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부족한 기술은 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어려워졌다.
이미 마츠시타에서 자사 특허 자료를 얻었다면 특허 분석을 통해서 반격할 수도 있으니까.
다는 아니라고 해도 일부 특허를 얻는 것만으로도 부담된다.
아니, 지금 틀림없이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렇게 달콤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뒤를 준비할 테니까.
최민혁은 넌지시 상대를 건드려 봤다.
“…뭐 박사님이 이렇게 우리 쪽에 오실 거라면, 우리 뒤통수를 칠 준비는 착착 진행하고 계시겠죠?”
마츠타 고지 박사는 만만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최 실장님은 이미 우리 마츠시타 뒤통수를 쳤지 않습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 우리 쪽에서 연구하는 특허 20가지를 침해하셨더군요. 아, 우리 기술을 빼돌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는 길이 같으니, 서로 연구 성과가 우연히 겹친 것이겠죠.”
사실 이 부분은 마츠타 고지 박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최민혁 실장이 만든 특허 대다수는 자신이 고안한 특허를 광범위하게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그도 모르는 특허가 태반이다.
결국 그렇게 본다면 겹치는 특허는 우연히 일어난 거라고 봐야 한다.
다만 확률적으로 그게 가능한지는 의아하게 생각해서 최민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역시 아닌가?’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최민혁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가 말한 대로 그 특허는 원래 마츠시타에서 인생 1회 차에서 고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마 우리가 귀사 특허를 베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츠타 고지 박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그런 흔적이 조금만 있었어도 이미 소송을 진행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거고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뭐, 손을 잡기라도 하자는 말인가요?”
“네. 물론 서로 비율을 조정해야 하겠지만 관련 특허를 모아서 비중을 따로 정하자는 겁니다. 어차피 KM 전자에서는 우리 특허가 필요할 테니까. 설마 지금 이 시점에서 MP3 특허처럼 우리 배터리 특허를 사들일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흠.”
최민혁은 실장은 이 상황이 은근히 짜증이 났지만 그렇다고 내색하지는 않았다. MP3 특허는 당시 사람들이 제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해서 일이 쉽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배터리 특허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들 바보가 아닌데, 배터리 특허가 돈이 된다는 것은 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아예 배터리 연구 분야를 작정하고 키우는 중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수천 명의 과학자가 이 배터리를 파기 시작했다.
마츠타 고지 박사는 그 배터리 전선 일부를 책임진 야전 사령관 중의 하나다. 그가 배터리 기술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막말로 마츠타 고지 박사는 한국 배터리 사업 자체를 우습게 아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최민혁 실장 앞에서는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민혁 실장은 마츠타 고지 박사의 심정이 어렴풋하게 느껴지자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마츠시타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쪽이 가진 특허만으로 우리와 손을 잡기에는 격이 많이 떨어집니다.”
대놓고 까는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도 마츠타 고지 박사는 화를 내지 않았다.
“…히타치도 있고, 소니도 합류할 의사가 있습니다.”
“호, 그건 놀랍군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당신네에 대응하기에 무리가 따랐으니까.”
최민혁은 늘 과거사에 관한 책임을 피하는 일본인인가 싶어서 마츠타 고지 박사 얼굴을 째려봤다.
하지만 마츠타 고지 박사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내심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최민혁 실장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부끄럽기는 부끄러운가 보군.’
“…이 일은 내부적으로 검토한 후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전 호텔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마츠타 고지 박사가 사무실을 나서자 최민혁에게 바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부회장님이 손을 썼군요. 하지만 일본 기업을 이용할지는 몰랐습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그룹 경영권 문제를 가지고 일본 대기업까지 끌어들이다니.”
“사실 이게 제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이죠. 그런데 솔직히 막을 방법이 없어요. 당장 샐로먼 브러더스까지 끌어들인 것을 보세요.”
조성돈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인내심이었다.
자신이 최민혁 실장이었다면 가지고 있는 금력을 최대한 이용해서 최문경 부회장을 밟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인 문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최문경 부회장이 미국 자본과 일본 대기업을 끌어들여서 확전 한다면 상황이 생각처럼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자칫하면 한국 정치권도 동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미 한부 그룹까지 끌어들였구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이번 일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에플을 끌어들인 것처럼 일본 대기업도 아군으로 엮을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그게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압박하기에 더 좋습니다.”
“이이제이군요.”
“맞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굳이 보지 않아도 최문경 부회장의 의도가 이이제이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정확히는 역이이제이군요.”
“…이 부분은 다시 한번 재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 * *
최민혁 역시 곧 임원 회의를 소집해서 마츠타 고지 박사의 방문을 알렸다.
오영근 사장은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에게 아쉬워했다.
“다른 것을 떠나 최 실장이 자기 돈으로 미래 기술을 인수한 것은 실망이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배터리 사업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오영근 사장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배터리 특허가 무려 3,000건이 넘었어. 그걸 그냥 일시적인 변덕으로 했다니, 난 믿을 수가 없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특허 3,000건이 하다 보니, 그냥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
“정확히는 미래 기술과 전자부품 연구소에서 얻은 특허입니다.”
“그런 말은 말게. 나도 전자부품 연구소 수준은 잘 아니까.”
오영근 사장 역시 크게 실망했다.
“최 실장, 우리 임원 중에 자네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괜한 변명은 하지 말게나.”
실제로 다른 임원들은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배터리 특허 관련 자료를 살피기 바빴다. 그들이 특히 놀란 사실은 마츠시타, 히타치, 소니가 같이 손을 잡았다는 점이었다.
“여기 마츠타 고지 박사가 그렇게 유명한 분입니까?”
최민혁은 굳이 마츠타 고지 박사의 이력을 숨기지 않았다.
“IP-LCD 원천기술을 우리에게 빼앗긴 히타치 공작소의 시가 마사아키 박사와 대학 동창으로, 배터리 분야에서 다섯 손가락에 안에 꼽히는 천재입니다. 아마 일본 내에서 이 배터리 분야 연구원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휴우.”
휘파람을 부는 이도 있었다.
그만큼 마츠타 고지 박사의 프로필이 간단하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은 그제야 이 문제에 집중했다.
“우리가 굳이 이들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나?”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우리 쪽에서 내놓은 배터리 기술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 업체에서 내놓은 원천기술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네. 만약 특허료로 환산하자면 어느 정도 비중인가?”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말했다.
“대략 8:2 비율 정도는 될 겁니다. 아, 우리가 8입니다.”
오영근 사장도 놀랐고, 다른 임원진 역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들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수치였다.
일본 배터리 업계는 이미 세계 시장을 선도하기 때문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리튬이온배터리 시장만 그렇다는 겁니다. 다만 카드뮴, 수소 배터리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습니다.”
“…일본이 속이 탈 만하군.”
“더욱이 지금 손을 잡는다면 그들이 얻을 것이 꽤 있을 겁니다. 일단 차세대 배터리 경쟁에서 우리 측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면 차라리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설마 일본 정부를 적으로 돌리라는 말입니까?”
“아…….”
그제야 다들 탄식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배터리 사업만이라면 저도 모른 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사업이 문제입니다. 스마트폰 사업 역시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협상을 잘 풀어 가면, 미래 일본 시장을 공략하기 좋을 겁니다.”
“그렇군.”
오영근 사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임시 임원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다른 임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배터리 이익을 일부 주고, 다른 이익을 얻는다면 꼭 손해를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미래 기술 하나와 퀄컴, 에플, ARN, KM 전자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이니까.
최민혁은 씩 웃고 말았다.
“솔직히 이번 일 배후에 우리 부회장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아니, 차라리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
다들 침묵했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은 임원 회의 막바지에 한 가지 질문했다.
“그 메드 드로닉 작업 말인데, 진행은 잘 되어가는 건가?”
“별문제 없이 진행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번 일처럼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았으면 하네. 당장 불협화음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최민혁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니까.’
* * *
미국 의료기기의 위해성은 크게 3가지로 나눈다. 1등급은 사망을 초래한 수준이고, 2등급은 가역적인 건강 문제와 관련된 수준이며, 3등급은 건강상의 문제를 일으킬 정도다.
다만 1, 2등급의 경우에 미국 내에서는 리콜과 같은 조처를 한다.
한국은 미국 내에서는 1, 2등급인 의료기기를 3등급으로 평가한다.
메드 드로닉 역시 이 기준과 별반 다르지 않다.
페트로 김이 조사한 바로는 당장에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다만 그도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골치였다.
범용구 기자를 통해서 확인한 바로 이 문제에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모를 수가 없었다. IP 시티폰 사업부 대박 매각 이후에 한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니 말이다.
그런데 페트로 김도 만약 한영 일보의 움직임이 딱 여기까지였다면 이 정도에서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범용구 기자 이후에 한영 일보 기자들이 차례대로 계속 자신을 찾아왔다.
그들이 내민 것은 바로 안이한 메드 드로닉의 대응이었다.
미국에서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범용구 기자는 이 문제를 가지고 협박했다.
“이번 일은 최민혁 실장이 단단히 벼르고 있던데, 정말 모른 척할 겁니까?”
“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이후로 자꾸 우리를 괴롭히면 당신네 언론사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우리 언론사도 당신네 반응을 최민혁 실장님에게 알릴 텐데 말이죠.”
“마음대로 해!”
페트로 김 입장에서는 짜증스러운 일이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의료기기 분야였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자신들을 상대로 무슨 근거로 움직일 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다 있어!’
* * *
범용구 기자는 역시나 마케팅 팀 최준형 과장에게 지금 일의 진행 사안을 알렸다.
사실 마케팅 팀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진행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범용구 기자는 노리는 것이 따로 있었다.
바로 배터리 기술이다.
그래서 번거로워도 굳이 이 일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