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
조성돈 팀장은 자신이 답하면서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최주호 부장의 이야기는 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의 스케일 자체가 너무 커서 그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 뿐이었다.
과거 최민혁이 기획실장으로 왔을 때는 상상도 못 한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 * *
최민혁이 굳이 벨린 투자 자금을 이용해서 미래 기술을 인수한 것은 번거로운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지난 에플 인수 과정에서도 초반에 말이 많았다.
대부분의 KM 전자 주주조차 에플 인수에 반대한 것이었다.
그래도 당시 최민혁은 어렵게 에플 주식을 사들이기는 했다.
그 이후로는 또 주주 반응이 달라졌다.
에플 주가가 벌써 몇 번의 조정을 거치면서 8달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달러 기준으로 보면 8배 수익이었다.
따라서 KM 전자가 매입한 주식 가치 역시 8배로 늘어난다.
KM 전자 주가에도 당연히 이 부분이 반영된다.
결국 KM 전자 주가가 50만 원에 도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만 최민혁은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 자기 돈으로 인수할 수 있는 기업은 굳이 KM 전자 자금을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조성돈 팀장과 마케팅 팀장 최주호의 주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배터리에 대해서 전혀 기반이 없는 우리 회사가 배터리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면 나중에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절대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잘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최주호 팀장은 그 근거의 한 예를 들었다.
“IP 시티폰이 대표적입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손을 댄 것만으로 IP 시티폰에 관한 관심이 폭발했습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입니다. 이젠 당장 집 밖에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원래 시티폰 기능만으로도 현관 밖에서 사용할 수 있었지만 통화는 어려웠다.
그런데 IP 시티폰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이제는 현관 밖에서도 어느 정도 통화가 가능했다.
다만 집을 완전히 나가는 경우에는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한국 통신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처 공중전화에 KD 통신이 IP 시티폰 하이브리드 교환기를 설치해서 그 범위를 늘리기로 약속했다며 언급한 바 있다.
비록 IP 시티폰이 일반 이동전화보다는 통화 지역이 한정되지만, 그 범위가 시티폰보다는 더 넓어진 것이다.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착발신이 모두 가능해졌습니다. 저렴한 비용 때문에 IP 시티폰의 단점은 이제 단점도 아닙니다. 통화료가 부담되는 일반 서민들이 기대할 수밖에 없는 통신 시스템입니다.”
시티폰의 변화는 모두 최민혁 실장 덕분에 생긴 일이다.
최주호 팀장은 이런 변화로 말미암은 신뢰 때문에 더 최민혁 실장을 믿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도 최민혁 실장님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실상 IP 시티폰의 매각 가격이 2,700억에 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렇습니까.”
다만 최민혁은 IP 시티폰과 관련된 진정한 비밀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하, 이거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사람 부담스럽게 하네.’
최주호는 목소리를 올렸다.
“저흰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 KM 전자를 우선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굳이 자사 사업부를 전부 매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민혁은 상대가 자기 밥그릇을 빼앗겼다고 맹렬하게 반응하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IP 시티폰를 비롯한 다른 사업부 매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최주호 부장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에도 곤란했다.
때문에 슬그머니 지난 일을 들추었다.
“최주호 팀장이 하는 이야기는 알겠어요. 그런데 이걸 보고 말하세요.”
그가 내놓은 것은 다름 아닌 과거 에플 인수에 반대하던 내용의 기사였다.
그 기사 안에는 특히 KM 전자 대주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고 나와 있었다.
이 배후에 최문경 부회장이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정말 배터리 사업 진출에 KM 전자 주주들이 반대할 거로 생각합니까?”
“…물론 반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작 50억 투자하는 정도로는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에플 지분 매입 건은 사람들이 아직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 일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최민혁은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배터리와 관련해서 3,000건이 넘는 특허 비용만 해도 꽤 사용했습니다. 등급이 낮은 특허야 큰 비용이 안 들지만, 핵심 특허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건당 500~1,000만 원은 족히 들어갑니다. 더욱이 지금 당장 배터리 공장을 증설해야 합니다. 적어도 200~300억은 더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작 50억으로 퉁칠 수 없어요.”
“하, 하지만…….”
최민혁은 잠깐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배터리는 우리 KM 전자와는 분야가 전혀 다릅니다. 이런 사업을 같이 끌어안고 갈 수는 없어요. 차라리 계열사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정답이겠죠. 그런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괜찮은 중소기업을 하나 인수해서 키우는 게 낫습니다.”
“아니, 저는 지금 최 실장님의 사업 안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열사를 설립한다면 우리 회사 자금으로 해도 충분했습니다.”
“아, 그러니까요. 자금이 많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해요.”
“도대체 어느 주주가 감히 최 실장님을 압박한다는 말입니까?!!”
“…….”
최민혁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신선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분명히 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 회사 내부에 수천억이 넘쳐나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돈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쓸 수는 없어요. 시간이 필요한 장기적인 사업에만 쓸 수 있습니다.”
“…하면 배터리 사업은 단기로 끝낼 그저 그런 사업이란 말입니까?”
“아, 그건…….”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배터리는 솔직히 스마트폰을 검토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사업일 뿐이다.
애초에 배터리 사업 자체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대답을 더 하기 곤란했다.
최주호 팀장은 황당해서 멍하니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완전 철벽이었다.
KM 전자 주주가 완전히 바보가 아닌데, 최민혁 실장에게 반기를 들 리가 없었다.
최민혁은 결국 치트키 ‘최문경 부회장’을 넌지시 내세웠다.
“아마 일반적인 주주라면 최 부장님 말대로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배후에 있는 주주는 달라요. 건수가 생기면 파고들려고 할 겁니다.”
“…설마 배터리 사업에 투자했다고 시비를 건다는 말입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식적으로 기존 배터리 업체에게 배터리를 공급받는 것이 이득일까요? 아니면 외주 업체를 인수해서 배터리 사업을 병행하는 것이 이득일까요? 단기적으로 보면 배터리를 공급받는 게 낫습니다. 이런 포인트는 우리 부회장님이 딱 좋아하는 부분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겁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 핑계를 댔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배터리 사업으로 말미암은 이익이 얼마나 대단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배터리 사업은 장치 사업인 IPS-LCD, 제조 기반인 콜린스와는 전혀 다른 사업이니까. 굳이 그 이익을 KM 전자 주주들과 나눌 이유는 없지.’
그랬다.
최민혁이 몰라서 배터리 사업을 분리한 것은 아니었다.
KM 전자 주가를 이용하면 자본가에게 투명성을 얻어서 큰 자본을 굴리기는 좋은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다. 아무래도 대주주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끝내죠.”
“…알겠습니다.”
최주호 부장은 결국 머리를 숙인 채 실장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최민혁은 일단 조성돈 팀장에게 메드 드로닉 관련 진행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메드 드로닉은 환자의 죽음이 생기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메드 드로닉은 아직도 반응이 없습니까?”
조성돈 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만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한영 일보의 범용구 기자를 비롯한 다른 언론사에 이번 정보를 다 흘리세요. 메드 드로닉 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자세히요.”
“네? 괘, 괜찮을까요?”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심장 세동 제거기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3명이 죽었지. 1명이 죽었을 때는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고, 2명이 죽었을 때는 로비로 넘겼어. 3명이 죽고 나서야 결국 조사에 들어가서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심장 세동 제거기로 인한 사망 사고는 외국 의료기기 업체가 얼마나 한국인의 생명을 사소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람 생명이 걸려 있어요. 다른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저기 최 실장님, 최주호 팀장 말입니다. 계속 그대로 둬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물론 미래 기술 인수가 큰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배터리 사업은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우리 기획 팀이 다시 검토한 바로는 배터리 사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사업 중의 하나입니다.”
실상 최주호 부장의 항변 이후에 배터리 사업에 대한 추가 검토가 이어졌다.
파면 팔수록 배터리 사업에 대한 것이 더 나왔다.
그렇다고 기획 팀이 이 사업 마케팅까지 같이 할 수는 없었다.
“…마케팅 팀의 도움이 필요합니까?”
“미래 기술은 워낙에 회사가 작아서 마케팅 부서가 있어도 실장님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인원 충원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그랬다.
미래 기술은 이제 막 커지는 회사다. 최민혁 실장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최주호 팀장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번거로웠지만 그렇다고 조성돈 팀장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
기획과 마케팅은 엄연히 다른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최민혁이 일방적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덩치가 커지면 주먹구구식으로 할 수는 없다.
최민혁은 결국 최주호 팀장을 호출했다. 그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 있는 최주호 팀장의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일단 위로부터 해주었다.
“최 팀장님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점도 생각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최주호 팀장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납작 엎드렸다.
“솔직히 최 실장님의 혜안과 비교하면 주주나 우리 임직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래도 최 실장님이 소유주인 만큼 너그럽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흠.”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내 자금으로 에플 지분 일부와 퀄컴 주식을 인수한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나 보군.’
결국 최주호 부장의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최민혁 자신은 KM 전자와 벨린 투자 사이에 선을 그어서 이익이 큰 사업은 벨린 투자 쪽으로 몰아주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조성돈 팀장 조언처럼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조직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최민혁 자신이 그 조직을 하나부터 열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좋습니다. 최 팀장님, 이렇게 하죠. 이번 KMB-01 배터리 마케팅은 한번 그쪽에서 해보세요. 언론사 작업하는 것부터 맡아 보세요. 조성돈 팀장님에게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됩니다!”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까지는 할 필요 없고, 평소처럼만 해주세요.”
그는 90도 폴더 인사를 하는 최주호 부장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다만 자신이 한 실수에 대해서는 스스로 인정했다.
최문경 부회장 제거에만 집착해서 정작 기본적인 회사 조직을 건너뛴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 문제가 계속 쌓여왔다.
아마 최주호 부장이 저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결국 추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긴 마케팅 쪽은 소홀히 하기는 했어.’
* * *
이번에 조기 승진에 성공한 최준형 과장은 똥 마른 강아지처럼 사무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에 마케팅 팀원들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최주호 팀장을 부추긴 사람은 다름 아닌 최준형 과장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케팅 팀에 있던 만년 과장 민성일이 재무 팀으로 옮겨 간 후에 뜻밖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