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그런데 최동영 상무의 일은 그의 인지 밖에서 일어난 것들이 대다수다.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뭐 미래시가 완벽할 수는 없지.’
세상일이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최동영 상무 일이 그랬다.
저러니 최용욱 회장도 최동영 상무를 쉽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민혁은 결국 다르게 질문하고 말았다.
“우성 건설 인수는 너무 갑자기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최동영 상무도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슬쩍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꼭 그렇지도 않아. 난 민혁이 네가 지금까지 한 실적을 꾸준히 살폈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 지원을 받았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라 확신했지. 그러던 차에 미래 기술 인수를 발견했다. 나로서는 꽤 쇼킹한 일이었다. 나라고 해서 못 할 일이 아니니까.”
그는 결국 ‘미래 기술’ 인수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쌓여온 것이 미래 기술 인수 이후에 일어난 일 때문에 폭발했을 수도 있지. 일본 업체가 날 찾아오고, LC 그룹에서도 움직였으니까. 그러면 오성 그룹을 비롯한 다른 대기업 역시 이미 내부적으로 검토 단계일 테니까. 어째 지금까지 조용하다 싶었는데, 다 이런 일 때문이겠어.’
최민혁은 곧 태도를 바꾸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성 건설 인수는 안 됩니다.”
“건설 경기 불황 때문에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X 리포트라면 나도 안다. 그 내용을 충분히 암기할 정도로 봤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이는 겁니까?”
“글쎄,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지금이라면 정부 도움을 얻어서 헐값에 우성 건설을 인수할 수도 있어. 난 그걸 말하는 거다.”
“그 정부가 부실 정부여도 말입니까?”
“그건 너무 나간 생각이 아닐까?”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한국 정부도 파산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민혁아, 네 조언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야.”
최민혁은 몇 번이나 조언해도 최동영 상무가 X 리포트를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는 것을 알자 그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두지만 전 할아버지에게 우성 건설 인수는 무조건 반대할 겁니다. 셋째 큰아버지가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래.”
최동영 상무는 최민혁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조카 최민혁은 이제 자신도 함부로 상대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 아니야. 정부가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길바닥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내버려 두겠어? 아버지가 이런 점을 모르지 않을 거야.’
* * *
우성 건설 문제에 대해 정부에서 충격을 막기 위해서 나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사태는 극단적으로 파국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런데 문제는 우성 건설이 이제까지 해온 방만한 경영이다.
언론에서 이 사실을 기사화한 이후에 민심이 나쁘게 흘러갔다.
때문에 혈세를 투입해서 우성 건설을 정상화한다는 방침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일선 기관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승일 실장은 이런 우성 건설의 현 상황보다 앞일을 더 우려했다.
“우성 타이어를 비롯한 계열사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이와 관련된 중소기업들 상태도 파국으로 흘러갈 겁니다.”
최용욱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은행권에서 손을 쓴다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작년 건설사 연쇄 도산 이후로 은행권이 정부 요구에 부응하는 척하면서도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국, 3자 인수 같은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에도 연락이 온 건가?”
“네. 현재 우성 건설을 인수할 여력이 있는 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당장 10대 대기업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 역시 막대한 대출을 받아서 기업 규모를 키워왔기 때문입니다.”
몇몇 예외는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규모와 형태만 다르다 뿐이지 다들 은행 돈을 쌈짓돈 취급해서 마구잡이로 문어발식 확장을 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꼭 한국 기업의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을 핵심을 찍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일본이 저금리를 내세워서 국내에 마구잡이로 대출을 해줬다는 겁니다. 그리고 은행이 그 돈을 다시 국내 기업에게 지원해 줬습니다. 그것도 단기로 말입니다.”
“그거야 은행이 대출을 연장해 주면…….”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X 리포트를 떠올렸다. 사실 그도 최민혁의 능력을 인정해서 최민혁 제안을 따르기는 했지만, 설마설마했다.
그 사태가 지금에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가슴 한구석이 차가워졌다.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건설도 X 리포트의 단기 조연 중의 하나입니다.”
“하.”
그는 최동영 상무의 제안을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지금은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혁이 그 녀석과 약속을 잡아!”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한 것처럼 차분하게 대응했다.
* * *
우성 건설 부도는 어느 날 포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일어났다.
다들 눈앞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아파트 잘 짓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우성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작년에 계속 나온 건설 업체 연쇄 도산의 연장선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이 문제를 단순히 아파트 입주 예정자 문제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최민혁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관심이 가는 뉴스는 아니었다.
우성 건설이 파산하든 말든 그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보다 배터리 사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에 바빴다.
그런 상황에서 또 최용욱 회장이 찾아오자 번거롭기만 했다.
아니, 화가 났다.
자신이 무슨 동네북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앞뒤 다 무시하고 최민혁을 찾아왔다.
자신이 다급하게 도피한 도심 속 공원이었다.
“…호, 여기도 운치가 있구나.”
최민혁은 캔 음료수를 홀짝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는 설마 이곳까지 최용욱 회장이 찾아올지는 몰랐다.
그도 처음에는 이 자리가 불편했다. 그런데 문득 이 일을 그냥 둘 수만은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가진 자금을 일단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위기 상황이 어떤 단계인지는 말해둬야 했다.
‘최소한 첫째 큰아버지에게 자금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해.’
“제가 시간 되면 찾아뵙는다고 했는데, 굳이 이러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을 비롯한 수행원은 공원 벤치 옆에 우르르 서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오가는 시민들이 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대낮 공원에 정장 차림 수십 명의 장정이 조폭 두목을 대하듯이 두 사람을 대했기 때문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정장을 입은 십여 명의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조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도 지금 상황이 민망했다.
“…설마 여기 있는 줄은 몰랐다.”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저도 제 사업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잠깐 쉬러 나온 겁니다.”
“배터리 사업 말이야?”
“네, 이쪽저쪽에서 찔러대는 곳이 많아서 말입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까지 연락이 와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고민 중입니다.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협력 업체 중에는 일본 업체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거, 문제가 될 거다.”
“우리 부회장님이 친일파라고 몰아갈 거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딱히 문경이가 아니어도 많아. 널 싫어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잘 아시는 이들인가 보죠?”
“아무래도 이야기하기 불편한 너보다는 나에게 하소연하니까.”
최용욱 회장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난 국세청 사태 이후에 최민혁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다들 이미 지난 일보다는 최민혁이 가진 황금에 더 집착했다.
특히 정치권 인사 중에 그런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최민혁이 정치권 쪽과는 완전히 선을 그은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더욱이 이제는 최용욱 회장이란 장벽도 소용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의 역량으로 계속해서 최민혁을 덮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그 때문에 손자 최민혁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고루한 인간들이 민혁이 녀석은 부담스러워한다니. 보면 볼수록 놀랍다니까.’
실로 특이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연출된 것은 KM 전자의 계열사 대부분이 바로 미국에서 잘나가는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몰락을 거듭한 에플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에 있는 유수의 권력자, 대기업들이 최민혁을 주의 깊게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 일은 정치권에도 영향을 줬다.
미국 내에서 소위 말하는 힘 있는 인사들이 한국 정치권 쪽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압박이 아니라 관심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거였다.
그들로서는 최민혁이 부담스러웠다.
심지어 이런 관심은 경찰도 비슷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뒤늦게야 최민혁과 최용욱 회장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거듭 허리 숙여서 사과했다.
십여 명의 경찰이 동시에 하는 120도 폴더 인사 모습 자체가 오히려 조폭 같았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다들 혀를 내둘렀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최민혁은 조폭이 공원에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도 어이가 없었지만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성 건설 말이다.”
그는 이미 짐작한 일이라서 바로 대답했다.
“우성 건설 하나면 사실, 문제가 안 됩니다. 인수합병 하기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아니라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최용욱 회장은 흥미롭게 최민혁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이전처럼 소극적으로 듣지 않았다. 진지하게 들었다.
그건 장승일 실장을 비롯한 기획 조정실 임직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의 주장을 정말 심각하게 들었다.
아니, 녹음기까지 꺼내 들고 최민혁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만 했다.
최민혁은 달라진 기획 조정실의 태도가 부담스러워서 잠깐 흠칫했지만, 곧 웃고 말았다.
-하하하.
목젖이 보일 정도로 통쾌하게 말이다.
X 리포트를 의심하던 이들의 변화된 모습에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제가 왜 굳이 일본 업체와 손을 잡으려고 하겠습니까? 왜 굳이 베일런스 업체까지 끌어들이려고 하겠습니까?”
“…자금 때문이냐?”
“정확히는 달러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지금 환율이 낮다고 해도 700원 후반대야. 네가 말하는 최악의 사태와는 아직 거리가 멀어.”
“그건 맞습니다. 단, 그건 외부 충격이 없다는 전제가 깔려야 합니다.”
“…달러가 빠져나갈 상황이라도 생긴다는 거냐?”
“네. 정확히는 굳이 달러에 한정된 얘기는 아닙니다. 미국 정부가 파산할 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와 연동된 다른 돈은 다릅니다.”
“…….”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머리를 굴렸다. 그는 도대체 손자가 뭘 이야기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승일 실장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실장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엔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사 엔화가 단기에 빠져나간다고 해도 우리 한국 기업이 큰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죠. 그런데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좀 다릅니다.”
“그건 더 이해가 안 됩니다. 한국 금감원이 바보가 아닙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철저하게 감독하고, 지켜볼 겁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거야 국내 사정은 그렇죠. 그런데 해외에서 문제가 터지는 경우는 좀 달라요. 금감원이 설마 다른 나라 경제까지 간섭할 수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이미 이 문제를 가지고 꽤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는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니, 공격적으로 나섰다.
“외람되지만 제가 아는 바로 우리 한국 경제에 영향을 줄 만한 사태가 일어날 낌새는 없습니다. 실장님이 말하시는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