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솔직히 당시 에플은 망해가는 회사였습니다. 그런 회사가 다시 이렇게 살아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야? 그것도 욕심이야!”
“아버지, 전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받을 증여분만 받으면 됩니다. 딱 거기까지만 원하는 겁니다. 그건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렇겠지.”
최용욱 회장은 새삼 개성이 뚜렷한 세 아들의 행동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니, 병문이 그 녀석이 살아 있다면 모두 넷인가?’
욕심의 화신체인 최문경 부회장.
탐욕의 아바타인 최훈열 전무.
차갑기만 한 최동영 상무.
집착의 결정판인 최병문 상무.
여기에 이들 넷을 합쳐서 어벤저스를 구성하는 것보다 더한 손자 최민혁까지 말이다.
‘뭐, 민혁이 본인 입으로 조용히 살고 싶다는 소리만 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민혁이 그놈 욕심이 제일 지독해!’
최동영 상무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묵묵히 인내하기만 했다.
최용욱 회장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내 요구는 잘 알겠다. 하지만 나도 생각할 것이 좀 있구나. 바로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다.”
“그 정도면 됩니다.”
최동영 상무는 조용히 일어나서 인사만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최용욱 회장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성 건설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싶어.]
* * *
우성 건설의 상황은 생각보다는 간단하지 않았다.
최동영 상무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KM 건설이 우성 건설을 인수하든, 하지 않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증여를 제대로 받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최용욱 회장을 공략했지만, 이것만으로는 곤란했다.
그의 아내 조희정은 눈치가 빠르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최용욱 회장 공략에 손을 거들었고, 이번 일 역시 스스로 나섰다.
바로 최민혁 어머니인 정미선의 촬영장에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
지난 드라마가 망작이 된 후에 정미선의 입지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SBC 주말 드라마에서는 비중이 큰 조연 역할을 맡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지난 영화에서 딸 역으로 호흡을 맞췄던 김승연이 이번 드라마에서도 여자 주연을 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미선을 마치 진짜 어머니인 것처럼 대했다.
두 사람 사이는 드라마 사이의 모녀가 아니라 진짜 모녀 같았다.
김승연은 때문에 갑자기 정미선을 찾아온 조희정을 친절하게 대했다.
다른 촬영 스태프가 촬영 중에 방해하지 말라는 강압식 태도를 보인 것과는 달랐다.
“어머,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고마워요. 저도 승연 씨 영화 잘 보고 있어요.”
조희정은 딱히 자신이 재벌가 며느리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니 촬영 스태프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뭐, 그건 정미선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촬영 스태프 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조희정은 이야기가 달랐다.
“어머, 혀, 형님? 아, 안녕하세요.”
“동서, 오랜만이야.”
조희정은 마치 친동생을 만난 것처럼 부드럽게 행동하고 말했다.
“…네.”
정미선은 이제 가족 모임에서 이전처럼 압박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그렇다고 자신을 찾아온 조희정을 남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희정에게 촬영장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담당 PD는 즉각 뛰어와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마치 이번 기회를 노린 사람인 양 두 사람을 최고 어르신으로 대우했다.
다른 촬영 스태프는 그때야 정미선과 조희정의 정체를 알았다.
[맙소사, 정말 최민혁 실장의 어머니가 정미선 씨란 말입니까?]
[그래, 뭐 촬영 중에 괜한 일을 만들기 싫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최민혁 실장이라면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말하는 것이 맞죠? 일전 에플, 퀄컴, ARN 인수를 주도한 분 말입니다!]
[어.]
[세상에!]
촬영 스태프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최민혁 실장이 투자한 기업은 이미 초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에플의 차기작을 둘러싸고 이미 에플 주가는 상승세를 지속했다.
비록 조정장을 거치면서 간혹 급락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거기에 CDMA를 둘러싼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다.
이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ETRI였다.
CDMA 개발에 관여한 덕분에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다들 이 문제를 그저 단순 로열티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야 최민혁 실장 덕분에 ETRI가 자기 로열티 지분을 제대로 챙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퀄컴은 이 부분에 대해 보상을 해줄 계획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내부 폭로자를 통해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했던 실적이 하나둘씩 터져 나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에플이다.
에플이 차세대 제품 공개 날짜를 정했기 때문이다.
요즘 간간이 나오는 미래 기술 이야기 역시 빼놓기 어려웠다.
최민혁 실장이 자기 자금으로 미래 기술 지분을 인수한 후에 일어난 일은 마치 경영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미래 기술은 기술과 자본 두 가지를 챙기면서 단번에 비약했다.
최근 일본 업체와 한국 대기업 배터리 업체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야기가 찌라시를 통해서 흘러나가면서 상황이 더 달아올랐다.
미래 기술 지분에 관한 관심은 이제 뜨겁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드라마 담당 PD 이재환은 이걸 잘 알기에 정미선에게 조심했다.
따라서 촬영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두 사람에게 편의를 봐주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일은 모르니까.
어쩌면 투자를 더 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방송 제작에도 큰 도움이 될 30~40억이 용돈에 불과했기에 딱히 과한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미선은 오히려 이런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연기였다.
과도한 시선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 두각을 드러내고 싶었다면 아들 최민혁의 제안을 받았을 것이다.
최민혁의 영향력이라면 얼마든지 드라마 주연에 자신을 꽂아주고도 남았다.
그녀도 이제는 최민혁의 능력이 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았다.
“…형님, 갑자기 이렇게 촬영장을 찾아와 주셔서 고맙기는 합니다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을까요?”
조희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딱히 뭘 부탁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냐. 다만 우리 사이가 너무 먼 것 같아서 그걸 좁히고 싶어. 우리는 가족이잖아.”
여기다 대고 ‘가족 같은 소리 하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
정미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씀은 부담스러워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도 바보가 아닙니다. 혹시 민혁이랑 관련된 일입니까?”
“…그건 아냐.”
“형님!”
“음…….”
조희정은 망설였다. 그녀는 사실 직접적인 도움을 청하러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문제가 될 과거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남편에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실제로 그가 원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정미선의 위치는 이제 단순히 막내 동서의 위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KM 그룹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최민혁의 눈치를 볼 정도이니까.
“솔직히 지난 일은 정말 미안해. 나라도 자네를 도와줬어야 했어.”
정미선은 조희정의 태도가 이제는 불편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는 건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마냥 좋게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그만 좀 하세요.”
하지만 조희정은 결코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안 믿겠지. 그래도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
조희정은 뜻밖에도 여전히 자기 내심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정미선에게 사과만 하고는 결국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과거 정미선이었다면 공감을 했을 테지만 지금의 정미선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도 아들 최민혁 때문에 생각보다 수도 헤아리기 어려운 정도로 다양한 제안을 들어봤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는 솔직히 지겨웠다.
방송국 국장조차 그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뒤늦게 안 이야기였지만 SBC 방송국에서 아들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고 지금 드라마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녀는 냉큼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사정을 말해주었다.
[민혁아, 미안하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네.]
* * *
최민혁은 정미선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한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그는 셋째 큰엄마가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자기 속내를 드러냈다면 편했을 테니 말이다.
그냥 화를 내고, 분노를 드러내면, 차라리 그랬으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참다못해서 조희정이 아니라 셋째 큰아버지인 최동영 상무에게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곧 서울 남산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그를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최동영 상무는 최문경 부회장과는 달리 따스하게 말했다.
“그래. 요즘 네 이야기 잘 듣고 있다.”
그는 최민혁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느긋하게 행동했다.
딱히 어떤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이 잔을 단숨에 비우면서 힐끗, 최동영 상무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집착이나 욕망도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가 아는 인생 1회 차 기억이 없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정말 연기력 한번 압권이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난 너의 큰아버지다. 당연히 신경을 써 줘야 하지 않겠냐.”
“그런 말을 하면 제가 그대로 믿을 것 같습니까. 차라리 첫째 큰아버지처럼 대놓고 행동하세요. 그게 마음이 더 편하니까.”
“내 와이프 때문에 그러냐?”
“갑자기 왜 제 어머니 촬영장까지 찾아가신 겁니까?”
“아니, 난 그게 더 이상하다. 같은 며느리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아. 우리는 가족이다.”
“…….”
최민혁은 괜히 자신이 나쁜 조카가 된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동영 상무 이야기는 형식적으로 다 맞는 일이다.
다만 그 일을 왜 이전에는 하지 않다가 갑자기 이러느냐 하는 점이다.
“…우성 건설 인수 때문입니까?”
“그 이야기가 왜 이 자리에서 나오는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내심을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뻔히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솔직히 전 셋째 큰아버지가 왜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는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이 자리에 오고서야 알았습니다.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걸. 정말 무섭습니다!”
“기회라…….”
최동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그는 일단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날 첫째 형이랑 동격으로 취급하지 말아라. 난 KM 전자 내부 갈등에 전혀 끼지 않았어.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 의심이 되면 훈열이 형과 대질해도 좋아. 난 정말 그 일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그리고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난 KM 건설에만 주력했다.”
실제로 KM 건설의 막대한 부채를 정리한 사람은 최동영 상무였다.
그는 KM 그룹 구조조정의 흐름에 동반해서 KM 건설 부실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비록 그 과정에서 KM 건설 매출이 반토막 나는 바람에 말이 나왔지만 그래도 꿋꿋이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KM 건설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KM 건설의 이전 주가를 다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KM 그룹 차원에서 진행한 구조조정이라고 해도 최동영 상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민혁도 이 자리에 오기 전에 KM 건설 보고서 현황을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최동영 상무가 최소한 최훈열 전무처럼 굴었다면 대하기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이것대로 불편하네.’
결국 인생 1회 차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