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
권재홍 비서실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건 아닙니다. KM 그룹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KM 건설 역시 부채와 부실 사업부를 다 털어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손을 쓴 덕분에 부실 기업과 연대 역시 다 정리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최민혁 실장이 한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에게 조언을 들은 최용욱 회장이 그룹 차원에서 한 일이었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원래는 KM 건설을 부실화시켜서 지금 우성 건설과 비슷한 상황으로 몰고 가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회장님이 우성 건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눈치였습니다.”
“…동영이 짓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회장님이 우성 건설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습니다.”
“서, 설마 우성 건설을 인수라도 하겠다는 소리야?”
“…네.”
최문경 부회장도 기가 찼다. 그 역시 조카 최민혁을 싫어하지만, 그가 한 제안을 이제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지금 이 시기에 무리수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특허 건설업에 말이다.
“하, 그게 말이 되냐. 부실 규모만 해도 1조가 넘을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해?!”
“최용욱 회장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습니다. 당장 우성 건설 도산 충격을 막기 위해서 채권 은행이 공사 자금을 계속 대주기로 했습니다.”
“우성 건설 계열사는? 그건 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 소리야?!”
“그 일 때문에 오히려 더 회장님이 관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정부는 결코 하청업체와 아파트 입주 예정자 피해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요.”
최문경 부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권재홍 비서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이 일이 KM 건설이 규모를 키울 수 있는 건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동영이라도 아버지를 설득하기 어려웠을 텐데, 설마 재산 증여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라도 한 거야?”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이 밀어준 최영란 본부장이 두각을 보이면서 최용욱 회장도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동영이 최용욱 회장을 부추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KM 건설은 다른 한국 건설 회사와는 달리 매출이 대폭 줄기는 했지만, 내실이 안정적인 회사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결국 최문경 부회장 자신과 최민혁이 피가 터지게 싸우는 와중에 최동영이 뒤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친 셈이었다.
“이 개새끼가 진짜로…….”
그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동영이에게 연락해서 당장 만나자고 해. 만약 개소리하면 이번 우성 인수 합병 건을 엎을 것이라고 협박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 아니다. 민혁이 그놈에게 정보를 흘려. 차라리 민혁이 그놈을 이용해서 동영이 이놈을 압박하는 것이 훨씬 낫겠어. 딴짓을 못 하도록.”
“…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쓰게 웃고 말았다. 설마 최민혁 실장을 이용하려 할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게 또 괜찮은 방법처럼 보여서 반박하지 못했다.
‘하긴 최 실장님 인기는 이제 KM 그룹 내에서도 무시 못 할 정도이니.’
* * *
최민혁이 딱히 원한 것은 아니지만, KM 그룹 내 움직임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여태껏 최문경 부회장 라인을 감시하면서 생긴 결과물 중의 하나인 셈이다.
사실 그도 KM 건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부회장실이 부산하게 움직이자 곧 우성 건설의 정보를 얻었다.
“이상하군요. 이런 정보를 이렇게 쉽게 얻다니.”
조성돈 팀장도 바보는 아니었다.
“비서실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서실에서 움직이자마자 이런 정보를 얻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조성돈 팀장이 나름 인력을 동원하더라도 고급 정보를 이처럼 쉽게 얻을 수 있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했다.
그런데 이 정보는 KM 그룹 비서실이 움직이자 장승일 실장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그 정보를 얻은 조성돈 팀장이 바로 보고를 한 것이었다.
“역시 우리 부회장님이죠?”
“…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이런 사태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배터리 사업이 도화선이 되어서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하긴 메드 드로닉에 이은 배터리 사업이 생뚱맞기는 했지.’
메드 드로닉에 이은 배터리 사업.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그는 골치가 아팠다.
“메드 드로닉 소송은 어때요?”
“아직 합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도 리콜이 진행 중입니다.”
“국내 쪽 소송은 없나요?”
“메드 드로닉 코리아에서 국내 로펌과 계약을 맺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메드 드로닉이 선제 대응 한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뭐, 알아서 보상해 준다면 우리가 나설 일은 아니겠네요.”
“다만 우리 쪽을 보는 시선이 안 좋습니다.”
“상관없어요. 이미 결과는 차고도 넘치니까.”
“하긴…….”
조성돈 팀장도 순순히 수긍하고 말았다. 애초에 배터리 마케팅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선 굳이 홍보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과열되어서 문제였다.
이쪽저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니까.
특히 LC 화학의 반응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LC 화학 쪽은 소송 이야기까지 내밀면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최민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좀 더 두고 보세요. 베일런스까지 낀 마당에 서둘러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왕이면 이해 당사자를 다 불러들여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죠.”
“…배터리 수익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에요.”
“…설마 우성 건설 도산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굳이 자세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그건 조 팀장님이 한번 고민을 해보세요. 이왕이면 위기 상황 플랜도 좋고요. 지금은 당장 눈앞에 놓인 우성 건설 이야기나 합시다.”
조성돈 팀장은 순순히 수긍했다. 최민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무리수를 둘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리튬폴리머 특허까지 손에 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성 건설 문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비서실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되겠어요?”
“내일 저녁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 * *
기획실은 갑자기 떨어진 우성 건설 문제 때문에 난리가 났다.
하던 일을 일단 중단하고 이 일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비서실 이야기를 토대로 한 조사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비서실도 제대로 된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그 부분을 잘 찾아낸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 신중한 최민혁 실장의 판단에 혀를 내둘렀고, 우성 건설과 관련해서 정리한 보고서를 들고 다시 최민혁 실장을 찾았다.
“…당장 큰 문제는 회사채 만기상환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민혁 자신이 아는 인생 1회 차에서는 우성 건설은 자금 조달 한계 때문에 결국 부도가 난다. 회사채 만기 상환 150억을 제대로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서히 시작되는 걸까?’
그는 누구보다 우성 건설의 부도가 단순한 부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이 이야기는 이제 너무 많이 해서 좀 질리는 감도 있다.
“이제 와서 불이 났다고 난리가 났나 보군요.”
심드렁한 최민혁의 태도에도 조성돈 팀장 역시 평소와는 달리 긴장한 눈으로 계속 보고했다.
“정부가 하청업체 피해를 막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고 하지만 상황이 생각한 것보다는 더 좋지 않습니다. 금융사가 작년 건설업체 연쇄 도산 때문에 몸을 사리기 때문입니다.”
“역시 주택 업체 장기 침체와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이겠죠?”
“네, 특히 미분양 사태만으로 최소한 7천억 이상의 자금이 땅에 묶였습니다. 상업 용지나 사업용 부지 규모가 큽니다.”
우성 건설은 특히 90년대 들어와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그들은 KM 건설이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는 걸 보면서 비웃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우성 건설 탓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한국 대기업 역시 은행에서 마구잡이로 빌려서 사업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삼민 기업, 용마 개발, 정우종합건설을 편입했다.
심지어 부실 콘도, 해외 콘도와 같은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여기에 대규모 아파트 공사까지 더했으니.
최민혁은 혀를 찼다.
“참 돈도 많네요. 그거 다 은행 돈이겠죠? 자금 경색이 안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하군요. 진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성돈 팀장은 신기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 역시 이 사태를 꾸준하게 제기한 최민혁 실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 당시만 해도 최민혁 실장을 의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X 리포트에는 관련 사안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성 건설 부도도 있었으니까.’
다만 다른 일들이 워낙에 커서 우성 건설 부도는 가볍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최민혁은 마치 건넛집에 난 불구경을 구경하는 시민처럼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눈치를 보던 조성돈 팀장이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말했다.
“그런데 회장님이 아무래도 우성 건설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옛날이야기처럼 듣던 최민혁은 그제야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 확정 난 것은 아닙니다. 사전 조사 차원입니다. 다만 회장님이 우성 건설 채권 은행을 계속 만난 것 같습니다. 물론 협상은 잘되지 않는다는 소리가 있습니다만…….”
최민혁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그도 최용욱 회장이 바보가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부실 채권이 1조가 넘는데, 협상이 잘될 리가 없겠지요. 그 문제 때문에 어떻게 이익을 보려고 은행 쪽과 만나나 보군요.”
“솔직히 전 회장님을 이해하면서도 이번 일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큰아버지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서요? 그러면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잘 생각을 해보세요. 최문경 부회장 쪽에는 이미 손을 썼죠. 우리 둘째 최훈열 전무 역시 KM 전자 쪽을 넘기다시피 했으니까요.”
조성돈 팀장은 흠칫 놀랐다. 그는 ‘KM 전자 쪽은 최 실장님이 다 챙겼지 않냐’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최민혁이 피식 웃었다.
“저야 싸움에서 이겨서 먹은 거죠. 원칙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셋째 큰아버지 주장이 마냥 억지는 아닐 겁니다.”
“…그래서 회장님이 직접 나섰다는 말씀이시군요. 다만 회장님도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무리하지 않았고요.”
“그렇죠.”
하지만 말을 하는 최민혁 실장의 내심은 좀 달랐다. 그가 이제까지 최용욱 회장에게 무진장 잔소리를 했기에 그나마 최용욱 회장이 지금에 와서는 욕망을 자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이런 정보를 흘렸다는 것은 자신을 이용해서 최동영 상무를 견제하려는 꼼수가 분명했다.
즉 상황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최용욱 회장이 자기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조성돈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실장님이 이번 일에는 나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최민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최용욱 회장의 욕심은 인생 1회 차에서도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비록 KM 그룹이 구조조정을 통해서 깨끗하게 정리되기는 했지만 그 욕심까지 버리지는 못했겠지. 지금이라면 명분도 나쁘지 않지. 최동영 상무의 요청도 있어. 우성 건설을 인수해서 건설 업체 덩치를 키우기 좋으니까.’
특히 미분양 아파트는 정부에서도 그냥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충격을 막아야 했다. 우성 건설이 무리하게 사업을 벌여왔던 부동산 역시 투자로만 보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최민혁이 의아해하는 건 우성 건설을 인수하려면 자금이 꽤 필요할 거라는 점이다.
“…설마 할아버지가 보유한 비자금이 아직도 5천억이 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