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
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였다.
외부의 충격이 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우성 건설처럼 외부에서 충격을 받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지금 위치에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손자 최민혁 덕분이니까.
‘민혁이 이 녀석, 진짜 보통이 아니야.’
이제는 손자 최민혁을 단순히 대단하게만 여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손자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허원진 부회장 꼴이 났을 수도 있다.
만약 무리하게 투자를 받았다면 말이다.
‘이번 일은 최근 국내 자금 흐름이 좋지가 않아서 생긴 일이야. 어쩌면 이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민혁이 이 녀석이 한 모든 조언이 다 맞을지도 몰라.’
최용욱 회장은 이런저런 고민을 한 끝에야 겨우 진정할 수가 있었다.
그는 새삼 최동영 상무가 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성 건설에 관해서 사전 조사 한 것을 다행하게 생각했다. 혹시 최동영 상무가 이미 떠났나 싶어서 집사에게 물어봤는데, 여전히 있다는 소리에 혀를 찼다.
‘동영이 이 녀석이 지금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서 의아했는데, 계획은 있었구나.’
우성 건설 사태.
그리고 최동영 상무의 요구.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한 후에 최동영 상무를 다시 호출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네? 뭘 말입니까?”
최동영 상무는 냉큼 바둑 삼매경에 빠진 사람처럼 바둑판을 살피다가 반문했다. 이번 일을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모습 자체가 이질적이었다.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용욱 회장은 꼼수를 부리는 셋째 최동영 상무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괜히 마음 쓸 것 없어. 네 녀석 때문에 우성 건설을 살폈어. 충분히 확인을 거쳤다. 뭐, 아직은 좀 부족한 부분이 있기는 해. 그래서 네 의견이 듣고 싶다. 너는 우성 건설 건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잘 모르겠습니다.”
최동영 상무는 직접 우성 건설을 인수하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성 건설 상황이 어떻고, 미래 가치가 어떻냐에 대한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만약 KM 건설과 우성 건설이 힘을 합친다면 시너지가 생길 거라는 점도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최용욱 회장으로선 우성 건설을 조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외부에서 봤을 때는 마치 우성 건설을 인수합병이라도 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놈이 시간만 나면 이렇게 날 찾아와서 바둑을 두면서 우성 건설 이야기만 늘어놓냐? 특히 지난주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 찾아와?!”
최동영 상무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바둑 좋아하지 않습니까. 전 아들로서 아버지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아니, 부자간에 바둑 좀 두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그건 아니다만…….”
“괜한 오해를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는 최동영 상무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 바둑 건으로 뭘 얻으려고 하지 마.”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좋아. 그러면 그 이야기는 끝내자.”
최동영 상무는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최용욱 회장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 이놈 봐라.’
* * *
최용욱 회장은 최동영 상무와 잠깐 거리를 두려고 마음먹었다.
바둑 대국도 일단 중단했다.
그런데 상황이 그의 기대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셋째 며느리인 최동영의 처 조희정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며느리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저택에 눌러앉았다.
“제가 이제까지 너무 아버님께 소홀한 것 같아서 반성 많이 하고 있습니다.”
“괜찮다.”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글쎄, 내가 불편해.”
“죄송합니다.”
조희정은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막장 재벌 드라마의 며느리 역을 열연했다.
그 모습이 생각보다 처연했다.
“…그, 그래. 알았다.”
최용욱 회장도 차마 며느리 앞에서까지 냉정하게 굴지는 못했다.
그리고 최동영 상무는 아내를 핑계 삼아서 당분간 큰 집에 눌러앉았다.
노림수가 너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황당한 것은 두 사람이 그런 점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창부수라고 하더니.’
최용욱 회장은 이 상황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니, 그는 도저히 두 사람이 불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동영아, 도대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런데 이제까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은 채 조용하기만 하던 최동영 상무는 잠깐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다가 처음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아버지는 늘 모든 일이 공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부정적입니다. 큰형과 민혁이는 잘 도와주면서 정작 저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그거야…….”
최용욱 회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최문경과 최민혁이 관련된 일에는 온갖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어.’
최문경은 계속해서 최민혁을 상대로 수작을 부렸다.
손자 최민혁은 그에 대응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뭔가를 계속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 중에는 최용욱 회장 자신조차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러니 그도 물러나서 지켜만 봤다.
문제는 그 일이 이제는 단순히 KM 전자가 아니라 KM 그룹 차원에서 고민해야 할 수준으로 덩치를 점점 키웠다는 것이다.
차세대 배터리 사업이 그 좋은 예였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소니와 같은 글로벌 배터리 업체를 비롯한 다른 배터리 업체들이 최민혁에게 손을 내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이 조사한 내용은 황당 그 자체였다.
‘미국 베일런스라고 했지? 거기에 벨코어사는 또 뭔지?’
두 회사나 일본 회사는 최용욱 회장조차 뭘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전혀 다른 영역의 회사였다.
그러니 최동영 상무의 일은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보통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최동영 상무도 이제는 좀 달랐다.
“솔직히 메드 드로닉 소송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 기술 인수에 대해서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것 역시 민혁이의 능력이니까. 아니, 뭐 배터리 홍보와 마케팅을 위한 작업이겠죠.”
장황한 이야기에 최용욱 회장이 발끈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런데 지금의 민혁이가 있는 데에는 KM 전자 기획실장이라는 자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빨리 자리를 잡지는 못했을 겁니다.”
최동영 상무는 이제까지 마음속에 삭이고 있던 불만을 하나둘씩 털어놓았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된 과정을 말이다.
“차세대 배터리와 같은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에는 아버지가 그 기반을 만들어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최용욱 회장이 반박했다.
“그건 네가 잘못 아는 거다. 나도 메드 드로닉이나 차세대 배터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큰형이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아버지가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민혁이의 KM 산업 지분이 벌써 16%나 되는 것까지 감추실 겁니까?”
“그거야…….”
최용욱 회장은 나직이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왜 최동영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서 바둑 타령을 하는지, 여우 같은 며느리까지 끌어들였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바로 차세대 배터리가 이제까지 최동영 상무에게 쌓인 것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언제든 터질 일이었겠지. 그런 차에 우성 건설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겠어.’
최동영 상무도 조카 최민혁의 능력을 인정했다.
“제가 지난 일을 가지고 민혁이를 편애했니,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민혁이가 스스로 일군 결과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묵묵히 셋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녀석이 평소 말수는 별로 없는데, 말을 하면 참 잘한단 말이야.’
아닌 게 아니라 평소에 자기 뜻을 별로 주장하지 않던 사람이 바로 최동영 상무였다.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주목을 받는 주장을 한 적이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KM 그룹 경영 분쟁에서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을까.
다들 최동영 상무는 KM 그룹 경영권 승계에서 탈락했다는 소리를 사실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문경이랑 민혁이 이 두 녀석만 피가 터지게 싸우는 것처럼 되었어.’
이런 일이 정말 최동영 상무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최용욱 회장은 아니라 생각했다.
실제로 최동영 상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영란이를 밀어준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그건 민혁이 그놈이 요구한 조건이다.”
최동영 상무도 이번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민혁이가 영란이를 밀어주라고 했다는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다. 민혁이 그놈이 그냥 요구하기만 했어도 들어줘야 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됐으면 아마 말이 많았을 거다. 그걸 예상한 그 녀석이 그런 대안을 요구한 거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난 좀 알 것 같다. 영란이는 문경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
“그래도 딸과 아버지 관계 아닙니까?”
“…….”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도 솔직히 최영란 본부장과 최문경 회장의 관계가 이렇게 극한 대립으로 치달을지는 몰랐다.
‘살짝 견제만 해 줘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은 두 사람이 남남보다 더 심각한 관계로 치닫고 말았다.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자.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절 특별하게 편애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늘 이야기한 것처럼 공정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딱 그 정도만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KM 건설이 우성 건설 인수에 관심이 있으니, 우성 건설 인수에 도움을 달라는 소리야?”
“아버지가 이미 우성 건설을 조사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거야 네놈 때문이잖아!”
“전 아버지에게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늘 조용하기만 하던 셋째가 이렇게 자신 앞에서 이빨을 드러낼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도 어느 정도 셋째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
최소한 손자 최민혁에게 했던 수준의 지분 일부는 증여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한번 찔러보았다.
“난 돈 없다.”
“…에플에 투자하신 이익의 일부면 충분합니다.”
“…그건 어떻게 안 거냐?”
“아버지가 건물 매각할 때부터 조사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최두진 사장님도 같이 움직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두 분의 탁월한 판단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그러냐?”
최용욱 회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당시 자신이 국내 부동산 자산을 정리하던 것을 알려면 알 방법이 많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 누구도 그 문제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최민혁과 최문경 부회장의 극한 대립과 갈등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죽이기 위해서 상대측에 지대지미사일을 마구잡이로 쐈다.
손자 최민혁은 놀라운 기술을 내세워서 최문경 부회장 측을 산산조각 냈다.
그 과정에서 KM 그룹은 두 번에 걸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따지고 보면 KM 그룹 역시 두 사람의 전쟁 속에서 유탄을 제대로 맞은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셋째 최동영 상무는 그런 시점에서도 그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은 채 묵묵히 지켜봤다는 점이다.
특히 자기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휴전 시기에 와서야 자기 지분을 요구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최영란 본부장에게 준 것은 모두 최문경 부회장에 준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최용욱 회장의 처지에서는 최동영 상무의 요구를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다 좋은데, 그렇다면 넌 왜 에플에 투자를 하지 않은 거냐?”
“몰랐습니다.”
“말은 참 쉽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