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
실은 사실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전자부품 연구소에서 진행한 배터리 기술은 최민혁이 그린 배터리 원천기술에서 아주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은 마치 전자부품 연구소와 미래 기술이 최첨단 배터리 원천기술을 고안한 것처럼 본 것이다.
권재홍 비서실장의 주장이 그랬다.
그러니 그런 걸 알 길이 없는 최문경 부회장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는 조카 최민혁이 한 일치고 가볍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상기시켰다.
“…설마 이 배터리 원천기술이 다른 일본 업체보다도 발전된 건가?”
“네. 일본 역시 아직 리튬이온배터리 관련 기술을 많이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대기업도 이 리튬이온 기술에 수백억을 퍼붓는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구체적인 결과는 없습니다.”
미래 첨단 제품에서 차세대 전지의 비중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현재 이 시장은 일본이 거의 독식하다시피 한 상태다.
일본은 이 전지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리튬이온 전지, 니켈수소 전지, 리튬 폴리머 전지가 그 주인공이다.
성능은 니켈 전지보다 니켈수소 전지가 낫고, 리튬 이온 전지가 수소메탈 전지보다 낫다.
특히 리튬이온 전지는 다른 전지에 비해서 강력한 전류를 가진다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 대기업은 이제 겨우 시제품 개발 단계에 와 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미래 기술이 리튬이온 전지 관련 특허를 마구잡이로 찍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기술은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최민혁이 원하는 것도 딱 이거였다.
배터리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최문경 부회장도 그나마 배터리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점차 현실을 인식했다.
“서, 설마 민혁이 그놈이 발전된 배터리 원천기술을 고안했다는 거야?”
“…네.”
“가만, 그러면 우리보다 일본 애들이 더 난리가 났을 것 아냐?”
“아직은 그들도 상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특허를 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 한국 특허청 말하는 거야?”
“네. 워낙에 갑자기 진행된 일이라서 아는 업체도 별로 없습니다. LC 화학은 미래 기술을 상대로 작업 중이라서 사전에 정보를 얻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네는 LC 화학 쪽 동향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는 건가?”
“네. 뭐, 최민혁 실장의 움직임을 늘 지켜본 것도 한 이유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일단 일본 배터리 업체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는 국내 문제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물건은 물건이야.’
최문경 부회장은 이 상황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몰라서 한동안 웃기만 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조카 최민혁이 한 일은 다 이와 유사했다. 다만 그게 이번엔 배터리 기술이라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하면 아버지가 KM 전자 본사를 방문한 것도 이 배터리 공급 때문이야?”
“제가 기획조정실에 확인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KD 통신은 지금 김현탁 사장이 발 빠르게 움직여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IP 시티폰 단말기는 이미 외주를 줬습니다. 그런데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배터리입니다.”
“하긴 사용 시간이 문제겠어.”
최문경 부회장은 나직이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최용욱 회장에게 자신이 단단히 찍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최용욱 회장이 최영란 본부장을 밀어주는 것이 그 이유다.
덕분에 최근 최영란 본부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점점 덩치를 키워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견제해 왔다.
최문경 부회장은 가능하면 최영란이나 최민혁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배터리가 발목을 잡았다.
“가만,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굳이 IP 시티폰에 이걸 쓸 이유가 없잖아. 소니 배터리도 어느 정도 수준은 나올 것 아냐?”
“IP 시티폰 단말기에 들어가는 배터리 성능은 꽤 중요합니다. 기존 소니 배터리의 경우와 용량과 충전 속도 면에서 아예 비교가 안 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젠장맞을!”
그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다. 최민혁이 미래 기술을 인수해서 만든 배터리는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제품보다 한 단계 앞선 것이 분명했다.
짜증이 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민혁 그놈이 어떻게 나올지 불을 보듯 뻔했다.
최악의 경우 다른 10대 대기업도 KMB-01 공급을 받는데, 자신만 배제될 수도 있었다.
‘설마 아버지가 그 때문에 KM 전자 본사를 찾아간 건가?’
그렇다면 그 엉덩이 무거운 최용욱 회장이 굳이 손자 최민혁을 찾아간 것도 말이 된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당장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아니, 자신이 끼면 오히려 불협화음만 나올 뿐이다.
“권 실장,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이번 일은 지켜보면서 장 실장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장 실장?”
“KD 통신에는 KM 그룹 지분이 꽤 들어갔습니다. 만약 KD 통신이 손실을 본다면 KM 그룹 역시 타격을 받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그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겁니다.”
“가만, 그러면 장 실장이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아버지를 꼬드겼겠네.”
“네, 이번 일은 개인적인 감정을 일단 접어두고 지켜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배터리 공급이 엉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이 그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아, 알았어. 일단 이번 일은 내가 참지. 그러니 권 실장이 가서 한번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 장 실장 그놈이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몰라. 아니면 민혁이 그놈이 이번 일을 명분 삼아서 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수도 있으니 그런 상황에 대비해야 해. 그걸로 아버지를 협박해서 압력을 넣을 수도 있으니까. 아, 맞다. 지분! 이 새끼가 이 기회를 이용하려 할 거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가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기만 했다.
‘젠장, 이놈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걸까? 도대체 민혁 이 새끼가 내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구는 거야. KM 전자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잖아!’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 욕만 하면서 내심 중얼거렸다.
그 자신이 최민혁 실장에게 했던 행동은 이미 다 잊은 셈이다.
* * *
권우영은 갑자기 늘어난 배터리 특허 출원 때문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는 정말 일이 끝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상황에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다행히 급한 배터리 특허출원은 끝났다.
지금 진행하는 일은 우회 특허를 막기 위한 기생 특허를 내는 일이다.
이 일 역시 나름 노하우가 필요했다.
그런데 KM 전자 특허 팀은 이미 이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덕분에 사수가 딱 정해진 양식에 따라서 파일을 주면, 그걸로 특허 문건만 작성하면 되었다.
스마트폰과 관련된 특허는 이미 5만 건을 넘어갔다.
특허 비용만 무려 90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내부에서 나왔다.
노가다 일을 하는 이들이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특허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난 신입 교육에서 한 팀이었던 오기동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 죽겠다. 정말 일이 너무 갑자기 쏟아지는 것 같아.”
“그래도 공장에 있을 때보다는 좋잖아.”
“하긴.”
오기동도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KM 전자의 직원 복지에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이 그 증거였다.
최근 사내에 만들어진 사내 휴게실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할애해 만들었다.
그 안에는 당구장을 비롯해 볼링장과 같은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설비가 있다.
심지어 한쪽에 쭉 늘어서 있는 3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잠을 잘 수 있는 침대까지 쭉 늘어서 있다.
그것도 그냥 침대가 아니라 최고급 호텔에서 사용하는 침대였다.
심지어 침대를 관리하는 사람도 따로 있었다.
아예 외부 전문 인력을 동원해서 따로 관리하도록 해둔 것이다.
즉 직원은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고, 배고프면 한쪽 뷔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 뷔페 역시 5성급 호텔 주방장을 스카우트해서 만든 시설이라는 것이다.
스테이크 품질이 얼마나 좋은지 입에 넣기만 해도 녹아내렸다.
“…진짜 끝내준다!”
오기동은 어지간해서는 회사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하는 타입이 아닌데, 이 초호화 직원 휴게실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권우영 역시 특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번에 이곳을 처음 이용했다.
“회사에 돈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오기동이 바로 반박했다.
“많은 정도가 아니잖아. 내가 듣기로 1조가 넘는 현금이 사내 금고에 있다는 소리가 있어.”
“설마?”
“진짜라니까. 요즘 은행장이 회사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 것이 그것 때문이라잖아.”
실제로 사실이었다.
KM 전자는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은행에 단순히 보관만 해놓았다.
즉, 언제라도 뺄 수 있는 돈이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 천문학적인 뭉칫돈이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결국 은행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KM 전자의 현금을 묶어두려고 했다.
그러니 KM 전자 로비를 오가는 한국 은행원 숫자는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 처지에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회사가 은행에 가서 대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들어오는 현금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기동은 뜻밖에도 외부 정보에 해박했다.
“월마트와 콜린스 50만 대 공급 계약도 이제 막바지란 소리가 있어.”
“그거 하기는 하는 거야?”
“어, 이미 구두상으로 확정이 났다는 소리가 있어. 영업 쪽에서 들은 사실이니, 확실할 거야.”
월마트 계약이 성사 단계에 이른 것은 에플 덕분이었다.
에플의 차세대 제품 미국 출시 일정이 공공연하게 나돌았기 때문이다.
결국 월마트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으음.”
권우영은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경영을 어떻게 해야 현금성 자산이 아니라 현금만으로 1조가 넘는 돈을 가질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오기동은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았다.
“그것도 그거지만 현금이 생기면 죄다 달러로 바꾼다는 소리가 있어. 그것 때문에 재정경제원 관리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
“진짜야?”
“어,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잖아. 재정경제원 관리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공적인 일 때문인 거잖아. 그만큼 심각하다는 거야.”
재정경제원 관리가 직접 KM 전자를 찾아온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다.
KM 전자 내에 잠자고 있는 현금이 1조를 넘는 것도 넘는 거지만 문제는 이걸 다 달러로 바꾸어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화를 달러로 바꾸어서 계속 사내에 쌓아두는 과정에서 환율이 요동을 쳤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간혹 때에 따라서 환율이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을 때 큰 영향을 준 것이다.
다만 재정경제원도 외부 시선을 의식해서 고위 관료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KM 전자를 찾지 않았는데, 그저 과장급 선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않을 정도로 인선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KM 전자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보여준다.
권우영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놀라운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건 그만 해당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도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잠깐만, 정말 재정경제원에서 KM 전자 쪽에 사람을 보냈나?”
오기동은 권우영에게 이야기하다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물론입니다. 과장급 직원이 와서 크게 알려지지 않아서 쉬쉬하기는 하는데……. 어? 당신은 누구십니… 가, 가만. 서, 설마 최용욱 회장님?!”
최용욱 회장은 자신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오기동을 탓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