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
조성돈 팀장은 입을 쿡 다물었다.
그런데 이 장비 자체가 심장이 빠르게 뛸 때 충격을 가해서 심장이 정상 동작 하게 하는 장비다.
배터리는 바로 이 장치의 동력원이나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보면 급사 위험이 큰 사람에게 달아서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생명과 관련된 사안이다.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으음, 마케팅 측면에서 정말 효과적인 수단이기는 합니다. 만약 되기만 한다면 정말 대박입니다.”
“그렇지요?”
최주호 팀장이 슬쩍 질문했다.
“의료기기 가격은 얼마입니까?”
“대략 대당 2,000만 원이 넘습니다.”
“휴우, 가격이 장난 아니군요. 이 기기에 배터리를 납품만 할 수 있다면 대박이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최 과장님 말처럼 의료기기 시장을 뚫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당장 병원 실무진을 설득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쪽과 이야기를 하신 건가요?”
“네.”
최준형 과장은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하면 이미 언론사 측에는 일부 정보를 흘렸다는 말입니까?”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쪽으로 연락이 이미 갔을 겁니다.”
“하면 우리는 그다음 대안을 고민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극적으로 홍보해서 우리 미래 기술 배터리의 강점을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이 잡히자 마케팅 팀은 정신없이 회의에 집중했다.
조성돈 팀장은 마케팅 회의에 조언을 해주면서도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마케팅 팀이 이렇게 도와주니, 일이 명확하게 보이는구나. 진작 이런 식으로 해야 했어.’
* * *
조성돈 팀장은 마케팅 팀의 분위기를 확인한 후에 최민혁 실장에게 넌지시 보고했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중요하지만 사내 분위기도 무시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회사가 단기에 너무 많은 일을 진행하면서 이런 점을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최민혁 실장도 조성돈 팀장의 조언을 간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부서가 바로 기획 팀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손발이 되어서 이런저런 자잘한 일을 해왔다.
그것들의 결과만 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죠. 재무 팀에서 미국 출장을 갔다고 했으니, 기획 팀에게도 기회를 줍시다.”
“네? 우리 팀 말입니까?”
“다른 팀에게 보상을 해주기 앞서서 기획 팀이 우선이니까요.”
“하지만 당장 배터리 문제도 있는데…….”
“메드 드로닉 문제는 단기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걔들 인식은 쉽게 안 바뀌어요.”
“하면 누구에게 먼저 보상을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저보다 조 팀장님 의견이 중요해요. 당장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 일정과 맞추어서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기획 팀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좋네요. 말 나온 김에 그것부터 해결하죠. 아마 출장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런 변화가 중요하지, 지금 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이답지 않게 신중한 결정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저런 판단력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나.’
* * *
조성돈 팀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기획 팀이 우르르 몰렸다.
다만 다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각자에게 배당된 일의 범위가 생각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고 모르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배종대 과장부터 완전히 피로에 쩔어서 회의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조성돈 팀장은 노골적인 배종대 과장의 행동에 혀를 찼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판단이 새삼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은 어때요?]
침묵.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조성돈 팀장 편을 들어준 박상기 차장조차 말하지 않았다.
기존에 하는 일 외에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그들 능력을 살짝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대충 조사만 하고 끝낼 수도 없었다.
특허 팀이 이미 관련 기술과 자료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여러분이 고생하는 것은 최 실장님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최 실장님이 여러분이 한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출장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출장?]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조성돈 팀장이 그제야 피식 웃었다.
[각자 관련된 프로젝트와 연동해서 가는 출장입니다. 국내가 아닌 셈이죠. 일단 박상기 차장님의 경우에는 ARN 본사가 있는 영국에 가게 될 겁니다.]
[네?]
박상기 차장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차세대 ARN에 대한 기획을 하기 위해서는 ARN 쪽 하고도 손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실제로 KM 전자 기술진은 ARN 본사의 연구원들과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획 팀은 아니었다.
지난 회의에서 잠깐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다.
사실 박상기 차장도 할 말은 많았다.
[솔직히 오성 전자, LC 전자, HY 전자는 최근 이야기가 나오는 네트워크 컴퓨터 시제품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컴퓨터는 인텔이 아니라 220MHz ARN이 장착되어 있다.
저장장치 역시 하드가 아니라 스마트카드를 사용해서 동작시킨다.
이게 ARN이 적용된 제품 중의 하나다.
[그만큼 ARN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정작 잘 알려지지 않은 시스템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최 실장님도 그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일단 프로젝트의 큰 그림이 짜인 만큼 여러분도 자기 능력을 레벨 업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조성돈 팀장은 뜨거운 기획 팀의 시선에 꽤 만족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
‘최 실장님은 늘 이런 기분이겠지?’
[우선 박상기 차장님과 박광민 사원이 같이 유럽 출장을 가는 것으로 하죠.]
[네? 저, 정말입니까?!]
[네, 서두른다고 해서 될 문제는 아닙니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한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우리 기획 팀은 사령탑으로서 계열사의 기술을 세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그렇죠. 맞습니다. 확실히 요즘 한계를 느끼고 있는데, ARN 본사 쪽의 도움을 얻는다면 확실히 나아질 겁니다!]
박광민 사원은 등을 돌린 채 쾌재를 불렀다. 그는 영국 출장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이번 출장은 기간이 2주 이상 소요되는 일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질투에 불타서 발끈하려고 했다.
조성돈 팀장이 바로 배종대 과장을 막은 채 다른 팀원을 쳐다보았다.
[각자 자기 일과 관련해서 출장이 필요하다면 떠나도 좋습니다. 그게 미국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그만한 결과를 내야 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고개를 아래위로 흔드는 기획 팀원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진작 이래야 했어.’
* * *
박상기 차장과 박광민 사원의 영국 출장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두 사람 다 해외 출장에 결격 사유가 없어서 다른 자잘한 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준형 과장은 이 소식을 바로 접했다. 요즘 기획 팀과 계속 소통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영국 출장이라고?’
그것도 기간이 무려 16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획 팀원들 역시 미국,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 곳곳으로 출장이 잡혔다.
특히 미국 출장은 실리콘 밸리를 비롯한 미국 전역을 도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이 출장에 특허 팀 역시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특허 팀 또한 배터리 특허 이후에 KM 전자 내의 특허를 정리하고, 앞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에 가서 실제로 특허 소송 관련 업무를 경험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최준형 과장은 착잡했다. 그는 설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최민혁 실장에게 인정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준형 과장이 설친 덕분에 인사 팀이나, 홍보 팀에서도 이 사실을 곧 알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이전처럼 소극적으로 일해서는 뒤처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이 각자 자기 일에 미친 듯이 파고들자 다들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죽어라 일에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업무와 관련해 자유로웠던 KM 전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살인적인 경쟁 때문에 다들 새벽 2시까지 남아서 죽어라 일하기 시작했다.
최민혁이 이런 바뀐 분위기를 안 것은 퇴근 시간에도 사무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본 이후다.
그는 김명준 과장에게 영문을 몰라서 질문했다.
“요즘 회사 분위기 왜 이래요?”
“아, 출장 보상 때문에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네? 기획 팀 출장을 말하는 겁니까?”
“기획 팀도 있지만, 재무 팀도 있습니다. 거기에 특허 팀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기존 KM 전자는 출장 가봐야 국내 경기, 안산이 고작이었는데 이제는 영국이나, 미국을 갈 수가 있게 된 거니까요.”
“하, 고작 그 일 때문에 저런다는 말입니까?”
“…고작으로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요?”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설마 자신이 한 지시에 따른 변화가 저렇게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출장을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처구니가 없구나.’
* * *
최민혁 실장 스스로는 자신의 지시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시받는 입장은 좀 달랐다.
특히 최준형 과장은 절박했다. 그는 소극적으로 전화만 할 수가 없어서 본인이 한영 일보의 범용구 기자를 직접 찾아갔다.
그가 하려는 일은 메드 드로닉 기기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우리 KM 전자가 신형 배터리를 내놓았습니다. 어떻습니까?”
“……?”
범용구 기자는 제보를 하겠다고 찾아온 최준형 과장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KM 전자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한 행보는 온통 정보를 꽁꽁 끌어안고 진행하는 형태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마케팅 팀이 직접 나타나니 오히려 의심했다.
하지만 의심은 의심일 뿐이다.
최준형 과장이 내놓은 정보는 진짜였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미래 기술이 뭡니까?”
“아, 우리 최민혁 실장님이 지분 80%를 소유한 기업입니다. 일테면 KM 전자의 계열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까?”
범용구 기자는 딱히 비웃거나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 실장이 오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일치고 조용히 끝났던 일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경제 전문가인 최광수 기자를 불렀다.
최광수 기자는 확실히 범용구기자와는 안목이 달랐다.
“…HY 자동차가 니켈 수소 전지를 탑재해서 240㎞ 주행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마 이 배터리 기술은 차량에도 적용되는 겁니까?”
“그건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최준형 과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도 차세대 배터리가 전기자동차에 적용된다는 것은 안다. 다만 당장 KMB-01이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개발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 와중에 최광수 기자가 뜻밖에도 KM 전자에서 출원한 배터리 관련 특허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뭐, 출처는 묻지 말아주세요. 우린 한영 일보가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
최준형 과장은 거꾸로 최광수 기자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모르고 있었습니까?”
“하하, 그게 좀.”
“모르셨나 보군요. 하긴 이 특허도 꽤 중요한 기술이니까.”
한 번 찔러본 최광수 기자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었구나.’
사실 그도 긴가민가했다.
갑자기 리튬이온배터리 특허가 막 쏟아지기 시작하기에 이 정보를 얻은 후 따로 조사한 것이었다.
그 배후는 물론 KM 전자,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준형 과장은 물론 최민혁 실장 문제를 슬그머니 넘겼다.
“지금 중요한 것은 메드 드로닉 기기입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