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
공채덕 과장은 영문을 몰라서 다시 보고안을 꼼꼼하게 살폈다.
현재의 아이디어와 미래의 결과만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획안은 확실히 최민혁이 실장이 이전에 준 특허 형태와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이거, 왠지 익숙한데요?”
“익숙하지. 우리가 정리해서 올린 특허로 만든 것이니까.”
“……?!”
그제야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보고한 내용은 이렇게 구체적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좀 달랐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만든 아이디어는 특허 요건에 맞지 않아서 출원해도 거절될 확률이 아주 높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받은 아이디어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꽤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허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 성능을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게 참 절묘했다.
외부인이 봤을 때는 도저히 구분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야 이 특허 아이디어를 만들었던 사람이기에 그나마 구분할 수 있었다.
임기석 부장이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그는 손뼉을 치면서 팀 분위기를 환기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진짜였다.
“일단 각자 역할 분담을 했으니. 필요한 부분을 메꾸는 것으로 시작해. 추가할 부분은 대학 연구소 쪽과 접촉하면 될 거야.”
“그건 압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우리가 보고한 것에서 나온 게 맞습니까?”
“…최 실장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비슷하기는 한데, 아무리 봐도 전혀 다른 것 같아서요.”
임기석 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는 문득 저게 자신이 늘 최민혁 실장에게 하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말을 거꾸로 자신이 듣고 있었다.
“그게 중요해?”
“아, 아닙니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거야. 중요한 건 일의 진척이잖아!”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특허가 다른 회사 특허와 중복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보다는 그게 낫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공채덕 과장이 조용히 내놓은 것은 베일런스, 벨코어사의 특허였다.
“저도 지난주에 파악했는데, 이들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리튬폴리머 쪽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성과는?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 중에 확실한 것이 있어?”
“에, 그건 아닙니다만.”
“공 과장, 자네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냐. 미국 정부에서 밀어주는 일이니,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 수가 있지. 원천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앞서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직 그들이 실제로 내놓은 성과는 없어. 그저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퍼부어서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목적이잖아. 그런데 우리는 달라. 당장 여기 결과물이 있잖아!”
“…네.”
그제야 다들 입맛을 다시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했단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고서를 아무리 살펴봐도 일은 자신들이 한 게 분명한데, 그 결과물은 당최 자신들이 한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알겠지만, 이 특허는 기본 리튬 이온 배터리를 보완하는 성격이 강해. 폭발이나 안정성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것이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죠? 잘 알겠습니다.”
“그래, 아주 중요해. 미국 정부조차 차세대 배터리 산업을 위해서 밀어주고 있으니까. 괜히 외부에 소문이 퍼지면 문제가 될 수도 있어. 물론 일본 업체의 귀에 들어가서도 곤란해.”
“…알겠습니다.”
다들 혀를 내둘렀다. 자신들이 내놓은 성과물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다들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시 특허 문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내가 한 것 맞아?’
임기석 부장은 그런 팀 분위기를 무시했다.
“좋아. 의문은 많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지금 새방 전지 측이나 일본 업체와 협상 중이라는 것을 알잖아? 우리가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기 위해서는 이 특허 출원을 서둘러야 해!”
“…네.”
공채덕 과장을 비롯한 특허 팀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지시를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한 일이 맞는지 스스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새방 전지나 일본 업체들이 알면 난리가 나겠어.’
* * *
새방 전지 김의준 사장은 아들 김상우 본부장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일을 그냥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일단 어떤 형태로든지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다른 기업에서 나설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기업이라…….”
김상우 본부장은 박 터지는 배터리 산업 전쟁을 차분하게 언급했다.
“미국 정부도 배터리 기술을 국가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 때문에 또다시 배터리 산업이 전자 산업처럼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러브 콜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들이 원천기술을 고안하고, 생산 자체는 한국에 넘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게 베이스인 터라 원천기술에 대한 투자 열기는 생각보다 뜨거웠다.
단순히 그냥 말로만 진행되는 일도 아니었다.
김상우 본부장은 이번 건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사실도 알아냈다.
“하일 시멘트가 이번에 베일런스 측과 투자 협상을 진행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일 시멘트가? 정말이야?”
“네, 그쪽에서 검토 중인 분야가 리튬폴리머 쪽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온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리튬 이온 배터리의 안정성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건 정말 놀랄 일이군.”
“이 협상도 미국 베일런스 측에서 먼저 이야기되어서 진행되는 것으로 압니다. 아무래도 베일런스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한국 자본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물밑 협상 중이고? 아니,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리튬폴리머 관련 원천기술을 보고 투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베일런스가 리튬폴리머 분야에서는 가장 선두에 있었다. 다만 이게 꼭 베일런스가 리튬폴리머 특허를 고안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KM 전자의 배터리 기술이 나온 시점도 딱 이랬다. 새방 전지 입장에서는 글로벌 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KM 전자의 원천기술이 무조건 필요했다.
“하지만 리튬이온배터리의 안정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어.”
“그걸 최민혁 실장이 모르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행적을 잘 보면, 철저하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밀어붙였습니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여기에 대한 보험까지 이미 준비했을 겁니다.”
“확신해?”
“이번이야말로 우리 새방 전지가 도약할 기회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KM 전자와 손을 잡는 것이 최선입니다. 필요하다면 무리수를 두더라도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적자 계열사를 매각하는 것도 한 방편입니다. 매각 자금으로 차세대 배터리에 투자하는 것이 최상의 수입니다!”
“흠.”
김의준 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들이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니까. 그가 곧 떠올린 것은 한동안 말이 많았던 X 리포트. 그 역시 X 리포트에 대한 정보는 안다. 이미 그룹 차원에서 열심히 살펴보는 문건이다.
이를 두고 새방 그룹 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새방 그룹도 한 가지 문제만큼은 선을 그었다.
이전처럼 무리하게 은행에 대출을 내서 계열사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아니, 가능성이 없는 계열사는 이미 정리 중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KM 그룹처럼 흑자 계열사까지 마구잡이로 정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면서 좀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 기회는 확실히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일단 KM 전자의 배터리 원천기술에 한 발 담그기만 한다면 손해를 볼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일 시멘트가 생각 없이 일을 밀어붙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만큼 확신이 있었겠지.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곤란해.’
“하지만 우리 기업은 축전지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야. 차세대 배터리로 리튬이온배터리를 선정하기는 했지만 당황스럽긴 해.”
축전지와 리튬이온배터리는 비슷하기는 해도 전혀 다른 분야였다.
새방 전지는 이제 겨우 세계 시장에서 이름을 알리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리튬이온배터리 쪽으로 투자했을 때의 리스크를 감안해야 했다.
리튬폴리머 쪽은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상우 본부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성과를 하나둘씩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했다.
특히 일본 배터리 업체가 공격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
“이미 차세대 배터리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본에 붙는다면 미국 정부의 압박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KM 전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중재를 할 겁니다. 최민혁 실장은 미국 쪽에 인맥이 있으니,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겁니다.”
김의준 사장도 솔직히 KM 전자와 협상해야 하나 싶었지만, 김상우 본부장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이사회에 이 안건을 올렸다.
‘괜한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닐까?’
* * *
새방 그룹 매출은 운임 인상 건 때문에 큰 폭의 이익 증가를 기대했다.
작년 대비 매출액은 무려 18%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 때문에 새방 그룹은 새로운 차세대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TRS 사업이었다.
김희수 회장은 이 새로운 통신 사업에 꽤 공을 기울였다.
그는 심지어 최용욱 회장과 자주 만나서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갑자기 TRS 사업을 정리해 버렸다.
김희수 회장은 당시 최용욱 회장이 몇 번이나 찾아가서 생각을 바꾸라는 조언을 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전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반대로 제안했다.
[김 회장, 자네도 TRS 사업은 정리하는 것이 좋아.]
“……?”
실로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TRS 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독자적으로 사업을 이끌 생각은 없었다. 다른 기업과 손을 잡으면 되니까.
다만 그도 이때쯤엔 과연 TRS 시장이 예측한 대로 흘러갈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아들이 이번에는 배터리 사업과 관련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것이었다.
이사회를 거쳐서 사장단 회의에까지 이 안건이 올라왔다.
김희수 회장은 밑의 임직원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는 안 그래도 최용욱 회장에게 할 말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직접 찾아갔다.
“최 회장님, 도대체 배터리 사업은 또 뭡니까?”
최용욱 회장은 다짜고짜 찾아온 김희수 회장의 태도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는가?”
“그것 때문에 지금 새방 전지가 난리입니다.”
김희수 회장은 자신이 지금까지 파악한 이야기를 과장해서 말했다.
그는 지난 TRS 사건 때문에 일부러 과장해서 목소리를 올린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처음에는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KM 전자가 고안한 배터리 기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역시 배터리 산업 쪽은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밑에서 보고를 올려도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저 결과만 이용하면 되니까.
즉 차세대 배터리를 공급받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 배터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까지 알 필요는 없었다.
아니, 사실 아직은 그 누구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당장 일본도 이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하기 시작한 마당이고, 미국은 이 배터리 기술을 따라잡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최민혁이 내놓은 배터리 기술에는 함정도 꽤 많았다.
리튬폴리머 기술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이 빠져 있는 것도 그 하나였다.
“이봐, 김 회장, 흥분 좀 가라앉히고 좀 알아듣게 말해 봐.”
“아니, 지금 절 놀리려고 하는 겁니까? TRS도 뒤통수를 치시더니, 이번에는 배터리를 가지고 우리 새방 전지를 뒤집어엎으려는 겁니까?”
“아니, 이 친구야, 그쪽 새방 전지와 KM 전자는 협상이 진행된다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