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
김희수 회장의 말은 억지에 가까웠다. 사실 그는 최용욱 회장을 떠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최용욱 회장은 이 일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니, 이 친구야, 우리 KM 그룹은 반도체가 그 중심이야. KM 전자는 전자 회사야. 그런데 뜬금없는 배터리 이야기를 하면 내가 어떻게 이해를 하나?”
“…그러면 몰랐다는 말입니까?”
“아니, 알지. 배터리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리를 들었어. 다만 그 배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필요해서 확인했을 뿐이야. 특히 IP 시티폰 단말기에도 그 배터리를 적용할 생각이니까.”
“…그러면 수출과 같은 방향은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그건 무리지. 아, 어쩌면 그래서 자네 측과 손을 잡으려고 했을 수도 있어. 불필요한 수요는 다른 업체를 통해서 생산하면 되니까.”
“정말 그게 다입니까? 혹시 배터리 산업 쪽에 본격적으로 투자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까?”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마!!”
“하지만 에플, 퀄컴, ARN 지분까지 인수한 마당 아닙니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최용욱 회장은 그만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리쳤다.
“그거 다 전자 회사잖아!!”
“아, 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고기 먹다가 죽어. 좀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김희수 회장은 그제야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배터리 산업 쪽으로 손을 넓혀서 새방 전지를 적대적 인수합병 하려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 의심했다.
사실 최민혁도 여태 정 안 되면 이런 수단을 취했으니,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도 설마 민혁이 이놈이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가 민혁이 그놈에게 알아볼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지금 연락해 보시면 안 됩니까?”
“쯧, 그 친구도 참.”
최용욱 회장은 새삼 손자 최민혁의 영향력이 달라졌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
새방 그룹 김희수 회장조차 최민혁을 부담스러워하니까.
그는 곧바로 최민혁에게 전화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민혁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배터리 산업까지 영역을 넓힌다고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답이 되었나?”
“…죄송합니다.”
“TRS 일은 미안해.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솔직히 민혁이 그놈이 제안하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김희수 회장은 깜짝 놀랐다.
“설마 TRS 사업을 매각한 것도 민혁이의 제안에 따른 겁니까?”
“어, 솔직히 지금이라도 자네에게 TRS 사업은 정리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민혁이 그놈 안목이 보통은 아니니까. 아, 이제는 이런 말도 필요없겠어. 자네도 이제는 알 테니까.”
“…조언 고맙습니다.”
김희수 회장은 최용욱 회장의 저택을 떠나면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검토를 해봐야겠어.’
* * *
[당장 KM 전자와 손을 잡아!]
김희수 회장의 갑작스러운 지시는 놀라운 것이었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김희수 회장이 이렇게 빠르게 결정을 내린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는 차세대 배터리 전쟁터에서 새방 전지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물론 최민혁은 이 문제를 이렇게 심각하게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로서는 설마 최민혁이 배터리 쪽으로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돌릴 목적이라는 것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김의준 사장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번 일은 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어.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경영권 경쟁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될 거야. 그럼 네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거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상우 본부장은 필사적으로 다짐했다.
‘이번이 내 인생에 있어 마지막 기회야.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 * *
새방 그룹 역시 다른 한국 대기업처럼 그룹 규모를 키우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새방 그룹이 갑자기 계열사 매각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당장 결정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계열사 매각은 적어도 1년을 두고 이루어지는 일이니까.
하지만 기존 한국 기업들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최민혁조차 이런 새방 그룹의 행보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가 아는 인생 1회 차 기억과는 다른 새방 그룹의 행보였기 때문이다.
‘애들은 또 왜 이래?’
그에게 배터리 산업은 딱히 선택과 집중을 하기 위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최상의 배터리를 수급받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셈이었다.
그러니 차세대 배터리를 둘러싼 경쟁이 어떤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최민혁은 새방 전지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서야 현실을 알았다.
‘흠, 이건 예상 밖인데…….’
“…새방 그룹이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거죠?”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그는 최민혁이 어떤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새방 그룹이 그룹 차원에서 움직인 것은 전부 새방 전지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미래 기술 지분을 얻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 저러는 것일 겁니다.”
“미래 기술 지분 인수에 그렇게까지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만약 일본 업체, 새방 전지가 이번 컨소시엄에 함께 참여한다면 경쟁이 생각보다는 치열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조성돈 팀장이 기획 팀을 통해서 만든 2~3년간의 배터리 시장 현황 보고서를 내밀었다.
“니켈수소전지 시장에서는 마쓰시타, 산요, 도시바가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리튬이온전지 시장은 마쓰시타, 산요, 소니, 그리고 A&T 배터리가 시장을 나눠 먹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소니였다.
한때는 무려 95%를 독점했었는데, 지금은 시장점유율이 고작 30%에 불과했다.
“사실 소니의 몰락은 현실에 안주한 것이 큽니다. 마쓰시타가 저렇게 절박하게 나서는 것도 이번 기회에 소니를 완전히 밟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업체 분위기는 어때요?”
“기타에 포함된 이들인데, TDK, 듀라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배터리 시장 탈환을 위해서 절치부심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래 배터리 시장 선점을 위한 업체들의 노력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특히 소니는 다시 50% 이상 시장점유율을 복구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다른 일본 업체와 미국 업체가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이유다.
“베일런스가 굳이 하일 시멘트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일 겁니다.”
“…….”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 자신이 한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지금 배터리라는 거대한 산자락에 기름을 뿌려서 불을 지른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배터리 산 안에 사는 동물들이 미친 듯이 날뛴 것이었다.
그것도 안전지대까지 만들어서 탈출한 동물들을 불러들였다.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민혁도 억울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끌고, 문제가 될 배터리 쪽을 사전에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임기석 부장에게서 현재 진행되는 리튬폴리머 특허에 대한 것을 보고받았습니다. 솔직히 상당히 놀랐습니다. 일단 특허 팀의 능력에 경탄했습니다.”
최민혁은 이번에는 자신이 시켜서가 아니라 특허 팀이 주도적으로 리튬폴리머 특허를 내놓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특허 팀 능력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이미 임기석 부장에게 푸념을 들은 조성돈 팀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일축했다.
“그게 맞으니, 그 부분은 더 언급하지 마세요.”
“…중요한 점은 폴리머 특허까지 구비된 마당이니,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만약 이 정보를 안다면, 당장 일본 업체만이 아니라 미국 쪽에서도 끼어들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베일런스는 이미 하일 시멘트 쪽과 공동 투자 협상을 끝낸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어? 그래요?”
“그들이 이 정보를 아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긴 걔들도 정보망이 있겠군요.”
“지금 새방 그룹이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LC 화학을 비롯한 대기업 계열사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슬쩍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조성돈 팀장도 할 말은 정말 많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최민혁은 골치가 아파서 조성돈 팀장에게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이번 방식에 꽤 만족했다. 비록 기획 팀을 거치는 바람에 중간에 이런저런 다양한 의견을 검토하느라 시간이 더 걸린 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양성이 늘어났어. 차라리 잘된 것일 수도 있어. 일본 애들과 일방적으로 손을 잡아봐야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 내수 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장 콜린스 일본 판매가 그러했다.
일본 시장의 폐쇄성은 미국 시장보다 더 심각했다.
시간을 두고 콜린스 영업을 계속했지만, 그에 비해 성과는 썩 좋지가 않았다.
“영업 팀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쪽도 말이 많습니다. 특허 팀에서 나선 덕분에 일이 너무 복잡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김부영 팀장님을 불러보세요.”
“알겠습니다.”
* * *
사실 KM 전자의 영업력이 오성 전자의 반의반만 되었어도 콜린스 매출은 지금보다 4~5배 이상 늘어났을 것이다.
오성 전자가 콜린스 사업부 인수를 위해서 바짝 엎드린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았다.
당장 대형 IPS-LCD가 시장에 나오기까지는 몇 년이 더 필요했다.
그 틈새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역시나 콜린스 같은 제품이다.
아니, 설사 대형 IPS-LCD가 나온다고 해도 콜린스가 당장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콜린스는 그 나름의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부영 영업 팀장은 이런 부분 때문에 최민혁 실장을 지지했다.
“솔직히 전 실장님이 굳이 글로벌 판매에 서두르지 않은 점에 공감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느려도 리스크는 줄어드니까요.”
일본 내수시장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내수시장과는 많이 다르다.
당장 일본 소니 TV가 문제다.
일본인 입장에서 AS가 쉬운 소니 TV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KM 전자는 일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메드 드로닉 소송이 의외로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설마 일본에서도 그 뉴스를 조명한 겁니까?”
“당장 메드 드로닉의 심장 세동 제거기 리콜이 시작되었습니다.”
메드 드로닉은 일본에서 심장 세동 제거기 리콜만이 아니라 같은 형태를 사용한 의료기기 역시 리콜이 전격 실시했다.
“…한국은 아직이죠?”
“네, 그만큼 메드 드로닉이 한국을 우습게 안다는 뜻일 겁니다. 중요한 점은 그 일 때문인지 일본이 우리 KM 전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메드 드로닉 리콜 사태는 현재 일본 언론에서도 앞다투어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KM 전자의 최준형 과장에 대한 것도 빠지지 않았다.
최준형 과장은 공익이라는 측면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시장 공략을 위해서 좀 더 신경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미국 시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안 그래도 차세대 배터리가 그 일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부른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