욱 회장이 당황한 장승일 실장을 대신해서 침음성을 터뜨렸다.

“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징후가 드러날 겁니다. 작년 한국 건설 업체의 연쇄 도산이 징조 중의 하나니까요. 우성 건설은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면 우성 건설은…….”

“우성 건설을 인수해서 KM 건설의 덩치를 키우고 싶다라? 그게 작년이라면 통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를 겁니다. 경기가 급속히 하강 곡선을 그릴 테니까요. 미국요? 미국은 상황이 다르죠. 오히려 달러 가치가 상승할 테니까. 그런데 에플 지분을 팔아서 국내에 투자한다라? 할아버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으음.”

최용욱 회장은 손자에게 구박을 받고는 신음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최민혁이 한 이야기는 전혀 허황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심각한 이야기였다.

그는 에플에 투자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이니까.

다르게 보면 최민혁이 지금 한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자칫 우성 건설을 함부로 인수했다간 여지껏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돈을 다 날려 먹는다는 이야기였다.

최민혁은 넌지시 한 가지 방법을 말해주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합니다. 달러를 쥐고 있다면 그 가치는 계속 오를 테니까. 할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어려울 일입니까? 그렇게 탐욕을 참지 못하시겠습니까?!”

“아, 아니다.”

무안한 최용욱 회장을 앞에 두고는 최민혁은 멈추지 않았다.

“저도 할아버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인내는 그보다 더 중요한 과실을 얻게 하는 최강의 무기입니다.”

“…크흠, 그래 알겠다.”

이제까지 최용욱 회장에게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늘어놓은 최민혁은 민망한 최용욱 회장에게 툴툴거렸다.

“할아버지는 정말 저에게 고마운 줄 아셔야 할 겁니다!”

“지, 지분을 넘겼지 않느냐?”

KM 산업 지분 2%였다. 기존에 넘기기로 했던 것까지 합쳐서 모두 4%였다.

“겨우 그깟 지분 가지고 생색내시는 겁니까? 좋아요. 그 정도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좀 진지하게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겁니다. 돈이 좀 생겼다고 이쪽저쪽에 막 쓰지 마시고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정도 조언이라면 최용욱 회장이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셋째 큰아버지 경우는 특이하네. 설마 할아버지를 직접 찾아가서 증여분을 요구했다니. 그렇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일단 배터리 쪽부터 우선 마무리해야겠어.’

* * *

최민혁은 우성 건설 도산 사태를 보면서 이전과는 달리 리튬폴리머전지에 관한 특허를 출원하면서 배터리 관련 사업의 속도를 올렸다.

미래 기술로 이직해서 팀장 자리를 꿰찬 허종진을 자극한 것이다.

그는 전자 부품 연구소에 있던 동료 몇 사람을 유혹해서 함께 끌어들였다.

이미 원천기술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다.

이들이 미래 기술 실무진과 손을 잡고 일을 밀어붙였다.

거기에 최민혁 실장이 그 기반 기술을 내놓았으니, 배터리 샘플 생산은 어렵지 않게 끝났다.

“호, 이게 차세대 리튬이온이란 말이죠?”

“네!”

사이즈는 최민혁 자신이 인생 1회 차에서 알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거라면 KMP-02에 적용할 수가 있었다.

결과는 대만족.

동일 크기로 무려 배터리 용량만 4배 이상 늘어났다.

KMP-01에서 고질적인 문제가 된 사용 시간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이 된 셈이다.

거기에 제품 단가는 덤이다.

미래 기술을 통해서 직접 공급받는 만큼 이익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최민혁은 정말 별것 아닌 결과물에 내심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허종진 팀장은 침을 튀겨 가면서 이 제품의 가치를 말했다.

“2차 충전이 가능한 이 리튬이온배터리는 당장 PCS 단말기에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당장 LC 화학이 이 전지 개발을 위해서 무려 2,000억 이상의 연구개발비를 투자할 계획입니다.”

게다가 단순히 기술 개발에서 끝날 사업이 아니었다.

니켈 수소 전지에 대한 생산 역시 같이 병행되니까.

일본 도시바가 직접 LC 화학과 손을 잡은 셈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무려 5년을 염두에 뒀다.

90년대 말을 목표로 해서 진행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벌써 나왔다.

아니, LC 화학에서 진행하는 결과물보다 더 발전된 형태였다.

허종진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이미 리튬폴리머전지에 관한 연구도 진행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리튬폴리머 양산은 당장 어려울 겁니다. 이에 비해서 리튬이온전지는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습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그 결과물 역시 미래 기술을 통해서 진행될 거니까.”

“저, 정말입니까?”

최민혁은 불안에 떠는 허종진 팀장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미래 기술 지분을 인수한 것은 다 미래를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휴우, 다행… 아, 아닙니다.”

“쯧,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보다는 양산성 검토에 착수해 주세요. 당장 납품해도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할 겁니다. 메드 드로닉 같은 곳에서 우리 제품을 억지로 사용하도록 해야 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옆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배종구 사장은 그저 허리만 숙였다.

다만 윤종수 전무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말했다.

“LC 전자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LC 화학이 아니라 LC 전자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LC 전자의 한병수 실장입니다.”

“아, 한병수 실장 말입니까.”

최민혁도 IPS-LCD 협상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들이 자신이 아니라 미래 기술 인사를 먼저 만난 것에 웃고 말았다.

‘배후가 나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서 손을 쓴 것일까?’

정확히는 한병수 실장이 최민혁을 부담스러워해서 진행한 일이다.

일단 미래 기술 사장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과는 협상해 봐야 얻을 것은 없고, 오히려 뜯기기만 하므로 최민혁을 피한 것뿐이다.

윤종수 전무는 왜 LC 전자 측에서 손을 쓴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했다.

“LC 화학이 도시바 측과 만나서 협상한다는 이야기가 돌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확정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실상 LC 그룹과 도시바 측이 만나서 현재 조율 중이다.

그런데 두 회사의 협상은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특허인데, 도시바 측에서도 아직 필요한 원천특허를 다 확보하지 못했다.

2차 전지는 전기 자동차, 항공우주산업 상용화에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서 상당한 조율이 필요했다.

LC 화학은 가능한 많은 원천기술을 확보하려는 중이고, 도시바 측에서도 가능하면 핵심기술을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도시바 측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배터리 생산 공장이 필요했고, LC 화학이라면 좋은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미묘한 시기에 두 회사의 복잡한 협상 자리에 재를 잔뜩 뿌린 회사가 다름 아닌 미래 기술이다.

LC 화학 측에서는 미래 기술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굳이 도시바 측과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이 직접 미래 기술에 손을 썼다가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후 LC 그룹 쪽에 SOS를 보낸 것이었다.

결국 이 안건을 중재하려고 낀 이가 바로 과거 최민혁 실장과의 협상을 이미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한병수 실장이었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배종구 사장은 그저 눈알만 굴렸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우선 이 배터리 양산에만 집중해 주세요.”

배종구 사장은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문제는 없는 겁니까?"

“모든 일은 잘될 겁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정말 걱정입니다. LC 화학에 이어서 LC 전자, 그리고 LC 그룹이 나섰지 않습니까? 결국, 다른 배터리 대기업도 나설 거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들이 나선 것은 그저 좋게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이미 당한 경험이 있는 배종구 사장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마 그런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쪽 사람이 필요한 게 있으면 저에게 직접 연락하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요즘 이런저런 일이 너무 생깁니다. 우선 건설 도산 이후에 경기가 빠르게 가라앉고 있어요. 이런 시기에 이렇게 무리수를 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성 건설 같은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손을 쓸 테니, 자금 사정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세요.”

“…네.”

배종구 사장은 당당하기만 한 최민혁 실장의 태도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떠난 모습을 본 후에도 쉽게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윤종수 전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민혁 실장님이 저렇게 말을 할 때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나도 모르겠어.”

사실 배종구 사장은 지금 상황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LC 화학, LC 그룹, LC 전자 인물이 앞다투어서 자신을 찾아와서 허리를 숙였다.

권력이라는 것.

이번에 얻고 나서야 그 참맛을 느꼈다.

그는 이제 딱 이 정도 상황만 유지된다면 더 욕심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LC 그룹 선에서 그치기는커녕 계속 커지기만 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온갖 업체에서 다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님이 그렇게 무서운 걸까? 다들 우리 쪽에만 연락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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