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
“아무래도 그쪽과 연결 고리가 있다면 쉽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특히 차세대 배터리 분야는 미국 정부에서도 지켜보는 사업입니다.”
“미국이라…….”
“물론 지금 미국 업체와 협상하면,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제가 임기석 부장과 이야기해 본 바로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단순히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그쪽에도 어느 정도 손을 잡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게 영업에도 도움이 되겠습니까?”
김부영 영업 팀장은 펄쩍 뛰었다.
“말도 마십시오. 절대적인 도움이 됩니다. 배터리 업체를 통해서 미국 정부 쪽에도 선을 넣을 수 있습니다. 저희 영업 팀에서 그런 점을 부각시킨다면 어지간한 일에는 거의 다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실 미국 정부가 신경을 쓸 정도로 배터리 산업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다만 이 산업이 일본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무시하기 힘든 일이다.
미국 정부가 굳이 한미 협상에서 배터리 산업을 끼워 넣는 이유다.
그런데 만약 최민혁 실장이 이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일본 업체하고만 손을 잡는다면, 미국 정부가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미국 정부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뒤통수를 치는 것이니까.
미국이 지금 조용한 것은 내막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설마 최민혁이 배터리 쪽에까지 마수를 뻗칠지는 생각도 못 했다.
아니, 미국 쪽에 특허를 출원했다면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 거기까지 상황이 가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미국 정부에서 배터리 특허의 의미를 알게 될 테지만 말이다.
최민혁은 복잡한 역학 관계를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뭐, 딱히 내가 그린 목표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니. 큰 문제는 아니야. 이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겠어.’
“알겠어요. 뭐, 영업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기업 몇 개를 더 합류시키는 게 어렵겠습니까. 다만 그만한 것을 얻기 바랍니다. 전 호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부영 영업 팀장은 곧바로 기획실을 나섰다. 다만 그도 힐끗 최민혁 실장을 쳐다본 후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가끔은 최민혁 실장님이 20대가 아니라, 50대 정도 관록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 * *
최민혁 실장은 김부영 영업 팀장의 보고를 통해서 일본과 미국 시장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때문에 다시 김상우 본부장과의 만남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당장 KM 전자와 일본 업체 간의 교량 역할로 김상우 본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상우 본부장은 이번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최민혁 실장, KM 전자, 미래 기술을 다시 한번 철저하게 조사한바, 최민혁 실장을 더 조심하게 됐다. 그는 다른 재벌가와는 달리 밑바닥에서부터 실무 경험을 꽤 쌓았기 때문에 업체에 도는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았다.
이미 언론에서 최민혁 실장 어천가를 부르기는 한다.
그런데 이건 피상적이었다.
실무진이 느끼는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은 격이 많이 달랐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김상우 본부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나댈 수는 없었다.
“혹시 최 실장님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지 들을 수 없겠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지난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최문경 부회장’이 긁어서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흠칫했다.
일본 업체 이야기를 하려면 그 이야기도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딱히 그런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키울 생각도 없었고요. 제가 원한 것은 리튬이온배터리였는데, 원하는 사양의 배터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김상우 본부장도 순순히 수긍했다.
“하긴 차세대 배터리를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셈입니다. 당장 리튬폴리머만 해도 저온에 취약하니까요.”
리튬폴리머의 그런 취약성 때문에 핸드폰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리튬이온배터리는 핸드폰에 오히려 적합한 셈이었다.
다만 이걸 확정 짓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화된 시제품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은 누구도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살벌하게 싸우는 것이다.
최민혁은 새삼 그런 내막을 어느 정도 알자 헛웃음을 지었으면서 툴툴거렸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된 겁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다고.
지금 KM 전자의 배터리 특허 때문에 새방 전지는 발칵 뒤집혔다.
절대로 그냥 어쩌다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상우 본부장은 솔직히 내심 황당했지만 차마 마음속의 말을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 일본 업체 쪽에서도 큰 관심을 둔다고 들었습니다.”
최민혁은 차마 최문경 부회장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김상우 본부장은 협상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최민혁 실장이 술수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더욱 말을 조심했다.
그래서 이번엔 슬쩍 메드 드로닉 소송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메드 드로닉 소송을 보고서야 부랴부랴 조사해서 안 일입니다.”
“아, 그래요?”
그놈의 메드 드로닉.
여전히 계속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마케팅 한번 확실했어.’
최민혁도 민망한 일은 배제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말하기 좋겠네요. 미래 기술을 인수한 것은 사실이고, 이를 통해서 배터리 생산을 하려는 것도 진실입니다. 다만 여기까지만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의 배터리 생산은 다른 문제라서요.”
“…네.”
김상우 본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최민혁의 내심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최민혁도 따로 정해둔 바가 아직 없었다.
배터리 생산이 수백만 개를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전문 영역이었다. 그건 미래 기술이 단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른 배터리 업체 인수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실제로 그런 플랜도 있었다.
최민혁이 사실 고민하는 문제였다. IMF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는데, 그 재앙 앞에서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도 그랬다.
최단기간에 최대한 이익을 볼 방법이 필요했다.
‘골치 아프네.’
일본 업체와 손을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기는 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새방 전지 같은 국내 업체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미국 정부가 미는 배터리 업체 역시 재앙을 피해 가기는 어려웠다.
‘이건 별로 안 좋아.’
당장 현실 매출이 아니라 차세대 배터리 시장의 경쟁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막을 알 길이 없는 김상우 본부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말하자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집안 사정까진 말할 수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복잡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리튬이온배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미래 기술로는 불안해요. 이들을 도와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혹시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원하시는 겁니까?”
“투자라… 그렇죠.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최민혁은 문득 새방 전지만이 아니라 일본 업체와도 같이 타협할 방법을 떠올렸다.
차세대리튬이온 배터리는 물건만 있다면, 팔 곳은 많았다.
그걸 미래 기술, 새방 전지 혼자 다 할 수는 없었다.
‘국내 배터리 업체, 일본 업체, 아, 미국 업체까지 모두 다 끌어들이면 어떨까?’
그러면 문제가 될 것은 역시 글로벌시장 파이 이슈 부분이다.
최민혁은 그런 문제에 앞서서 한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혹시 미래 기술 지분을 사들일 생각이 있습니까?”
“네? 아, 미래 기술, 네, 있습니다. 다만 배터리 특허 권리까지 포함해서입니다.”
“물론 그래야겠죠.”
최민혁은 방법을 곧 떠올렸다. 방법은 간단했다. KM 전자가 가진 배터리 특허를 미래 기술에 매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제값을 받아야겠지. 안 그러면 횡령으로 걸고넘어질 테니까. 결국, 돈 문제일까?’
김상우 본부장은 생각 밖의 제안에 크게 고민했다. 그 역시 이미 KM 전자가 출원한 배터리 기술을 다 확인했기 때문이다.
배터리 원천기술과 미래 기술을 합친 지분 가치였다.
지분 가격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하면 미래 기술 지분 1% 기준으로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그건 새방 전지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아니면 시제품이 나온 후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으음.”
최민혁은 상대가 벌써 내적 갈등을 거듭하자 기준점을 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아, 참고로 협상해 온 일본 업체는 마츠시타, 소니, 산요 같은 기업들입니다. 이들이 직접 저를 찾아와서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아, 네.”
김상우 본부장은 이미 알고 있던 기업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직접 쟁쟁한 일본 기업들의 이름을 듣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번 협상에 끼지 못하면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을 접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최민혁은 갑자기 얼어버린 김상우 본부장을 다시 다독거렸다.
“그러면 좀 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 네. 내부적으로 검토한 후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네.”
* * *
최민혁 실장은 김상우 본부장과 협상을 끝낸 후에 고민에 빠졌다. 그는 호구처럼 새방 전지에 몰아줄 생각도 없고, 헐값에 배터리 특허를 매각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었다.
‘정 안 되면 다른 업체에 팔면 되니까.’
다만 지금 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그는 결국 다시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마츠타 고지 박사에게도 한번 제안을 해보세요. 그쪽 반응도 궁금하니까.”
“…하면 일본 업체에 지분을 매각하실 생각입니까?”
최민혁도 이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미래 기술과 새방 전지를 앞세우면 된다.
그런데 IMF가 문제였다.
서서히 국내 내수 경기가 경직되기 시작할 것이고, 배터리 수요도 줄어든다.
결국 수출 시장을 뚫어야 하는데, 지금부터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았다.
“사실 그게 좀 고민입니다. 개인적으로야 지분을 팔기도 좀 그런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만 잘 먹고 잘 사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차라리 일본 업체와 적절하게 협상하는 것이 일본 시장을 파고들기에 더 좋습니다.”
“만약 그게 된다면 미국이나 유럽 시장 공략도 더 쉽다는 말씀이군요.”
“가장 큰 장점은 기간입니다. 미래 기술 시제품을 일본 업체, 새방 전지와 같이 들여다보면, 양산에 들어가는 시기가 더 빨라질 겁니다.”
“…판매량도 급증하겠군요.”
단순히 급증 정도일까.
조성돈 팀장은 도저히 그 생산량을 추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한국, 일본, 미국 배터리 업체가 동시에 생산하는 물량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 업체에서 배터리 로열티 지분을 받게 된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가 될까?’
하지만 최민혁은 돈에 무감각했다.
“우리가 배터리 시장 전체를 상대로 영업할 필요는 없죠. 그렇게 할 이유도 없고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일본 업체 반응은 정말 궁금하네. 그들은 어떤 제안을 해올까?’
아니나 다를까 최민혁 실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
“다만 일본 업체든, 한국 업체든 지분을 헐값에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철저하게 제값을 받을 것이니, 그런 문제는 사전에 기획 팀에서 검토하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미국 베일런스 측에도 정보를 흘리세요.”
“…미국 쪽에도 말입니까?”
“아,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죠. 샐로먼 브러더스 코리아 측이면 딱 좋군요. 그쪽이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