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
이런 업체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시작이 안 좋았던 LC 화학과 비교하면 분명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예상 밖의 기획 팀 조사 결과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일에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이영란 대리는 새방 전지의 강점에 대해서 말했다.
“창원 공장은 현재 3만 평 규모로 주로 자동차 축전지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축전지 생산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 최고입니다.”
물론 다른 전지 분야는 자동차 축전지와는 좀 달랐다.
때문에 당장 리튬이온전지를 차세대 전지로 정해서 막대한 투자를 진행 중이었다.
실제로 새방 전지가 작년에 출원한 리튬이온전지 관련 특허는 모두 500건이 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특허가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것은 아니란 겁니다.”
하지만 원천기술은 부족해도 체급과 규모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었다.
이영란 대리는 고민에 빠진 조성돈 팀장에게 말했다.
“물론 일본 업체와 협상하는 것이 큰 강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배터리 업체와 손을 잡으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곧 마케팅 팀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성돈 팀장은 이영란 대리 말이 맞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대리 말이 맞아.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데 주로 수입업체 쪽을 담당한 이 대리가 이런 주장을 할지는 몰랐네.”
이영란 대리가 주로 맡은 일은 일본 세탁기, 일본 냉장고를 수입하는 쪽이었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일본 업체와 손을 잡아서 KM 전자의 매출을 키우는 쪽을 맡았었다.
추가적으로는 국내 콜린스 대리점을 관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업체와의 협업이 그녀의 주전공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잘 압니다. 과거, 일본 업체 물건 판매를 전담하면서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로 친일 계열이라는 비판이 국내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이 바로 이영란 대리였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었기에 내심 내키지 않아도 겉으로는 별달리 내색하지는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잖아?”
“그때는 그랬습니다. 당시 우리 KM 전자는 외형적인 규모가 늘지 않았으니까요.”
작년만 해도 KM 전자는 오디오, TV가 주축이었다. 더욱이 그 시장도 협소했다. 매출 증가가 되지 않으니,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굳이 일본 전자 업체의 물건을 받아서 같이 판 이유다.
이영란 대리는 여태까지 회사의 내막을 잘 알기에 별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메드 드로닉 사태가 대표적이다.
마케팅 팀 최준형 과장은 직접 미국에까지 가서 소송에 끼어들었다.
자신도 굳이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현재는 KM 전자가 갑이다. 특히 배터리 분야에서는 KM 전자가 초갑이다.
“이제 굳이 일본 전자 업체의 도움을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콜린스의 일본 내수시장 공략도 성공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일본 업체에 저자세일 필요도 없고, 괜히 그쪽 도움을 받아서 친일 기업이라는 욕을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지.”
조성돈 팀장은 이제까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이영란 대리의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골치가 아팠다. 맞는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건 다른 기획 팀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늘 조직에서 티를 내지 않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혹시 다른 의견은 없어?”
“…….”
다들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새방 전지가 LC 화학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이번에 문제의 소지가 농후한 일본 업체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만 일본 업체가 가지고 있는 원천특허가 문제야. 그걸 무시하지는 못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순순히 일본 업체와 협상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최문경 부회장을 배신한 것처럼 이번에도 뒤통수를 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알겠어. 혹시 모르니, 사전에 새방 전지 쪽에도 한번 연락을 해봐. 몇 가지 가능한 플랜도 작성해서 움직여서 일정에 지장이 없도록 해.”
“네!”
이영란 대리는 쾌재를 부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뜻밖의 상황에 자신이 공적을 세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임웅 대리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대리님, 진짜 괜찮아요?”
양손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한 이영란 대리는 기뻐 소리쳤다.
“임 대리님, 저 정말 기분 좋아요.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어요. 이번에 마케팅 팀이 하는 것을 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늘 조용히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좋지만은 않다고 말이에요. 만약 일본 업체만 끼워 넣은 것을 언론이 알면 그것만 물고 늘어져서 마녀사냥을 할 거예요. 그건 우리 회사에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요.”
“아, 그렇죠.”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기획 팀 역시 순순히 수긍하고 말았다.
‘게다가 일본 애들은 믿을 수가 없지.’
* * *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일본 업체의 행동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풋내기처럼 일본 업체를 상대로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불만이 있어도 오히려 인내를 가진 채 지켜봤다.
그런 중에 KM 전자 기획 팀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했다.
‘새방 전지와 접촉한다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답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KM 전자가 일본 업체와 손을 잡고 배터리 산업에 뛰어든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라든지.
매국노라든지.
자신이 선동할 수 있는 주제는 많았다.
‘솔직히 아쉽네.’
권재홍 비서실장은 정말 좋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것도 괜찮아!’
다만 최문경 부회장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일본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그렇게 해야 해? 쪽발이 새끼들은 믿을 수가 없잖아.”
“…압니다. 저도 이런 일을 하기 싫습니다. 그래도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일본 업체와 최민혁 실장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겁니다. 비록 우리를 배신하기는 했어도 이대로 둬서는 곤란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콧방귀를 꼈다.
“한 번 배신한 놈이 또 배신하게 마련이야.”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민혁 실장에게 한 방 먹일 생각이었다.
“단순히 일본 기업을 믿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이들이 최민혁 실장을 의심하게 만드는 편이 일을 풀어가기 더 쉽습니다.”
“…그놈들이 믿을까?”
“비서실을 통해서 검토한 바로는 아직 리튬이온배터리 분야는 안정성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최민혁 실장도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때문에 추가 특허를 낼 겁니다. 미래 기술을 인수한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리튬이온배터리의 오작동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여러 가지 방식이 동원된다고 해도 근본적인 대안을 도출하기가 어렵다.
최민혁은 인생 1회 차에서 이미 이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는 이유다.
또한 대책에 대해서도 이미 낸 특허 속에 슬쩍 끼워두었다.
아니면 빼놓거나.
일본 업체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최문경 부회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어떻게 해서라도 판을 깨려고 노력하는 중에 이 정보를 얻은 것이다.
“이 안정성을 빌미를 내세운다면 일본 업체도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의 성정으로 봐서 만약 일본 업체의 배신 행위를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결국, 일본 업체는 다른 차선책을 찾게 되겠죠.”
최문경 부회장도 이번만큼은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고. 제대로 민혁이 그놈을 날려 버려야 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여전히 감정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안드로이드처럼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그제야 안도했다.
‘이제 좀 일이 제대로 풀려가네.’
* * *
권재홍 비서실장은 곧바로 마츠타 고지 박사 일행 중에 오즈 야스지로 과장을 따로 만났다. 그는 협상하는 척하면서 리튬이온배터리의 문제점을 하나씩 말해주었다.
오즈 야스지로 과장 역시 리튬이온배터리의 취약성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들이 권재홍 비서실장 뒤통수를 쳤다는 점을 내세우지 않은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물론 슬그머니 지난 일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건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마츠타 고지 박사를 굳이 만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는 넌지시 자신들이 처한 처지만 말해주고는 그냥 떠났다.
오즈 야스지로 과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이 남긴 여러 가지 지적보다는 역시 새방 전지 이야기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최민혁 실장 역시 얼마든지 자신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우려한 대로야.’
그는 결국 이 사실을 확인한 후에 이번 협상 때문에 정신이 없는 마츠타 고지 박사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만 노렸다.
* * *
마츠타 고지 박사는 한국에 체류한 채 KM 전자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일본 마츠시타 본사의 연락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본사 측에서 바로 리튬이온배터리의 안정성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리튬이온배터리는 실험 중에 발화하거나 폭발하는 현상이 종종 있는데,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소니가 이 리튬이온배터리를 상용화한 이후에 계속 나온 문제다.
리튬이 타소 표면에서 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리튬이 분리막을 뚫어버려서 양극과 쇼트가 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리튬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서 불안전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산소 기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산소가 내부 압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폭발할 수도 있었다.
마츠타 박사도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이제까지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이미 전해질 속성을 맞추어서 해결한 것으로 압니다.]
[마츠타 박사, 그걸 자네가 장담할 수가 있나?]
[그거야…….]
[소니도 아직 그것 때문에 리튬이온배터리에 적극적이지 못해.]
하지만 이들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최민혁이 내놓은 리튬이온배터리 특허 중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허가 이미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그저 불안정한 리튬이온배터리를 안정시킨다고만 적혀 있었다.
거기에 더 큰 문제는 역시 전지 내부 압력 증가였다.
이 부분은 마츠타 고지 박사도 어느 정도 답을 찾았다.
[…하지만 KM 전자가 전해질 특성을 바꾸어서 해결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일정 이상으로 온도가 상승하면 생기는 문제는 어쩔 수가 없잖아.]
이 부분은 사실 보호 회로를 통해서 과충전을 막아야 한다.
그것까지는 마츠타 고지 박사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민혁은 보험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굳이 넣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막까지 마츠시타 본사에서 알 리는 없었다.
[그러니 계속 KM 전자에 끌려다녀서는 곤란해.]
[…알겠습니다.]
마츠타 고지 박사는 마츠시타 본사의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KM 전자의 특허 분석이 진행되면서 나오는 단점을 확인하고서 본사가 태도를 바꾼 것을 알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점을 KM 전자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오즈 야스지로 과장은 고민에 빠진 마츠타 고지 박사의 눈치만 봤다. 그들은 이걸 빌미로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리튬이온배터리 특허에 문제가 있다고, 최민혁 실장 앞에서는 언급하지 마. 자칫하다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하지만 지금 KM 전자의 반응을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