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
두 사람은 흥미로운 눈길로 최준형 과장이 내놓은 자료를 살폈다.
‘이거 대박이잖아!’
단순히 최민혁 실장 이슈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메드 드로닉 의료기기 특종이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준형 과장은 자기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만족했다.
“시작은 아마 메드 드로닉 코리아를 찾아가는 것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최준형 과장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니, 이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지. 계속 확인할 필요가 있어.’
* * *
KM 전자 마케팅 팀의 예측대로 조성돈 팀장이 흘린 정보를 안 범용구 기자는 계속해서 메드 드로닉의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한영 일보의 범용구 기자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식형 의료기기에 문제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혹시…….”
페트로 김은 갑자기 찾아온 한영 일보 기자가 짜증스러웠다.
“누가 제보했습니까?”
“네? 하, 아니, 기자가 제보자를 밝히겠습니까? 설마 정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정말 확신하는 겁니까?”
“그보다 이건 확인이 안 된 정보잖습니까. 당신네 한영 일보는 가짜 뉴스를 가지고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겁니까?”
“하, 정말 황당하군요. 제가 언제 협박을 했다고 그럽니까? 제가 가지고 온 정보로는 당신네 의료기기 배터리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페트로 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일축하면서 일단 말을 높였다.
“본사 방침이 정해지면 당신네 언론사에도 밝힐 겁니다.”
“그게 언제 정해지는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아니, 공식적인 취재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이거 불법 아닙니까?”
“우리 회사는 국내법을 준수하고, 국내 의료기기법 및 의료기기 안정성 규정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기 바랍니다. 만약 가짜 뉴스를 내보내면 법적인 조치를 할 겁니다!”
“그래요? 정말 그런 대답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번 서울 중앙 병원 수술에서 이 기기가 사용된다고 하는데, 만약 사고가 터지면 당신네가 책임질 겁니까?”
“그건 당신 언론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서울 중앙 병원 수술은 국내 최초이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꽤 많은 수술이 이뤄진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 그 환자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페트로 김은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범용구 기자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범용구 기자는 일방적으로 협박만 하지는 않았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우리 국내 미래 기술에서 새로 개발한 배터리가 당신네 제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리튬이온배터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라요. 하지만 안정성이나 에너지 밀도는 타의 추종을 뛰어넘는다고 하더군요.”
“…미래 기술요?”
“아, 그렇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을 수 있겠네요.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오너로 있는 벨린 투자가 지분 80%를 소유한 미래 기술입니다.”
“…정보는 고맙습니다.”
페트로 김은 범용구 기자가 마치 영업 사원 같아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처음에는 기자가 협박하려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안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노골적이네.’
범용구 기자는 자신이 기자란 사실까지 잊은 채 뻔뻔하게 나갔다.
“천만에요.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다른 의료기기처럼 국내만 대충 넘어가려 하시는 거죠?”
“…자꾸 근거도 없는 허위 사실을 말하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신고라? 그래도 되겠어요? 상대가 최민혁 실장이니, 함부로 행동했다간 자칫 뒤통수를 제대로 맞을 수 있어요. 그 양반은 국내 오성 그룹이나 HY 그룹도 밟아버리는 양반이니까.”
“…….”
페트로 김은 ‘최민혁 실장’의 이름을 듣고서는 범용구 기자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상황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좀 과장된 생각이기는 하지만 자칫해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초동 조치를 잘못한 자신이 희생양이 되고도 남았다.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 * *
범용구 기자는 나름 메드 드로닉의 행보에서 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도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최준형 과장의 행동에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굳이 이렇게 자주 찾아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번 일은 환자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다분히 오버스러운 반응이었다.
기기가 오동작한다고 해서 꼭 환자가 죽는다고 장담하기엔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범용구 기자도 스토커가 울고 갈 최준형 과장의 행동에는 학을 뗐다.
덕분에 다른 언론사에서도 이 정보를 얻어서 관심을 뒀다.
KM 전자를 둘러싼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그 덩치를 키워갔다.
이런 KM 전자의 분위기를 KM 그룹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장승일 실장은 최근 KM 전자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기에 이런 기류를 바로 알아차렸다.
‘미래 기술 인수와 차세대 배터리라?’
두 가지는 다른 일 같아도 같은 일이었다.
구길모 차장도 이전과는 달리 시행착오를 제법 해서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기존에 최 실장님이 인수한 업체 중의 하나가 ARN입니다. 이 회사만 봐도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ARN 기반의 네트워크 컴퓨터였다.
“이건 인텔과는 달라서 로드가 크지 않은 곳에 적용하기 좋습니다. 네트워크 컴퓨터가 그 좋은 예인데, 시장이 제법 큽니다.”
하지만 네트워크 컴퓨터는 시작에 불과했다.
거기다 PDA(개인 휴대 단말기)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LC 전자가 개발한 PDA는 일정 관리, 계산기, 메모장 기능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다만 덩치가 너무 큽니다. 그렇게까지 덩치가 커진 이유 중에 하나가 배터리고요.”
LC 전자에서 만든 PDA는 에플의 메시지 패드를 베낀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기술을 확보할 목적으로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감부터가 개판이었다.
게다가 안에 적용된 기술 수준은 상업적으로 가치가 없었다.
일단 메시지 패드 같은 제품을 만들었다는 정도 수준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LC 전자가 왜 이렇게 자금을 낭비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거기서부터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추측해 보았다.
“하면 실장님이 모바일 제품 시장 선점을 위해서 미래 기술을 인수해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한다는 소리인가?”
“그게…….”
구길모 차장은 장승일 실장의 눈치를 봤다. 기획조정실의 다른 인원들도 다들 침묵했다. 그들 역시 조사하기 전까지는 내막을 잘 몰랐던 것이다.
이에 장승일 실장이 일축했다.
“쓸데없이 눈치 보지 말고 말하게.”
“…그게 실은 저도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서 얻은 정보는 아닙니다만.”
그가 내놓은 것은 KM 전자가 특허청에 출원한 특허 자료였다.
이 자료는 외부에 알려질 수 없는 자료였다.
그럼에도 역시 구길모 차장은 이 자료를 구한 것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런 점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관련 배터리 자료를 읽으면서 놀라기보다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가 배터리 기술의 의미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특허 물량에 질려서 굳이 더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이 배터리 기술도 가볍게 볼 것이 아니겠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배터리 전문가를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장승일 실장은 너저분한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됐어. 최 실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했겠나. 굳이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아. 대신 일을 서두른 만큼 문제가 있을 텐데?”
“그게 벨린 투자 자금을 이용해서 미래 기술을 인수해서 딱히 이번 일로 공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 저희가 아니라 부회장님 말입니다.”
“최 실장님이 에플 인수 때에 경험한 일 때문에 이번엔 자기 자본으로 인수했구나.”
장승일 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구길모 차장에게 계속 설명을 들으면서 내심 감탄했다. 최근 모바일 기기에 대한 관심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건 KM 그룹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IP 시티폰 단말기 때문이다.
막상 이 안을 들여다보고서야 배터리가 꽤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하면 이 KM 배터리를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이익이란 소리잖아?’
정확히는 KD 통신에 이익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일단 회의를 이 정도에서 끝내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최용욱 회장에게 이 사안을 바로 보고할 생각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먼저 상황을 알아서 최민혁 실장님과 진흙 싸움을 벌이기 전에 먼저 회장님에게 보고해야겠어.’
* * *
“…배터리라.”
최용욱 회장 역시 차세대 배터리 소식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손자 최민혁을 놔두면 늘 뭔가 한다는 것 정도는 이제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장 실장, 이게 문제가 될까?”
장승일 실장은 이미 기획조정실을 총동원해서 KMB-01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동일 크기의 기존 배터리와 비교해서 사용 시간이 최소 3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거기에 고속 충전 기능까지 가능합니다.”
“더 작게 만들고, 더 빠르게 충전이 되며, 더 오래 쓸 수 있다는 말이군.”
“단순히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기존 배터리와 비교해서는 아예 격이 다른 물건입니다. 만약 이 제품을 양산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일본 배터리 업체의 타격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런가.”
최용욱 회장은 딱히 장승일 실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름 인재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고, 보고서를 보고서 그 가치까지 꿰뚫어 보았다.
다만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의 행보에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침을 튀겨 가면서 설명했다.
“이미 LC 전자 쪽에서는 최 실장님에게 컨택한 것 같습니다. 그쪽에서도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두르는 걸로 보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소리겠지?”
“네, 이미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당장 에플이나 퀄컴 쪽에 들어갈 물량이 추가로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 배터리를 내년 말이나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KMB-01 배터리가 정말 구매할 만한 배터리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내용도 없었다.
그 신중한 장승일 실장이 KMP-01를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물건을 확보해야 합니다!”
“…흠.”
최용욱 회장은 평소와는 달리 호들갑을 떠는 장승일 실장 행동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왜 장승일 실장이 저러는지 잘 알았다.
“…자네 생각에는 문경이 그놈 때문에 민혁이 그놈이 배터리 물량으로 행패를 부린 것 같아서 그러는 건가?”
“전 확신합니다. 최 실장님은 이 배터리를 가지고 계속 장난질을 칠 겁니다.”
“하아.”
최용욱 회장은 두통 때문에 이마를 붙잡고 말았다. 그는 왜 장승일 실장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이제야 알았다.
‘문경이 그놈 성질에 또 민혁이 찾아가서 협박하고도 남지. 그러면 또 민혁이 그놈이 순순히 ‘알겠습니다’ 할 녀석은 아니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을 조용히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그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최민혁에게 선입견을 품고 오해한 것뿐이었다.
최민혁도 설마하니 장승일 실장이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지는 몰랐다.
아직 차세대 배터리 시제품이 나오기도 전인데, 이 난리를 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실상 그게 사실이니까.
신제품 양산이 무슨 호떡 굽는 것처럼 바로 되는 게 아니다.
품질도 품질이지만 양산 제품 관리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는 이미 최민혁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었다.
“제가 파악한 바로 한영 일보 쪽하고도 계속 소통하는 것을 봐서는 언론사를 통해서 대대적인 마케팅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 또한 오해였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의 성급한 판단을 그대로 믿고 말았다.
“알았어. 내가 한번 민혁이 그놈을 만나보겠어.”
“가, 감사합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다 문경이 그놈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