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6.
그건 최준형 과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번 사태를 최대한 키우기 위해서 메드 드로닉을 압박할 명분이 필요했다.
바로 지금처럼 불량 의료기기에 대한 미진한 대응 같은 것들 말이다.
최준형 과장은 다만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의 반응에 딱히 놀라지 않았다. 이들이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환자, 특히 한국인 환자에 대해서 얼마나 보수적인지 잘 알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네.”
최주호 부장이 이 문제를 걱정했다.
“정말 괜찮겠어?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게 쉽지 않잖아.”
“이미 한영 일보가 도와주기로 했다지만 그놈들 믿을 수가 있어?”
최준형 과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기레기 쓰레기라도 이미 진행한 일입니다. 지금 와서 배신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고민은 딱 하나.
의사 업계 자체가 보수적이란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의료기기 업체 역시 다르지 않다.
하물며 그 대상이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있는 죄도 없다고 할 이들이다.
다만 최주호 부장도 걱정스러워서 한마디 했다.
“이미 배터리 관련된 협상이 일본 업체와 같이 진행 중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최주호 부장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들은 배터리 관련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원론적으로는 우리 혼자 먹는 게 좋지.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파이 자체를 키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그럴 거면 차라리 일본 배터리 업체와 특허 지분 일부를 공유하는 것이 훨씬 낫잖아.”
최주호 부장이 말하는 건 KM 전자와 일본 업체 간의 특허 협상이다.
하나의 특허 풀을 만들고, 이 특허 풀 지분을 나누는 방식이다.
특허 팀의 검토 결과에 따르면 여기서 KM 전자 지분은 대략 80% 남짓이다.
“나머지 20% 지분을 손해 보는 대신에 일본 업체와 손을 잡을 수가 있어. 여차하면 일본 공장에 외주 생산을 맡길 수도 있으니까.”
현실적인 대응이다.
이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었다.
일본 업체와 손을 잡으면 그만큼 쉽게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업체가 순순히 KM 전자와 손을 잡느냐 하는 게 문제다.
“…마츠시타가 그 제안을 받았습니까?”
“걔들은 어쩔 수가 없잖아. 우리 쪽과 손을 잡으면 기존 특허는 어떻게 할 수 없어도 중복 투자를 막을 수가 있어.”
“현실적인 문제군요.”
“이미 히타치 공작소가 당한 바 있잖아. 그러니 사전에 꼬리를 마는 거지.”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일본 업체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다니.”
최주호 부장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만큼 최 실장님의 영향력이 대단하잖아. 그러니 현실적인 이익만 챙기려고 할 수밖에 없지.”
“하긴.”
이미 KM 전자의 배터리 특허에는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대신 다른 배터리 특허 쪽으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쪽은 단기간에 덩치 자체를 키울 수가 있어. 아마 미래 기술 매출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백억 단위로 늘어날 테니까.”
“…놀랍군요.”
최준형 과장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는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아니, 그러면 지금 진행하는 메드 드로닉 계획은 어떻게…….”
“실장님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어.”
“일본 업체의 대응은 예측하지 못했나 보군요.”
“그렇지. 그거 알아? 부회장 측에서 일본 업체에 정보를 흘렸는데, 일본 업체에서 최 실장님에게 와서 넙죽 다 토로한 거야.”
“기가 막히는군요.”
“그것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나 봐. 설마 마츠시타 실무진이 와서 직접 고개를 숙일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
최준형 과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알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막상 자신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이 우습게 되어버렸다.
“…하, 하면 설마 실장님이 지금 진행하는 일을 중지시킨 겁니까?”
“방금 말했다시피 그런 말은 없었어. 이왕이면 이번 일도 잘되면 좋지. 하지만 굳이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정 안 되면 제보하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최준형 과장은 자신이 진행하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듣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미 일이 끝난 마당이다. 이제는 이 일이 최대한 의미가 있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젠장.’
* * *
최준형 과장은 절박한 상황에 놓이자 무리수를 계속 뒀다.
그는 한영 일보를 자기 회사처럼 찾아가서 진행 상황을 조사했다.
그런데 범용구 기자도 메드 드로닉의 반응에 머리를 내저었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외국계 의료기기의 뻔뻔한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보다 못한 최준형 과장은 마츠타 고지 박사가 직접 찾아와서 한 제안도 넌지시 말해주었다.
“아니, 이런 소리를 듣고 우리 배터리를 무시할 겁니까? 우리 배터리 안정성은 최고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KMB-01 배터리가 얼마나 앞선 기술인지 설명한 것이었다.
“이번 이벤트를 최대한 이용하면 최고의 특종이 될 겁니다!”
“모르겠네요.”
범용구 기자도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이 잘 풀리면 그렇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기대한 것처럼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최준형 과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영 일보를 부추기려고 노력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 * *
권재홍 비서실장은 얼마 있지 않아서 이런 최준형 과장의 행보를 발견했다. 그런 뒤 그는 한영 일보의 인맥을 통해서 최준형 과장이 뭘 하는지 알아냈다. 이 정보를 파면서 마츠타 고지 박사의 행적 또한 파악했고, 이를 최문경 부회장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문제가 좀 꼬인 것 같습니다.”
“마츠타 고지 박사가 정말 민혁이 그놈을 찾아가서 고개를 숙였어?”
“확실합니다.”
“쪽발이 새끼들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최문경 부회장은 기가 막혔다. 설마 일본 업체가 최민혁 실장에게 무릎을 꿇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그런데, 정말 맞지?”
“네. 최준형 과장이 절박해서 한영 일보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정보가 설마 우리에게 새어 나갈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정확히는 일본 업체가 와서 고개를 숙였다.
최준형 과장 처지에서는 KM 전자의 저력을 안 셈이다.
그러니 이런 점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아끼다가 똥 되니까.
실제로 한영 일보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기사화조차 하지 않았다.
잘만 하면 괜찮은 특종이 되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최준형 과장이 진행하는 일과 관련된 보고안을 다시 확인했다.
“…배터리 문제라.”
최문경 부회장은 보고서 내용을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그 동안 조카 최민혁이 대체 뭘 하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이번에는 그 진실 한 자락을 알았기 때문이다.
“배터리 홍보라, 그런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메드 드로닉 제품에 하자가 있다고 쳐도 그게 꼭 KM 전자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배터리 안정성을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내가 보기에는 지금 일본 애들이 하는 짓이 더 덩치가 큰 것 같은데?”
사실 두 가지 관계는 애매했다.
지금처럼 일본 업체가 찾아와서 저자세를 보인다면 이걸 소재로 마케팅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굳이 메드 드로닉의 심장 세동 제거기 문제를 긁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상황이 이렇게 될지는 몰랐다.
애초에 일본 업체가 찾아온 것은 최문경 부회장 때문이었으니까.
이들은 그런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신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도 최민혁 실장이 가끔 상상을 초월한 행동을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게 결국에 가서는 진짜 큰 사건이 되니까.
“다만 이번 일도 이슈가 커지면 충분히 최민혁 실장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하긴.”
최문경 부회장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순순히 수긍했다. 아니, 그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오히려 흥분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최민혁에게 큰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네?”
“설사 이 일이 KM 그룹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손가락만 빨 수는 없어. 또 나중에 가서 엉뚱한 사태가 나올 수 있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최문경 부회장은 머리로는 자신의 행동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이전처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고 굴렸다.
“그래. 이번 일은 아쉽기는 해. 하지만 이번 일의 배후가 민혁 그놈이라는 것을 메드 드로닉은 모르지 않을까?”
“…그건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어차피 이 일로 민혁이 그놈을 엿 먹이기는 어려워. 대신 메드 드로닉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면, 그놈들이 대신 민혁이 그놈에게 손을 쓰지 않을까?”
이건 또한 추측이었다.
그래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건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권 실장, 이번 일만 한번 잘해보자고. 뭐라도 해보자고. 하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말도 있잖아. 일단 찔러봐서 결과를 보는 것으로 해!”
“…알겠습니다.”
* * *
사실 메드 드로닉 코리아는 심장 세동 제거기 문제에 대해서 검토는 했지만, 제보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이유는 상황이 어떨지 예상하기 힘들어서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실상 메드 드로닉 본사는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메드 드로닉 본사는 이 배터리 관련 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건 메드 드로닉 코리아에게도 마찬가지다.
다른 일과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메드 드로닉 코리아에게 침묵했다.
페트로 김은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결국 우선 제보자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권재홍 비서실장이 메드 드로닉 본사를 때마침 방문했다.
그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더블어서 자신의 처한 상황과 지금 이 사태의 주범이 누구인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결국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입니다.”
“…….”
페트로 김은 이 황당한 사태에 일단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히 황당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자신을 찾아온 것부터가 말이다.
연결 고리가 ‘배터리’라는 것은 알았다.
다만 그렇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최 실장이 우리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그 역시 나름 KM 그룹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기에 권재홍 비서실장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이 일이 KMB-01이란 배터리를 팔아먹기 위해서 한 짓이란 말입니까?”
“KM 그룹 비서실장인 제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고작 이런 일로 절 찾아왔다는…….”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KM 그룹의 덩치도 만만치 않은데, 고작 의료기기에 적용된 배터리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권재홍 비서실장의 태도 때문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 실장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한 번에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압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측은 최민혁 실장에게 늘 당하기만 했습니다. 뭐,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KM 전자 관련 기사만 살펴봐도 알 일입니다.”
“아, 그거야…….”
“네, 맞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지금까지 한 성과를 인정해야죠. 그런데 그건 메드 드로닉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일은 자칫 내버려 두다가는 크게 뒤통수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요?”
“잘 믿기지 않죠? 우리 KM 그룹은 늘 이런 일을 당합니다. 진짜 당하기 전에도 눈치를 채기 힘들어요. 당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되니까. 메드 드로닉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까지 최민혁 실장이 배후라는 것을 짐작이라도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